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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21화 (2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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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속으로

거대한 그림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림만 완성해서는 소용없었다.

그림에 맞는 틀이 만들어져야 했다.

신유성은 이를 부탁했다.

“뛰어난 목수를 불러 병풍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접는 방식이 아닌 나무판을 그대로 세우는 경병풍 방식을 선택했다.

그림이 탐이 난 노부히데는 목수들을 불러 판을 짜게 했다. 그리고 신유성이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품질을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거대한 병풍이 만들어졌다.

거산을 바라보던 노부히데는 감동했다.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다실의 한쪽에 세워둔 병풍 앞에 앉은 차를 마셨다.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기분은 최고였다.

더구나 차를 마시러 온 명사들은 하나 같이 병풍을 극찬했다.

“정말 산을 옮겨 놓은 것 같군요.”

“생동감이 넘칩니다.”

칭찬을 받을수록 어깨가 으쓱였다. 그렇기에 노부히데는 고민했다.

‘대체 얼마를 줘야 할까?’

신유성은 아직 가격을 부르지 않았다.

예술품의 가격은 정해져있지 않다. 가치를 알아보는 이는 비싸게 가격을 불러도 지불하지만 가치를 모르거나 흥미가 없는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얼마를 부를까?’

보통 상품에는 시세란 것이 존재하지만 예술품은 그 가치를 매기기가 매우 어려웠다.

‘경매라도 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노부히데의 앞에서 그린 그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고 하면 모욕을 했다며 목을 베겠다고 덤빌 수 있었다.

‘으음, 많이 부를까?’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부를 수 있었으나 은근히 걱정됐다. 너무 많이 부르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싸게 넘기기는 싫었다.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데.’

고민을 하던 신유성은 돈이나 물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기로 했다.

“배 한 척과 적당히 여자와 아이들을 주시죠. 그리고 제가 오와리 떠날 때까지 식비도 포함해서요.”

“흐음.”

내심 비싼 금액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신유성은 색다른 거래를 요청해왔다. 이야기를 들은 노부히데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야 한 척 더 만들면 그만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많다.’

숫자가 좀 되긴 하지만 식사를 제공하는 정도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 가지고 되겠나?”

기분이 좋았던 노부히데는 자신이 너무 적게 내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나머지는 노부히데님의 마음으로 받도록 하죠.”

“뭐? 하하하하!”

노부히데는 유쾌하게 웃었다.

“좋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 내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주겠다!”

신유성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사람 하나를 만들었다.

배신이 판치는 전국시대에.......

그림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가장 먼저 정보를 입수한 것은 사이토 도산이었다.

“그러니까 10척짜리 종이 위에 산을 담았습니다. 엄청나게 거대한데 이 그림을 병풍으로 뒤에 세운 다실이 있답니다. 그 앞에서 차를 마시면 거산의 옆에 앉은 기분이라고 합니다.”

“뭣이? 그런 그림이?”

도산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노부히데가 가졌다니 강렬한 질투심이 일었다.

‘쳐들어가서 뺏을까?’

미노의 살모사라고 불릴 만큼 독하고 음흉한 도산이었다.

‘아니지.’

더 편한 방법이 있었다. 노부나가가 오다 가문을 계승하면 그때 집어삼키는 것.

도산이 괜히 자신의 딸을 멍청이라 불리는 노부나가에게 보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못 참겠어.’

결국 도산은 신유성이 미노에 와줄 것을 청했다.

신유성은 고민했다. 사이토 도산이란 자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은인을 배신한 사람.’

배신의 표본. 하극상의 최고봉. 기타 등등 안 좋은 것으로 상위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거부하기도 그렇고 가기도 그렇고.’

거부한다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도산이 신유성에게 당장 어떻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최대한 적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도산에게 원한을 사면 나중에 누가 습격을 했는지 헷갈리게 된다.’

신유성은 아직도 자신을 습격했던 자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간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분위기가 안 좋다면 도망칠 생각을 하고 신유성은 호위들을 불렀다.

신유성이 미노로 떠나고 난 뒤, 노부나가는 더욱 바쁘게 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안면을 텄다. 하지만 그냥 놀러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생각했다. 겉으로는 노는 것처럼 보여도 머릿속으로는 영지를 새롭게 건설하는 일을 반복했다.

하루 일과처럼 밖을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온 노부나가는 씻고는 다실로 향했다.

노부히데가 쓰는 곳이었지만 노부히데가 쓰지 않을 때는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오붓하게 차를 마시고 싶다는 요청에 노부히데는 허락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노부나가의 아내 키쵸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동생인 오이치가 방으로 들어와 노부나가의 품에 안겼다.

“멋있지?”

“응!”

그림을 마주한 노부나가는 감탄했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롭다.’

거대한 산을 마주하면 살짝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기회는 한 번. 인생도 한 번.’

신유성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했던 말은 가슴에 묘하게 울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너무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정말 인생이 한 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래의 기억 때문이었다. 다만 한 번이라는 말을 한 이유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긴장감을 적당히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노부나가는 이런 신유성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다.

‘그 녀석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쟁심도 느껴졌다. 자신은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이었다.

‘넌 산을 그렸지만 난 산을 손에 넣겠다.’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어서 와라.”

신유성을 본 사이토 도산은 감탄했다.

‘이렇게 어린 녀석이?’

정말 소문의 반만이라도 확실하다면 뛰어난 인재였다.

‘키쵸를 그 놈에게 안 보냈다면.’

오와리에 대한 탐욕 때문에 딸을 노부나가에 보냈다. 지금 와서 도산은 시집보낸 딸을 잘못 보냈다는 생각이 살짝 스쳤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험, 그래 그런데 이번에 준비한 종이가 좀 큰데 그릴 수 있겠나?”

“얼마나 큰 종이입니까?”

“20척이다.”

신유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로 세로 길이가 10척씩 더 늘어났다.

‘가로 세로 6미터를 좀 넘는 건가?’

종이의 크기를 생각하며 신유성은 살짝 경악했다.

‘요즘 시대에 이걸 만들려고 했다면.’

사람들이 죽어라 고생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못 하겠나?”

대답이 없자 자신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 도산이 물었다.

“그 넓은 종이에 무엇을 그려야할지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생각은 털어냈다.

“그래 그럼 내 산이 더 큰 산이 되겠지?”

도산은 더 큰 산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산을 그릴 순 없습니다.”

“왜?”

“큰 산은 노부히데님에게 그려드렸습니다.”

“나한테는 안 어울린다는 소린가?”

도산의 표정이 나빠졌다. 하지만 신유성은 태연하게 답했다.

“같은 그림을 계속 그리면 그림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비슷한 그림이 여러 장이면 가치는 조금씩 떨어지게 된다고 신유성은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것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뭔가 다른 것을 그려드리겠습니다.”

“산이 아니고?”

“세상에 큰 것이 어니 산뿐이겠습니까?”

대답을 한 신유성은 물러났다.

도산의 집에 머물며 신유성은 준비에 들어갔다. 도산이 준비한 종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실패를 대비한 예비용이 있긴 했지만 많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종이가 너무 커서 중간에 찢어지는 것이 많았다.

10척짜리도 힘들었는데 20척짜리로 늘어나니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장인들은 목숨을 걸고 만들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 할 수 있었다.

신유성이 사용하게 될 종이는 이렇게 귀한 것.

당연히 준비를 하는 것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림을 그릴 공간에는 길이에 맞는 발판도 준비되었다.

‘큰 산을 원한 것을 보면 분명 권위적이다.’

신유성은 땅에 그림을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권위를 세워주는 그림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지우고 반복하던 신유성은 급기야 하나의 구상을 떠올렸다.

이번 그림을 그릴 때 신유성은 큰 붓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도산은 궁금해졌으나 묻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협박을 해서라도 산을 그리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러나 신유성이 발판 위에 올라가 차근차근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건물인가?’

굉장히 공을 들여서 하나하나 그려 넣는 것이 보였다. 그림은 꽤 긴 시간 동안 그려졌으나 도산은 볼 일을 볼 때 빼고는 계속 그림 앞에 머물렀다.

먹을 것도 그림 앞에서 먹고 피곤하면 그냥 자리에 누워 잠도 잤다.

아침에 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저녁이 되어도 완성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만에 못 그리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그리죠.”

“그래, 푹 쉬고. 다들 들어라! 아무도 이곳에 들지 못하게 지켜라!”

도산은 행여 누군가 그림을 망치기라도 할까봐 불안해하며 무사들을 불렀다.

신유성은 대청 한 구석에 자리를 깔고 잤다. 그리고 아침이 오자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그림은 완성됐다.

“허허! 허허허허!”

완성된 그림을 본 도산은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신유성이 그린 것은 정교하기 그지없는 거성이었다.

‘저게 몇 층인가?’

끝을 모르고 하늘 높이 치솟은 거성이 한쪽에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도시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크기의 성과 도시였다.

신유성은 자신의 기억에 과장을 더해 성을 더욱 크게 그렸고 끝없이 펼쳐진 도시를 그렸다.

“이 그림의 이름은 무엇인가?”

“번영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번영. 번영. 허허허허. 좋은 이름이로구나.”

대도시의 주인은 아무나 될 수 없었다.

‘천하인이나 가질 수 있지! 암!’

완성된 그림은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되었다. 도산은 그림을 위한 방을 따로 만들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노부히데님에게는 배 한 척과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이들을 먹일 양식을 요구했었습니다.”

“그게 단가?”

“그리고 노부히데님의 마음을 달라고 했었죠.”

“하하. 그래? 그런데 그렇게는 못 주겠군.”

도산의 말에 신유성은 당황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 그림이 더 큰데 그것만 줘서야 되겠나?”

살짝 농담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신유성은 마음이 풀렸다.

“배는 다섯 척을 주지. 이런 그림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

도산은 그림의 가격을 확 올려버렸다.

‘이렇게 많이 주면 어설픈 놈들은 그려달라고 못하겠지?’

속셈이 아주 없는 계산은 아니었다. 도산은 가격을 올려 일정한 시세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힘이 있는 놈들은 무리해가면서 그림을 얻게 되면 힘이 좀 빠지겠지.’

그림은 사치품이었다. 도산은 계산을 깔아두고 가격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었다.

갑자기 대박이 터졌지만 신유성은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앞으로 몇 장 더 못 팔겠구나.’

그림은 사치품이기 때문에 부유한 자가 아니면 팔기 어려웠다. 가격을 확 올린 것에서 신유성은 도산의 생각이 조금은 보였다.

‘질투겠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그 이하로 그려주지 말라는.’

더 작은 그림을 그려준다면 도산은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그림을 더 적게 받고 그려준다면 분명 분노해 자객을 보낼 터였다.

‘평생 그림만 그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성은 두 번 다시 그리지 않겠습니다.”

도산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신유성은 무사히 오와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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