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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29화 (2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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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

푸른 바다. 수평선.

휴식을 취한지 이틀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즐거웠던 낚시도 서서히 질려갔다.

의식은 다시 세계로 향한다.

‘바다.......’

여진. 아메리카. 유럽. 앞으로 가보고 싶은 땅들이 있었다. 별로 대단할 것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괴로울 뿐이었다.

특히 미래의 즐거웠던 기억은 독과 같았다. 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잊는다면 앞으로 자신의 장점을 포기하는 것.

신유성은 괴로워하면서도 다음을 생각했다.

‘다시 목숨을 내던질 시간.’

오랫동안 압박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신경쇠약에 걸리기 딱 좋지만 풀어지고 나니 다시 그리워졌다.

압박 속에서는 미래의 즐거운 추억 따윈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으니까.

다시 팽팽하게 긴장을 당길 때가 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영지를 더 이상 개발하는 것은 독이 될 수도 있다.’

현재의 일본 수준을 까마득히 벗어난 상태로 개발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땅에 묶이게 된다.

중요한 거점을 타인의 손에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불안했다.

‘지금 쳐들어오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오겠지.’

아직은 어린 몸이었다. 그래서 한 번쯤 조선으로 가서 뜻을 펼쳐보고 싶기도 했다. 일본에서 하나씩 집어 삼키는 것은 너무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하나씩 처리하는 건 시간이 걸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을 그릴 때 한 구석만 자세히 그리다가는 전체적인 구도에서 엇나갈 수 있었다. 비율이 안 맞으면 망한 그림이 된다.

‘정복도 그림 같이.’

노부나가가 일본 전체를 보고 있다면 신유성은 세계 전체를 바라보았다.

‘아메리카를 빨리 먹기 위해선 여진족이 필요하다. 그리고 명의 힘을 얻어야 동남아시아를 수월하게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땅을 따먹을 수 있을지 계산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떠올랐다.

‘항해 기술이 먼저다.’

더 빨리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바다를 먹어야만 했다.

“아이누와 얘기하고 싶다.”

낚시를 끝낸 다음 날, 신유성은 아이누를 찾았다. 그러자 예전에 만난 적 있는 빛나는화살이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북쪽으로 배를 타고 올라가면서 다른 부족과도 인사하고 싶다.”

“인사?”

“모피가 조금 많이 필요하다.”

모피가 필요하다는 말에 빛나는화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라면 많이 있다.”

“최대한 많이 구하고 싶다. 이 배를 가득 채울 정도로.”

신유성은 선착장의 배를 가리켰다. 거대한 상선을 본 빛나는화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누도 배가 있었지만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 빛나는화살의 눈에는 마치 고래처럼 큰 배로 보였다.

“소개해주겠다.”

거대한 상선을 채울 물량은 빛나는화살의 부족에도 없었다.

“최대한 값을 후하게 쳐주도록.”

“그러지 않아도 싸게 구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일이다.”

“미래를?”

신유성은 거래를 위해 신페이를 보내며 당부했다.

“나 이외에 어중간한 녀석들이 거래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매점매석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아메리카로 넘어갔던 유럽인들 중 상당수가 모피 장사로 돈을 벌었지.’

헐값에 모피를 사서 유럽에서 엄청나게 비싸게 팔았다. 다만 신유성은 어떤 종류의 모피가 잘 팔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종류별로 다양하게 골라 유럽에서 온 남만 상인과 거래를 트려고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되기만 한다면 남만 상인들이 파는 물품을 상당히 독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독점이 오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돈 되는 거래를 상인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그리고 하나 둘 북해도에 관심을 갖게 되면 위험해진다. 혹은 몰래 아이누와 거래를 트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면?

“모피를 사면 일정 금액을 물건으로 환산해 족장들에게도 줘라. 꼭 대량으로 거래를 터서 한꺼번에 안겨야 한다. 자잘한 거래는 하지 말고.”

영주만이 할 수 있는 규모의 거래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본이 약한 상인들은 끼어들지도 못한다.

조금 가격을 더 쳐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신유성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닌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들.

‘모피를 주고 화약을 산다.’

신페이에게는 아직 전부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천천히 거래를 하면서 익히면 될 문제였다.

“앞으로 네가 날 대신해 영지를 관리해야 할 때가 온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하도록.”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뭐가?”

“제가 영지를 가져버리면 어쩌실 겁니까?”

신페이는 신유성의 행동이 살짝 이해되지 않았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라.”

“네?”

“갖고 싶다면 북해도를 주겠다. 넌 내 첫 번째 가신이니까.”

순간 신페이는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더 높은 곳을 바라보시는 건가?’

신페이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경외심은 충성심과 뒤섞여 더욱 단단해졌다.

“내가 부재일 땐 네가 관리해야 한다. 그러니 앞으로 영주 대리로서의 자각을 하도록.”

다음 날, 신유성은 가신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그 순간, 후지바야시 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웃었다.

‘통이 크시군.’

신유성의 작은 몸에 얼마나 큰 뜻이 들어있는지 켄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다음 날, 신페이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떠났다. 북해도의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며 아이누 부족들을 만나 대량의 모피를 사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빛나는화살이 말해준 생필품들을 가득 싣고 갔다.

“켄. 불만인가?”

“아닙니다.”

“뭔가 잔뜩 말하고 싶은 표정인데?”

“저에게도 뭔가 시켜주실 겁니까?”

“영지를 갖고 싶은 건가?”

켄은 고개를 저었다.

“주군께서 이룩하실 큰 나라가 보고 싶을 뿐입니다.”

“왜지?”

“영지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에서 천하가 보였으니까요.”

뜨거운 눈길에 신유성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인지. 그래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언젠가 죽는다면, 무엇인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주군이 이루고자 하시는 나라를 보고 죽고 싶습니다.”

철이 지나면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람의 숨결도 영원히 이어지진 않는다.

“인생은 한 번. 그렇다면 더 큰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죽는 것도 멋진 일 아니겠습니까?”

“멋지군.”

“제가 좀 멋지죠.”

“알았다. 그럼 일을 주겠다.”

후지바야시 켄의 마음을 어느 정도 듣게 된 신유성은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날 속이는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언젠가 드러나겠지. 하지만 작은 것을 탐할 놈은 아니다.’

경계를 풀진 않았다. 하지만 경계하느라 가까이 하지 못하면 결국 거리가 벌어질 뿐.

“명하십시오.”

“가서 아이누말을 잘하는 영지민을 모아라. 그들에게 시킬 일이 있다.”

대단할 것 없는 일로 보였지만 켄은 실망하지 않고 움직였다.

아이누와 교류하던 영지민들은 한 가지 일을 받게 되었다. 글을 배워서 아이누어 단어들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가신들에게 아이누 말을 배우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가신이 있다면 유용하겠지.”

“그럼?”

“아이누인들이 우리가 쓰는 말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누인들을 빠르게 가르치려면 아이누말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할 교재도 만들어야 했다. 신유성은 만들어진 자료를 역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부하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라. 너도 배워두는 편이 좋겠지.”

“설마 조선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조선 말고도 다른 나라 말도 많다. 명나라 말도 있고 남만 말도 있다. 다 배워두면 계속 나와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말을 지금 쓰는 것밖에 못한다면 이 땅에 남게 될 것이다.”

‘설마? 다른 나라로?’

켄의 가슴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

진짜 신유성이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두근거림은 멈추질 않았다.

“아, 그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는 게 힘들다면 그 나라 여자와 정을 나누어라. 단순히 몸만 갖지 말고 애정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라. 그러면 더 빨리 늘 거다.”

신유성의 말에 켄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소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히 거부감이 드는 방법도 아니었다. 남자니까 여자와 가까이 하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조선에서 사람을 더 들여와야겠군.’

신유성은 부친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좀 더 많은 노비와 역관들이 쓰는 교재를 달라고.

재물은 모자라지 않아서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북쪽으로 갔던 신페이는 배에 모피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북해도 해안을 따라 한 바퀴 순회하며 모아온 가죽들이 상당했다.

여우, 곰, 늑대, 해달까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물개의 가죽과 해구신까지 있었다.

“이건 왜?”

“후사를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끙.”

상당한 양의 해구신이었다. 지나가다가 보여서 좀 잡았다는 것이었다.

“이 몸은 아직 어리다.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거야 노력하셔야죠.”

신페이를 비롯한 가신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아직은 아니다. 때가 되면 여인을 취할 것이다.”

결국 가신들이 양보했다. 신유성의 나이를 생각하면 여자는 아직 이르긴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조선에 가져다가 팔면 비싸게 팔리겠군. 대마도주가 좋아하겠어.’

정력제로 유명한 해구신. 판다면 가격을 꽤 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번에 가져온 것은 좋지만 앞으로는 불필요한 사냥을 금한다.”

“네?”

“돈 된다고 마구 잡다가는 나중에 잡을 것이 없어진다는 소리다. 아이누가 잡는 것만 사라.”

‘나중에 멸종 위기에 처하거나 숫자가 모자라게 되면 안 되지.’

무분별한 포획은 큰 문제를 낳게 된다. 종이 아예 멸종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떤 동물은 멸종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신페이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북해도에 오시더니 아이누 방식을 따르시는 건가?’

아이누 족장들과 만나면서 자연히 그들의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이누는 단지 모피를 얻기 위해 억지로 사냥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아 둔 모피가 있으면 팔고 없으면 다른 곳에 가보라고 했다.

물개를 잡을 때도 고기를 먹지 않으려 하자 빛나는화살이 그러면 벌 받는다고 고기를 가져다 먹을 정도였다.

신유성이 딱히 아이누의 생활 방식에 감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페이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을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이누의 영역은 생각보다 넓었다.

‘가까이 지낸다면 분명 큰 힘이 될 수 있다.’

더구나 돌아왔을 때 신유성이 아이누와 의사소통을 할 계획으로 말을 가르칠 책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조그만 영지가 아닌 북해도 전체를 아우르기만 해도.’

신페이는 신유성의 생각을 받아들여 아이누와도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북해도는 절대 작은 섬이 아니었다.

“직접 가신다고요?”

“그래, 내가 가보겠다. 나 없는 동안 영지를 부탁한다.”

가죽이 모두 준비되자 신유성은 직접 상행에 나서겠다고 가신들에게 알렸다. 가신들은 이미 신페이가 영주 대리로 관리하게 될 것을 알았기에 크게 반대할 순 없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다시 나왔다.

신유성의 상행은 극비였기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신유성은 선실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젠장.’

선신 알에만 있으려니 답답했다.

지루함은 신유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

“내기라도 하지?”

“무슨 내기를 말씀이십니까?”

“주사위.”

나무토막을 잘라 순식간에 주사위 두 개를 만들었다.

“자, 걸도록.”

신유성은 호위로 따라온 닌자들을 도박판으로 끌어들였다.

“홀!”

“짝!”

도박의 열기가 서서히 닌자들에게 퍼졌다. 덕분에 신유성은 조금 덜 심심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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