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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새해가 되자 신유성은 많은 이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1월 1일이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양반은 아니었으나 왜관에서는 많은 이들이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신겸혁은 못 마땅했으나 딱히 막지는 않았다.
‘슬슬 얘기를 꺼내볼까?’
분위기가 무르익자 신유성은 결심했다. 더 늦기 전에 세상을 보겠다고. 몸은 이제 겨우 8살에 불과했지만 정신은 성인에 가까웠다.
유학생이었던 미래의 기억은 신유성에게 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해주었다.
낙후된 문명과 어린 몸은 많은 것을 제한했고 자극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왔던 신유성에겐 고문과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됐어.’
몸이 다 자란 것은 아니었으나 체력은 많이 붙었다. 키도 더 컸다. 생선과 해산물을 대량으로 섭취해 영양 상태가 좋은 데다 적당히 운동을 계속하니 쑥쑥 자랐다.
‘세상으로 나간다.’
신겸혁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나라로 가는 것은 아직 제대로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황.
‘더 기다릴 수 없어.’
반면 신유성의 마음은 하루 빨리 힘을 갖고 싶다고 난리였다.
왜관에 오지 않았다면 순순히 명나라에 갈 때까지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왜관에서 생활하며 일본의 정보를 입수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혼란은 기회.’
부자와 권력자들은 혼란을 미워하고 질서를 사랑한다.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반면 기득권을 노리는 자들은 혼란이나 변화가 찾아오길 기다린다. 혼란이 일어나면 많은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혼란이 가득한 시대에 지배당하는 입장에서 기득권으로 올라선 역사는 존재했다.
명 태조가 대표적인 예였다.
빈농 가문에서 태어나 고아였던 주원장은 나중에 명나라를 건국한 황제가 되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황제가 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원나라 말기에 펼쳐진 난세가 주원장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다.
만약 주원장이 태어났을 때 원나라가 평화로웠다면 명나라는 건국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유성은 일본에서 기회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 혼란을 정리하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가 정리하거나 최소한 지분이라도 얻어내고 싶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신겸혁은 떡을 먹다 말고 긴장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때문이었다.
“왜국에 유학을 가고 싶습니다.”
“뭐?”
“보내주십시오.”
“지금 왜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하는 소리냐?”
“대마도는 전란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대마도에서 유학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
신겸혁은 일단 이유를 물었다.
“유학을 하며 왜인들의 상황을 살피려 합니다. 그리고 왜구들의 소굴이 있다면 찾아내야지요.”
양반이 들었다면 뜻이 가상하다며 흔쾌히 허락했을 이유였다. 허나 신겸혁은 양반도 아니었고 신유성의 아버지였다.
“허락할 수 없다.”
명나라로 유학을 간다면 모를까 일본은 아니었다. 역관도 명나라 말을 하는 역관이 최고였고 일본어를 하면 좀 더 낮게 봤다. 일부러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는 양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언제나 한 단계 아래의 나라로 보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안 된다.”
귀한 자식이 더 못한 나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신겸혁은 팔짝 뛰고 싶었다.
“보내주십시오.”
“안 된다니까!”
버럭 소릴 지른 신겸혁은 부들부들 떨었다.
“왜 하필 왜냐?”
“그냥 대마도에 가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직 다 크지도 못해 멀리 가지도 못하고 답답합니다. 너무 좁습니다. 이 땅이.”
“허어.”
조선이 좁다는 소리에 신겸혁은 탄식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신유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품은 뜻이 정녕 무엇이냐?”
“그냥 세상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것뿐이더냐?”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뜻이옵니다.”
신유성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부모라면 살짝 털어놓는 것은 가능했다.
‘설마?’
가슴이 쿵했다. 입 밖에 내기도 무서운 말이 바로 역모와 관련된 말들이었다.
“이 땅은 너무 좁습니다. 저는 제 힘으로 일어나고 싶습니다.”
주어는 빼놓고 얘기했으나 신겸혁은 알아들었다.
‘임금이 되고 싶은 것인가?’
순간 신겸혁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아들이 왕이 되면 그 부모도 왕으로 추대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의 가족들을 전부 왕족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두렵고 놀라운 이야기.
그저 좀 특별한 신동이라 생각했건만 신유성의 뜻은 너무나 높았다.
‘꺾어야 할까?’
신겸혁은 고민했다. 뜻이 너무 높으면 추락했을 때 아픔도 컸다. 이루지 못할 꿈은 꾸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역모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신겸혁은 망설였다.
‘이런 걸로 내가 고민하다니.’
두렵고 무섭다는 생각만 든 게 아니었다. 가슴 한 구석에는 신유성의 뜻에 동조하는 마음이 있었다.
신겸혁 또한 더 고귀한 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욕구가 없었다면 신유성을 명나라까지 유학 보낼 마음은 품기 어려웠다.
‘위험한 일이다.’
당장 신유성을 매질해서라도 말려야 한다는 마음과 뜻대로 할 수 있게 놔줘야 한다는 마음이 싸웠다.
결국 승리한 것은 야망이었다.
“알았다. 하지만 5년이다. 네가 5년 안에 뭔가 보여주지 않는다면 돌아와서 명나라로 가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얼마 후, 신유성의 이야기를 들은 요시시게는 크게 기뻐하며 돕겠다고 나섰다.
신유성이 일본으로 유학가기로 한 일은 왜관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요시시게는 신유성의 유학을 돕기 위해 직접 나섰다.
“허락을 해주시지요.”
왜학훈도는 어이가 없었다.
‘왜로 유학을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다니.’
언제나 일본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신유성의 신분과 뜻을 듣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관의 자식이니 일찌감치 왜국에서 왜어를 익히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지.’
결국 허가는 떨어졌다. 조선의 신동이 일본으로 유학 간다고 한다면 말리고 싶은 일이었으나 신유성은 양반가의 자제가 아니기에 딱히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이제 대마도로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출항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요시시게의 이복동생인 마사모리 때문이었다.
코가 마을.
사사키 신페이는 추위에 떨며 불을 쬐고 있었다.
“콜록! 콜록!”
기침 소리는 신페이의 동생인 레이가 내는 소리였다. 신페이는 서둘러 레이를 끌어안고 불 앞에 앉았다.
“나 때문에 오빠까지.”
“괜찮아. 난 바보라서 감기 안 걸려.”
“그래도.”
레이는 자신이 짐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신페이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넌 아무 생각 말고 잠이나 자.”
레이는 결국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들었다.
‘얼른 일이 들어와야 할 텐데.’
동생이 자는 모습을 보며 신페이는 마음을 졸였다. 자칫하다가는 추위 때문에 동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언제나 혹독했다. 마을에서는 배급을 해주기는 하지만 우선순위가 존재했다. 바로 일하는 사람이 먼저였다.
날이 풀렸을 때는 일이 안 들어와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힘들었다. 더구나 최근 사사키는 한 번 일을 실패한 적이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다행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었다.
그래서 일을 받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배급은 줄어들었다. 사방이 전쟁이니 불필요한 입에 음식을 넣는 일을 줄이겠다는 의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분하지만 거스를 순 없었다.
거스르는 순간 죽임을 당할 테니까.
‘빨리 일이 들어와야 하는데.’
신페이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동생과 함께 죽게 생겼으니까.
“콜록!”
잠든 줄 알았던 레이가 다시 기침을 하자 신페이는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일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신페이는 코가 마을의 촌장을 찾아갔다.
“네 상처는?”
“다 나았습니다!”
신페이는 웃통을 벗어 배를 보여주었다. 배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다니 운이 좋구나. 움직여 봐라.”
신페이는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촌장이 지목하는 남자와 대련도 했다. 남자는 대충 상대만 해준 것에 비해 신페이는 목숨을 걸고 임했다.
“그만하면 됐다. 일을 주지.”
촌장은 신페이에게 일을 주었다.
“어쩌면 네 동생도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코가 마을에 들어온 일은 바로 신유성을 호위하는 일이었다.
“기한이 어떻게 됩니까?”
“기한은 없다. 그쪽에서 아예 사는 거니까.”
팔려나간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신페이는 받아들였다. 일을 받지 않으면 당장 겨울을 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패전한 영주의 무사들은 갈 곳을 잃었다. 이러한 무사들이 모여 만든 곳이 바로 코가 마을이었다.
신페이의 아버지 또한 영주를 잃은 뒤 방황하다 코가 마을로 흘러들어왔다.
영주를 잃은 무사들이 가진 정보는 상당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모인 무사들이 정보를 나누니 꽤 그럴싸한 정보가 많았다. 이를 토대로 이들은 닌자 집단을 이룬 것이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신페이는 마을 근처의 무덤에 들렸다. 무덤의 주인은 신페이의 아버지.
‘이제 갑니다. 레이는 제가 잘 돌볼 게요.’
신페이는 무덤에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 지 모르니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이었다.
‘편히 쉬세요.’
신페이는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부산포.
“마사모리는 뭘 하고 있지?”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못 보던 무사들이 좀 늘었다고 합니다.”
“그래?”
더 깊게 안 알아봐도 짐작이 갔다.
‘또 고용한 모양이군.’
“실력은 있어 보이고?”
“상당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낭인들 같습니다.”
‘닌자로 안 되니 낭인을 고용한 건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도 숫자를 더 늘린다.”
“닌자를 더 고용할까요?”
“아니, 닌자들보다는 우리도 무사를 더 늘리도록 하지.”
전란이 일본 전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낭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오직 신뢰. 잘못하면 도적 무리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온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안다. 대신 임무를 바꾼다. 고용한 낭인들은 부산포에 있는 무사들과 교대한다.”
위험한 자들을 가족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둘 순 없었다.
요시시게의 결정으로 부산포에 있는 믿을 수 있는 무사들은 대마도로 복귀했고 새로 고용한 낭인들이 부산포로 오게 되었다.
낭인을 고용하는데 시간이 걸려 결국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언제나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안전이다. 알겠느냐?”
신겸혁과 인사를 하는 신유성은 왜관이 있는 방향을 둘러보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어린 아이의 몸으로 바다를 건널 때가 되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뒤섞였다.
‘간다.’
신유성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고난만이 가득한 길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은 답답했다.
봄바람을 맞으며 신유성을 태운 배는 대마도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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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