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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20화 (2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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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속으로

돈을 벌려면 뭔가 팔아야 했다. 하지만 신유성에겐 땅도 인력도 현저히 부족했다.

‘뭔가 만들어야 하는데.’

장인도 없었다. 돈을 벌기에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여건이 좋지 않다고 포기하는 것은 좋은 상인이라 할 수 없었다.

여건이 좋은 상황에서 돈을 버는 것은 꼭 상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진정한 상인이라면 악조건 속에서도 거래를 통해 이익을 이끌어내야 했다.

‘거래는 서로 원하는 것의 교환.’

배가 고프기에 식량을 산다. 싸움을 해야 하니까 무기를 산다. 필요가 있는 곳에 물품을 공급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이미 다른 상인들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신유성이 끼어들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의 상인을 쳐내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영주인 노부히데가 거북해할 일.

‘대마도에 의존해선 안 돼.’

고민을 하며 돌아온 신유성은 다시 교육하는 아이들의 교육에 들어갔다.

한글을 가르치고 숫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간단한 덧셈 뺄셈을 시켰다.

‘이 녀석들을 써먹기는 한참 이르고.’

가르치면서도 돈벌이에 대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과 식사를 한 뒤에는 수련에 들어갔다. 이때만큼은 모든 것을 잊어야 했다.

신페이와 호위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수련에 임했다. 신유성을 지키려면 더 강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수련을 마치자 귀신 같이 시간을 맞춰서 노부나가가 나타났다.

“인생~ 50년~”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그냥 부르는 거지.”

노부나가는 대답을 하고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의미심장한 노래였다.

신유성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말을 건넸다.

“사는 게 허무합니까?”

“아니, 재미있지. 그나저나 요번에는 상인들을 보러 갔다며?”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크크. 그래서 좀 벌 수 있겠어?”

“생각 중입니다.”

“도와줄까?”

은근한 유혹이었다. 허나 받아들일 수 없는 유혹이었다. 받아들인다면 노부나가의 아래가 되니까.

“괜찮습니다.”

“잘 해보라구!”

슬쩍 약을 올린 노부나가는 또 뭐가 그리 바쁜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방황하는 날이 길어졌다. 그래서 신유성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살폈다. 급하게 움직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신유성은 노부나가의 초대를 받았다.

“얼마 전에 상인이 보내준 건데 볼래?”

노부나가가 부르기에 가봤더니 부채를 늘어놓고는 자랑하고 있었다.

“어때? 멋있지?”

부채 하나를 들더니 펴 보이며 노부나가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괜찮군요.”

“조선에도 이런 부채가 있나?”

“많죠.”

“아, 조선 부채 하나 가졌으면 좋겠네.”

‘부채 수집이 취미인가?’

“그런데 이런 부채는 얼마나 합니까?”

“응? 많이 비싼데 왜?”

순간 뭔가 신유성의 감각을 자꾸 긁어댔다.

‘부채가 비싸다. 부채가 비싸다?’

무릎을 탁 쳤다.

‘예술품!’

“혹시 병풍 같은 건 얼마나 합니까?”

“없어서 못 구하지. 상당히 비싸.”

전쟁이 한참이지만 그렇다고 영주들이 문화생활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욕구는 강했다. 자신의 부와 재력을 과시하며 사치품을 하사하는 것으로 가신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영주가 가난하면 가신들이 배신한다. 그러니 자신을 치장해 자신을 따르면 다 같이 잘 살게 될 거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예술품은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없어도 사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러나 가지고 있으면 남들보다 더 부유하다는 것을 뽐낼 수 있다.

‘이거라면 길이 있지.’

신유성은 당장 움직였다.

영주들이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자주 하는 것이 바로 다도회였다. 그래서 다도회를 돋보이게 해줄 수 있는 예술품은 고가에 거래되었다.

명에서 들여온 다기와 같은 경우에는 값을 매기기 어려운 보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쌀과 고기와 같은 것을 수없이 가져다 파는 것보다 다기 몇 점 가져다 파는 게 더 남을 수 있었다.

물론 공급이 너무 넘치면 안 되니 수를 조절해야 한다.

‘적당한 가격만 제시하면 돼.’

신유성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익숙하지 않은 그림은 처음에는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허나, 몇 번 그리자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호위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진정 신인이로구나. 못하는 게 뭐야?’

신유성의 머릿속에는 미래의 기억에서 본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예술품도 있었다. 사소한 상품에 쓰인 디자인도 예술적으로 만들어졌으니 그야말로 예술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디자이너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을 대량 생산품처럼 만들어 사고 팔 던 시대의 기억.

지금 시대와 비교하면 너무나 차이가 나는 감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리면 되나?’

창조적인 천재는 아니었으나 기술만 갖추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모방이 가능했다.

검술로 다져진 관찰과 집중력은 사물을 보고 그리는 데도 상당히 도움이 됐다.

붓이 익숙해지자 검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아직 성장기에 있는 몸은 새로운 경험을 그대로 흡수하며 빠르게 발전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그린 그림만 수백 장이었다.

신유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시녀들을 통해 오다 가문에 파다하게 퍼졌다. 노부나가도 호기심에 보러 왔다가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갔다.

당주인 노부히데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까?’

학문에서 신동이었으며 검술도 상당히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라고 알려진 신유성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주가 자신의 사위로 삼기 위해 혼약까지 했다.

때문에 기대가 됐다.

신동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니 분명 무엇인가 나올 것 같았다.

한 편, 신유성은 어느 정도 실력이 붙자 고민에 빠졌다.

‘무엇을 그릴까?’

영주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야 했다.

생각을 거듭하던 신유성은 무난하게 풍경화를 그리기로 했다.

‘일단 병풍이나 만들자.’

결심을 한 신유성은 종이 상인을 찾았다.

“네? 그런 큰 종이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나? 그건 잘. 미노에서 오는 종이 장수에게 이야기를 해보시는 편이.”

신유성이 원하는 크기의 종이가 없었다.

‘병풍을 만들어야 해. 크고 아름다운 병풍을!’

고만고만한 크기라면 그리 특이할 것도 없었다.

‘값을 많이 받으려면 희소성이 중요해!’

그래야 뽐내는 기분이 생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남이 가진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비싸게 치른 값이 아까워진다.

‘일단 크게!’

신유성은 엄청나게 큰 병풍을 만들 생각이었다.

종이 주문 이야기는 곧 노부나가에게도 전해졌다.

“원하는 크기의 종이가 없다고?”

“작은 것들은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작은 것은 담을 수 없지.”

노부나가는 갑자기 감명을 받은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내가 알아봐주지!”

밖으로 나간 노부나가는 계속 생각했다.

‘작은 것들은 담을 수 없다. 그래! 천하는 큰 사람이 담을 수 있는 거야. 하여간 난 놈이라니까.’

계속 걸으며 노부나가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마다 그릇이 다르니. 그릇에 맡게 일을 시키는 것이 좋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화두 하나가 명쾌해진 순간 머리가 시원해졌다.

“인생~ 50년~”

노부나가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가 아내를 찾았다.

미노의 영주성.

사이토 도산은 딸 키쵸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고개를 갸웃했다.

‘종이면 그냥 가져다 쓰면 되지 뭔 더 큰 종이를 보내달라는 거지?’

이해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명령을 내렸다.

“종이 장인에게 가서 전해라. 자르지 않은 종이를 모아두라고.”

생산된 종이를 자르지 않고 가져다 주도록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큰 종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대체 얼마나 큰 종이를 원하는 거 같은가?”

도산은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부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거 참. 모르면 물어봐야지 별 수 있나.”

사람을 보내 알아오게 했다. 그리고 도산은 깜짝 놀랐다.

“허허! 뭐하는데 그런 큰 종이가 필요하다고?”

주문한 종이는 가로 세로 10척, 3미터가 넘는 크기의 종이였다.

이렇게 큰 종이는 만들 필요가 없기에 만들지 않았다. 큰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 종이를 만드는 틀을 크게 해야 했고 이를 움직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도산은 뜻밖의 종이 주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자세히 알아봤더니 신유성이 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려 한다고?”

도산은 무척 궁금해졌다.

엉덩이가 살짝 들썩였다.

종이는 만들어졌다. 영주가 만들라고 명령을 내리니 종이 장인들은 만들어야 했다.

만들어진 종이는 무사들이 직접 호송했다. 일반 상인에게 맡겼다가 종이가 망가질까 염려해서였다.

이렇게 전달된 종이를 받은 신유성은 준비에 들어갔다.

“그게 붓입니까?”

“그렇다.”

신페이는 신유성이 든 붓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형태는 붓이 맞았으나 크기가 엄청났다.

‘저건 마치 검 같지 않은가?’

여러 가지 크기의 붓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먹을 가는 연습을 했다.

“좀 더 진하게!”

먹물의 농도를 확인하는 일도 했다.

그림 그릴 준비로 신유성의 주변은 부산해졌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날이 되자 영주의 가족들이 참관하기 위해 모였다.

그림을 그리는 장소는 대청이었다. 영주인 노부히데가 특별히 허락한 것.

대청에 들어선 이들은 거대한 종이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저런 거대한 종이를 보았나?’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종이에 살짝 압도될 정도. 그런데 신유성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앞에 섰다.

손에 든 붓은 엄청나게 컸다. 마치 무사가 검을 들고 선 것과 같은 모습.

“허어.”

몇몇 가신들은 감탄을 흘렸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은 신유성은 종이를 노려보며 상상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상에 들어갔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림을 구성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에겐 그저 멍하니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분위기 때문에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구상이 끝난 신유성은 각오를 입에 담았다.

“기회는 단 한 번.”

거대한 붓은 먹물을 머금었다.

“인생도 단 한 번.”

신유성의 몸이 움직였다. 맨발로 종이 위를 밟으며 나아가며 붓을 휘둘렀다.

먹물을 머금은 거대한 붓은 종이 위를 누볐다.

가벼운 발걸음은 바람과 같았다. 붓은 발걸음과 함께 선을 그려냈다.

굵직한 선이 완성되자 신유성은 종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발판을 대령하게 했다.

채색을 위해선 종이 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종이에 닿지 않는 기다란 발판은 만든 것.

발판 위에 선 신유성은 작은 붓으로 열심히 오가며 그림에 그려갔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으나 참관하는 이들은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신유성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산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 걸리자 힘든 이들은 잠시 밖에 나갔다 오기도 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쉬지 않고 그렸다.

마치 지금 자리를 뜨면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 같은 절박함을 담고.

아침에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림이 완성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종이에는 거대한 산이 담겨져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청을 나서는 신유성의 부탁에 무사들이 아무도 들락거리지 못하게 호위를 섰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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