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신의 유희-22화 (2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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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속으로

사이토 도산의 그림은 곧 알려졌다.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위신을 세우기 위한 그림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거대한 성과 도시를 그린 그림은 말 그대로 번영을 떠올리게 했다. 소문을 들은 영주들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이 그림의 가격을 듣고 들어 올렸던 엉덩이를 내렸다.

“그 인간이 그렇게 주고 그림을 샀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려면 이젠 엄청난 돈을 내야 할 판이었다. 그림의 크기가 더 커지자 가격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더 큰 그림은 얼마나 줘야할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주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이 선불을 요구한다면?

불러다놓고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쉽게 수작을 부리긴 어려웠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꼭 그 녀석한테 그려달라고 할 필요는 없지!’

일본에도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은 있었다. 영주들은 저마다 대형 그림을 갖기 위해 수를 썼다.

한편, 그림의 값으로 얻게 된 여자와 아이들을 가르치던 신유성은 한계를 느꼈다.

‘한글은 가르쳤지만 조선말을 가르치는 것은 힘들다.’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신유성 한 명 뿐이었다.

‘조선말을 못하게 되면 일본에서밖에 쓸 수 없다.’

그것은 좋지 않았다.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해서 신유성은 신겸혁에게 서신을 보냈다.

쾌속선을 통해 빠르게 부산포의 왜관까지 배달된 편지. 신겸혁은 아들이 보낸 편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학을 역으로 편찬해 조선말을 배울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달라?’

아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데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훌륭하구나.’

보내온 편지의 내용에는 그 동안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벌어들인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여자와 아이들을 얻은 것은 물론 거대한 상선을 여섯 척이나 벌었다는 것이었다. 대마도주가 준 것까지 합치면 무려 일곱 척을 가진 거부였다.

어린 나이에 벌어들인 것 치고는 상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현재 배들은 대마도주의 아들인 요시시게에게 맡겨 돈을 버는 데 써달라고 했다는 것. 왜관에서 장사를 할 때 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상품을 꾹꾹 눌러 담아 일본에 가져가서 팔면 그게 다 이득이었다.

이렇게 배를 대여해주고 일정한 금액을 사용료로 받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젠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신겸혁은 아들이 정말 나라를 세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얼른 움직이자.’

아들의 능력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도울 차례였다. 신겸혁은 편지를 써서 동료 역관들에게 전달했다. 일본인이 조선말을 배우는데 쓸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달라고.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편지와 함께 보내진 재물은 대가를 지불하는데 쓰였다.

해가 바뀌었다. 그리고 몇 달이 더 흘렀다.

1549년.

아홉 살이 된 신유성은 평소처럼 무예를 수련했다. 이제는 검이 아닌 창술도 수련했다. 일본 보병의 주요 병과는 아직까지는 창병이었던 까닭이다.

‘전장에서 싸울 때 창에 대한 것을 모르면 당할 수 있다.’

똑같이 검을 들고 싸우는 것에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하지만 창을 상대하는 일은 달랐다. 특히 나기나타, 치도가 까다로웠다. 언월도와 유사한 형태로 한 마디로 자루가 긴 검과 같았다.

신유성이 갑자기 창술에 관심을 둔 것은 바로 오와리가 전쟁을 하던 것과 관계가 있었다.

3월, 노부히데의 장남 노부히로가 이마가와와 마츠다이라가 연합한 25만의 대군에 맞서 안쇼성에서 승리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오와리의 기세는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이마가와를 치기 위해 움직인다는 말도 나왔다.

병사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래서 신유성은 그림을 그리러 가는 대신 병사들의 훈련을 구경하러 다녔다. 사이토 도산의 초빙 이후로 그림은 그리러 가지 않고 계속 뭉갰다. 이유는 몸값을 좀 더 높이기 위해서.

그러나 이제는 전쟁을 배우기 위해 그림 그리는 일은 잠시 뒤로 밀어두었다. 나라를 세울 뜻을 가졌으니 군대에 대해 더욱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창병들과 마주하고 상대하는 것을 상상해보았지만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어서였다.

해서 목봉을 들고 창술을 연마하며 창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다. 여기에 나기나타가 끼어드니 더 복잡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신유성은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수련이 끝나고 나서 한 일은 여자와 아이들과 식사였다. 아무리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같이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 밥 먹자.”

신유성이 자리에 앉기 전에는 아무도 눈앞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신유성이 밥을 입에 넣은 후에야 식사가 시작되었다. 매우 권위적인 행동이었지만 신유성은 이를 꼭 지켰다.

일상 속에서 위치를 자각하게 만드는 고도의 술수였던 것이다.

또한 함께 식사하며 공동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도 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신유성이 자신들을 이끄는 존재라는 것을 매번 식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다.

쌀밥과 반찬을 배부르게 먹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어쨌거나 총 80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여자들이 나서서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바로 공부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맨 처음 신유성이 키우게 된 아이들은 이제는 다른 아이들을 이끄는 입장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조직에 익숙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신유성은 신페이에게 보고를 들었다.

“새로 들어온 소식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뭐?”

마츠다이라의 당주인 히로타다가 죽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자신의 군대를 미카와로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녀석은 괜찮을까?’

신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케치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케치요는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히로타다는 적도 아닌 가신의 손에 죽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겁이 났다. 어려서부터 기댈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명목상이라도 아버지라는 버팀목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사라졌다.

기댈 곳을 찾지 못한 다케치요는 우울해졌다. 밥을 보고도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신유성이 들어왔다.

“밥을 안 먹는다고?”

다정한 신유성의 목소리에 다케치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흐윽.”

참으려 했으나 눈물이 나왔다.

“참지 않아도 돼.”

신유성이 가만히 안아주자 다케치요는 끅끅 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울분과 서러움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다 괜찮아 질 거야.”

신유성은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울음을 그치자 신유성은 밥을 내밀었다.

“밥은 꼭 먹어. 배가 고프면 힘이 안 나잖아.”

다케치요는 천천히 밥을 먹었다. 식사하는 모습을 신유성은 물끄러미 지켜봐주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다케치요에게는 그 무엇보다 위로가 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신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올게.”

이후, 신유성은 매일 다케치요를 찾았다.

매일 신유성의 방문을 받은 다케치요는 신유성을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인질 생활을 하는 다케치요에게 신유성은 마지막 정신적 보루와 같았다.

“형님은 저 안 버릴 거죠?”

다케치요는 입버릇처럼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도 오와리에 있지.”

“그렇죠?”

다케치요는 안심했다. 신유성 마저 없어져 버린다면 그야말로 완전히 버려진다고 생각해서 더욱 매달렸다.

“이야, 둘이서 매일 노는 건가?”

그리고 이런 두 사람 사이에 노부나가가 끼어들었다. 히죽 웃으며 찾아온 노부나가는 오이치를 안고 있었다.

“애들은 애들끼리 놀아야지.”

“저도 애입니다만?”

“네가 애냐? 네 안에는 요괴가 있을 거야.”

요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유성은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순전히 미래의 기억 때문이었다.

“음양사라도 부르시지 그러십니까?”

“됐어. 그 놈들은 사기꾼이야.”

“그럼 어쩌시려고?”

“넌 해롭지 않은 요괴니까 내가 부하로 삼을 거야.”

두 사람의 대화에 다케치요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이치는 영문도 모르기 따라 웃었다.

“비웃지 말라고? 나는 장차 어어어엄청난 영주가 될 거니까.”

노부나가는 다케치요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친근한 행동이었지만 다케치요는 얼른 신유성의 뒤로 숨어버렸다.

“쳇, 왜 나만 보면 그러지? 난 그냥 친해지고 싶은 건데 말이야.”

“노부나가님의 진심은 전해졌을 겁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부탁이 있는데.”

“무슨 부탁이시죠?”

“요번에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지 않겠어?”

“어딜요?”

“장인이 날 좀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줬으면 좋겠거든.”

신유성은 슬쩍 다케치요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노부나가냐? 다케치요냐?’

노부나가와 친분을 쌓는 것은 중요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다케치요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사이토님을 뵈면 다시 그림을 그리러 가야 할 것 같으니 사양하죠.”

“왜? 그림 그리면 또 많이 벌 텐데?”

“돈도 좋지만 사람도 중요하죠.”

다케치요의 머리를 쓰다듬는 신유성을 보며 노부나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 참.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노부나가가 물러나자 다케치요는 감격어린 표정으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놀자.”

그리고 소소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잠도 같이 잤다.

신유성은 다케치요의 안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겸혁에게 부탁한 것은 여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조선말을 가르치는 책을 새롭게 만들고 이를 가르칠 노비를 사서 보내느라 시간이 걸렸다.

노비들은 낯선 땅에 오게 되자 두려워했다. 왜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왜구들의 나라에 오게 되었으니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다.”

“예, 주인어른.”

노비들은 신유성의 말에 고분고분했다. 신유성의 뜻에 따라 목숨이 좌우되니 이제부터 잘 따라야 할 대상이었다.

“할 일은 간단하다. 이제부터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에게 조선말로 일을 가르치면 된다.”

신유성은 한글로 작성한 표를 나눠주었다.

“매일 거기에 나온 것들을 조금씩 가르치고 확인해라. 그것만 잘하면 된다.”

노비들은 신유성의 뜻대로 아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다. 가르치면서 이런 저런 잡다한 일을 시켰다. 그리고 노비들도 숫자와 셈을 배우고 무기를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한 노비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여자와 눈이 맞았다.

이 사실은 금방 신유성의 귀에 들어갔다.

‘잘 됐군.’

신유성은 노비와 여자를 짝을 지어줬다. 그러자 노비들이 너도나도 여자를 한 명씩 골랐다. 여자들도 남자가 생기는 일에 거부감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족이 생기니 노비들은 더 빠르게 안정을 취했다.

오다와 이마가와의 대립은 갈수록 격해졌다. 덕분에 신유성은 전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노부나가의 철포 부대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많이 쏘진 못하는 군.’

빨라야 1분에 2발 쏘는 수준이었다.

철포에 흑색화약을 넣고 총알 넣고 불붙인 다음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야 사격이 이뤄졌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장전이었다.

화약을 너무 적게 넣으면 화력이 약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총이 깨진다.

화약이 많으면 폭발하는 힘이 강해져서 결국 총에 무리가 오는 것이었다.

즉, 장전 할 때는 적정량을 넣어야 했는데 이게 서두르다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돈도 많이 들고.’

더구나 화약은 남만 상인들에게서 구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말 비싼 가격이었다.

그야말로 돈 잡아먹는 군대였다.

이 때문에 오다 가문 내에선 노부나가가 또 바보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활을 쓰면 될 것을 비싼 철포를 쓴다는 것이었다.

물론 총에도 장점이 있었다. 활을 제대로 쏘려면 숙련된 궁수가 있어야 하지만 총은 숙련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이들은 오다의 가신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큰 승리를 거두었던 노부히로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워낙에 자신을 잘 감추고 사람들을 잘 속여 심지어 친아버지인 노부히데마저도 노부나가의 진면목을 못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들은 아들.

아들이 전쟁에 임하기 위해 부대 만들 돈으로 총을 대량 구매했지만 그것을 탓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 다른 활약을 못하고 뒤로 밀려나면 후계구도가 더 간단해지니까.

하지만 노부나가가 부대를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며 신유성은 언젠가 파란이 일 것을 예감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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