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 / 0271 ----------------------------------------------
전란 속으로
11월.
비보가 오와리를 흔들었다.
안쇼성이 함락 당하고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 노부히로가 이마가와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로 인해 노부히데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가신들도 안절부절이었다.
그때, 사신이 왔다.
인질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노부히로와 다케치요를 교환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노부히데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유성의 오와리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냥 있어도 되는데? 넌 인질이 아니야.”
“다케치요의 곁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습니다.”
“음.......”
신유성은 다케치요를 따라가기로 했다.
모든 것을 정리했다. 그 동안 대마도에서 보내준 돈으로 꾸준히 수를 늘려 아이들만 무려 200명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영주성 밖에 거주지를 만들어 따로 생활할 정도였다.
거주지를 정리하고 살림을 모두 챙겼다.
그리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다케치요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살짝 들떠 있었다. 허나, 삶은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일까?
다케치요는 고향인 오카자키성이 아닌 슨푸성으로 이송되었다.
“어서 와라. 이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슨푸성에 든 신유성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만나게 되었다.
“신유성이라고 합니다.”
“그래, 참으로 헌앙하구나.”
“감사합니다.”
“내 부탁이 있다. 나를 위한 그림을 그려라.”
“어느 정도의 크기입니까?”
척하면 척이었다. 이마가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유성이 알아듣자 흐뭇하게 웃었다.
“30척!”
과시욕이 엄청난 이마가와가 아닐 수 없었다.
‘30척짜리 종이라니. 사람 여럿 잡았겠구나.’
실제로 30척짜리 종이를 만드는 일은 고난의 행보였다. 종이를 만드는 틀부터 어마어마했다. 이를 움직이기 위해 동원된 인력 만해도 엄청났다.
허나, 과시욕에 불타던 이마가와는 꼭 종이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딱 2장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종이는 비단처럼 둘둘 말아 고이 보관 중이었다. 너무 힘들게 만든 종이라 아무에게나 작업을 맡길 수도 없었다. 그 동안 다른 영주들이 10척짜리 종이에 그림을 그리게 해서 실패하고는 엄청나게 화를 낸 일들이 있었다.
해서 요시모토는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신유성을 기다렸다.
“할 수 있겠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잠시 준비할 시간을 주십시오.”
“당연한 일! 하하하하!”
최근의 승리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요시모토는 크게 웃었다.
신유성이 이번에 그리게 된 것은 대군이었다. 요시모토에 대한 이야기를 가신들에게 듣고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무엇을 가장 좋아할지 생각해보았다.
넘치는 자신감에 어울리는 소재는 찾기 쉬웠다. 여러 그림을 그려 요시모토에게 보여준 결과 군대 그림을 가장 좋아했다.
해서 신유성은 대군을 그리기로 했다.
30척의 종이에 군대가 그려졌다. 지평선 끝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대군. 섬세하게 표현하기가 상당히 힘들었으나 신유성은 끈질기게 그렸다.
무려 열흘이나 투자한 그림.
요시모토는 중간에 그림을 확인할 때마다 흥분한 표정으로 불편한 것이 없도록 지시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조심스럽게 거대한 판에 붙여 준비된 방에 세웠다.
30척에 달하는 그림이라 세우는 것도 공사였다.
“거기 조심해! 땀도 흘리지 마!”
그림 근처에 다가가는 이들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
땀이나 침이 튀면 그림이 망가진다며 두건으로 가리게 했다. 인부들은 눈만 내놓고 공사를 했다.
거대한 그림은 결국 방에 세워졌다.
“하하하하하하! 훌륭하구나!”
단순하다면 단순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세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 모습에선 군기가 느껴졌다.
그림을 바라보던 요시모토는 마치 대군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압도적인 대군이었다.
‘이것이 나의 군대!’
슬쩍 돌아서 그림 앞에 앉은 요시모토는 가신들을 불러다 앉혔다.
“어떤가?”
“역시 대군의 주인은 한분뿐이십니다!”
“천하가 주군의 것이 될 것입니다!”
가신들도 흥분했다. 미카와까지 손에 넣고 오다를 몰아붙이고 있는 지금. 이마가와 가문은 최고의 자리에 근접해 있었다.
거대한 대군을 등 뒤에 두고 앉아 있는 요시모토는 정말 엄청난 대군을 거느린 영주처럼 보였다.
‘정말 훌륭한 그림이야.’
가신들의 얼굴에서 경외심이 살짝 흘러나오는 것을 본 요시모토는 매우 만족했다.
그림의 효과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신유성은 한 번 그린 것은 안 그리기로 알려졌다. 사이토 도산의 그림을 그려줄 때 산을 그려줄 것을 거절한 일화 때문이었다.
‘이제 대군은 나의 것이다.’
결국 신유성이 그린 대군은 요시모토가 주인이란 소리였다. 그 외에 다른 영주가 갖게 될 일은 없다는 의미.
‘가격을 더 올려야겠어. 배 다섯 척은 너무 적어.’
만족한 요시모토는 배 열 척을 가격으로 지불했다. 신유성이 원하는 여자와 아이들은 덤이었다.
슨푸에서의 생활은 불편함은 없었다. 요시모토는 신유성을 귀빈으로 대접해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다케치요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다케치요님은 겐오니님이 맡으셨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은 다케치요와 신유성이 계속 붙어 있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만나지 못하게 했다.
신유성이 노부나가와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와리에서 신유성은 노부나가와 가깝게 지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울린 두 사람은 친구로 보일 뿐이었다.
이미 한 번 오다 쪽에서 다케치요를 빼간 전적이 있으니 방심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귀빈으로 대접해주지만 경계심까지 놔버린 것은 아니었다.
‘불편해.’
생활에 불편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이제 볼일 없다 이거지?’
신유성은 떠나야 함을 느꼈다. 슨푸성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기반을 잡을 준비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
‘작은 영지 정도는 만들 수 있겠어.’
배가 무려 17척이었다. 모두 거대한 상선이었다. 이 배를 요시시게에게 맡겨서 얻게 될 재물은 상당했다.
‘그림 몇 장만 더 그리면 되겠는데.’
하지만 요시모토가 가격을 너무 올려버렸다.
그림 한 장에 배를 열 척이나 지불할 영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모두가 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작은 그림이라도 그려달라고 요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기 위해선 뻔질나게 돌아다녀야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신유성은 떠나기로 결정했다. 오와리처럼 마음 편하게 머물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녀석이나 보고 가야겠네.’
신유성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케치요와 만나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다.
“형님!”
다시 만나게 된 다케치요는 환하게 웃으며 신유성의 품에 안겼다.
“잘 지냈지?”
“네!”
“씩씩하구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다케치요는 좋아서 더욱 붙었다.
“오늘은 뭘 하고 놀까?”
“그림을 그려주세요!”
“그림을?”
“네!”
신유성은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다. 무사들의 그림도 그려주고 배도 그려주었다. 다케치요는 계속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밥도 같이 먹었다.
두 사람 다 오늘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케치요는 신유성과 보게 될 마지막 날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렇기에 울지 않고 웃었다.
원하는 것을 언제까지고 쥐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슬펐지만 웃었다.
신유성과 지내는 마지막 날을 눈물로 장식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신유성 또한 다케치요의 마음을 느끼고 함께 웃어주었다.
그래서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건 멍청이 노부나가 얼굴.”
슥슥 붓을 놀리자 노부나가의 얼굴이 종이에 담겼다.
“히힛.”
“그리고 이건 멋진 다케치요 얼굴.”
익살맞은 꼬마의 그림에 다케치요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나?”
“그래.”
“그리고 이건 더 멋진 내 얼굴.”
“와아!”
신유성은 다케치요가 즐거웠던 시간에 함께 했던 얼굴들을 그렸다. 다케치요는 그림들을 보고 기뻐했다. 특히 신유성이 그린 자화상을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자신 있게 지었던 웃음은 점점 흐려졌다.
“다케치요. 내가 없어도 씩씩해야 한다.”
“네.”
작별의 시간이 되자 웃음은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자, 이걸 가져.”
신유성은 허리에 차고 있던 소도를 내밀었다.
소도를 받아든 다케치요는 손에 힘을 주었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어. 알았지?”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준 신유성은 등을 돌렸다.
다케치요의 손에 들린 소도 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대마도로 돌아가실 겁니까?”
떠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어디로 갈지만 정하면 끝이었다.
“아직 우릴 습격한 놈들이 안 왔잖아.”
“이젠 아예 안 오는 거 아닙니까?”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신유성은 절대 잊지 않았다.
“방심하는 순간을 치고 들어올지도 몰라.”
“그거야 그렇지만.”
신페이는 말을 흐렸다. 허나, 반박하지 않았다. 신유성이 굳이 대마도로 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어딜 가든 할 일을 하시는 분이니.’
처음 오카자키에 갔을 때에 지금을 비교해보면 천지 차이였다. 대마도주의 사위로 돈이나 얻어 쓰는 꼬마에서 거부가 되었다.
딸린 식구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조선에서 온 노비와 여자들을 합하면 무려 100명이었다. 여기에 아이들은 300명이었다.
작은 마을을 만들어도 될 숫자였다.
아이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흠이긴 했지만 어딜 가든 정착할 정도는 됐다. 여기에 아직 다 쓰지 않고 모아둔 재물도 상당했다.
‘그림 한 장에 그렇게 많이 벌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신유성이 그림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신페이와 호위들은 경외심을 품었다.
대충 그린 그림도 아니고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작품.
“우린 북쪽으로 간다.”
신유성은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다테 가문이 다스리는 무쓰였다.
무쓰에 도착하자 다테 가문에서도 신유성을 환대했다. 신유성은 준비된 종이에 끝없이 펼쳐진 논과 마을을 그려주었다.
이름은 풍요.
다테 가문의 풍요가 영원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렸다고 하자 당주는 크게 기뻐했다. 그림의 크기는 30척. 요시모토에게 그려준 것과 같았다.
받게 된 대가도 같았다.
배 열 척. 여자 50명. 아이 100명. 그리고 양식.
신유성은 영주성 근처의 땅에 집을 짓고는 데리고 온 사람들이 살 작은 마을을 만들었다. 다테 가문에서는 이를 막지 않았다. 신유성이 딱히 군대를 키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마도와 관계가 있어 주기적으로 재물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영지에 막대한 세금을 낼 존재였다.
신유성은 세금을 착실히 내며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북쪽의 바다 건너에 있는 북해도에 관심이 지대했다.
‘여길 먹으면 여진과 오가는 게 수월해진다.’
대충 지도를 그려 본 신유성은 여진과 접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었다.
‘북해도를 장악하려면 군대가 필요해.’
하지만 군대는 쉽게 모으기 어려웠다. 아무리 다테 가문의 당주가 신유성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고 해도 군대를 모은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 군대를 가진 자는 적 아니면 아군이었다. 그리고 아군이라도 약하면 잡아먹었다.
‘가키자키!’
신유성은 북해도의 남쪽에 자리 잡은 가문을 떠올리며 장고에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