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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 상인
가죽을 가득 실은 상선이 먼저 향한 곳은 대마도였다.
“많이 컸군.”
원래는 들리지 않으려 했으나 들리게 되었다.
“하루야스님 덕분입니다.”
“쇼군을 만나러 가더니 홀로 영주가 되다니. 하하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어.”
하루야스의 입장에서 볼 때, 신유성은 무시무시하게 성장했다.
조금 도와주기는 했지만 빚은 예전에 갚고도 남았다. 신유성이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배를 조선과의 교역에 동원해서 번 돈이 훨씬 많았다.
이제는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오다니. 무슨 일 있는 건가?”
“아주 돌아온 것은 아니고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네, 지금 들어온 배에 모피가 가득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래, 그걸 조선에 팔 생각인가?”
“아닙니다. 남만인들에게 팔 생각입니다.”
“남만 상인에게?”
하루야스는 살짝 망설였다. 현재 남만 상인들이 주로 찾는 항구는 나가사키였다. 그리고 나가사키는 쇼니 가문이 다스리는 땅이었다.
하루야스도 쇼니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거래를 하게 되면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조선에서 들어온 것으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서?”
“아니면 배를 타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여진과 운 좋게 거래를 했다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숨기려는 것인가?”
“별 볼 일 없는 영지라면 가만히 두고 보겠지만 돈 되는 것이 나오는 땅이라면 다테 가문에서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테니까요.”
시험 삼아 물어본 질문에 신유성은 훌륭하게 답했다.
‘영주로 손색이 없군.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과연 대마도에 만족할까?’
문득 신유성을 얻겠다며 노력하던 요시시게가 떠올랐다.
‘아들아. 너무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한다.’
몇 마디 나눈 말에서 하루야스는 신유성이 다른 사람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쩌면 가문이 이 좁은 섬을 벗어날 계기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대마도는 그리 살기 좋은 섬은 아니었다. 농지가 부족해 교역을 하지 않으면 매우 곤란했다. 조선과의 교역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것. 왜관이 문 닫으면 가문은 그야말로 지배력을 상실할 정도로 위태로워진다.
그러니 해적질을 해서라도 물건을 가져다 팔아야 했다. 그래야 대마도는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의 행보에 희망이 보였다.
가문이 대마도를 벗어나 더 큰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와줄 순 있지만 주군을 속이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우리 가문은 뭘 얻을 수 있는 거지?”
대마도는 명목상 쇼니 가문의 휘하에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주군으로 불렀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죠.”
“가문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명운에 걸맞는 것을 얻어야겠군요.”
하루야스는 답하지 않았다. 신유성이 무엇을 내밀지 궁금해졌다.
“큐슈는 어떻습니까?”
“뭐?”
“제가 계획한 일이 잘 풀린다면 큐슈를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당장 드리진 못하고 시간이 좀 오래 걸리지만요.”
허황된 얘기 같았다. 하지만 신유성은 젊었다. 하루야스의 입장에선 새파랗게 젊은 꼬맹이였다. 그런 꼬맹이가 자신의 힘으로 작지만 영지 하나를 삼키고 영주가 됐다.
믿기는 힘들었지만 믿지 않으려니 마음이 걸렸다.
“정말 줄 수 있겠나?”
“물론 조건도 있죠. 제가 준 것이니 제 명을 따른다는 조건은 꼭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아직 차지하지도 못한 것을 가지고 주느니 마느니 황당한 소리였다.
허나, 하루야스는 믿고 싶었다.
‘일이 잘못되면 나츠를 버리면 된다.’
비정한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문을 지킬 수 없었다.
잘못 되었을 때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한 하루야스는 미소 지었다.
“좋다. 받아들이마.”
정말 된다면 좋은 일이고 안 된다면 시도해 본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주인님!”
하루야스와의 만남을 끝내고 방에 들어서자 매화가 달려왔다.
와락.
품에 안긴 매화는 펑펑 울었다.
“엉엉. 왜 이제 오셨어요?”
매화는 많이 컸다. 그래봐야 꼬마였지만.
“바빴다.”
“저도 데려가실 거죠?”
“아직은 안 된다.”
“또 여기 있어야 하나요?”
“이번에 데려갈 테니까 걱정 마라.”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매화는 순순히 물러났다. 매화와 인사가 끝나자 또 다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츠가 나타났다.
“서방님!”
와락.
품에 안기자 눈물을 흘리는 나츠.
“엉엉. 왜 이제 오셨어요?”
“하하하! 미안.”
매화와 똑같은 행동과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나츠는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화를 내며 투정을 부리진 않았다.
“미안. 정말 미안. 그래도 이번에 북해도에 갈 땐 데리고 갈 테니까.”
“정말이신가요?”
“그래.”
얼굴에 꽃이 만발했다. 이제는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쁜 것이었다.
“일단 나가사키에 볼 일이 있으니. 다녀와서 같이 가는 것으로 하지. 그 동안 짐을 챙겨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잠이 들 때까지 이어졌다.
“그 놈이 돌아왔어?”
마사모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신유성이 나타난 이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요시시게는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신유성이 빌려준 배 덕분에 이윤을 더 많이 남긴 덕분이었다.
덕분에 마사모리는 뒤로 쳐졌다.
당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마사모리에겐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놈은 뭘 하고 있지?”
“당주님과 얘기를 끝낸 뒤 나츠님과 함께 있습니다.”
“으음.”
당장 찾아가서 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래도 계속 참은 것은 바로 감시의 눈길 때문이었다. 하루야스가 자신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마사모리를 따르는 가신들도 허튼 짓은 하지 못했다.
뭔가 일을 벌이다가 꼬리를 잡힐까 두려워 못 움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얘길 들었습니다.”
“말해라.”
“끌고 온 배에서 물건을 전혀 내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뭐? 아무 것도 안 가져왔나?”
빈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은 굉장한 낭비였다. 물건을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는 것만으로도 배 운용비를 뺄 수 있었다.
“알아봤는데 안에 모피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모피가?”
순간 마사모리의 혈압이 치솟았다.
‘이 놈이 또 뭔 짓을 하려고?’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영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정말 넋이 나갔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모피를 잔뜩 가져온 것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분명 어디다 가져다 팔려고 하겠지?”
“그렇습니다.”
“일단 빼앗을 방도를 생각해봐.”
더 이상 신유성이 잘 되는 꼴을 보기 힘들었다. 신유성이 잘 되면 잘 될수록 경쟁자인 요시시게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저도 데려가주십시오.”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오르는데 차돌이 뒤따라 왔다.
못 본 사이에 차돌은 상당히 변했다. 이제는 일본어를 수준급으로 하고 있었다.
“공부 많이 했구나?”
“말을 못해서 주인님을 못 따라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하. 그래 같이 가자.”
일본어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검술을 비롯해 무사가 배우는 모든 기술에 닌자들의 수법도 조금 배웠다.
‘됐다.’
허락이 떨어지자 차돌은 안도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자신이 신유성의 노비라는 사실은 한시도 잊지 않았었다.
대마도에서의 생활은 편했지만 신유성이 없으니 외로웠던 것이었다.
얼마 뒤, 배는 대마도를 떠나 나가사키로 향했다. 순풍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이젠 무사가 다 된 모양이구나.”
“많이 배웠으니까요.”
“그럼 무사가 되겠느냐?”
“시키시면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선에 돌아가면 무사라고 할 순 없었다. 노비 문서를 태우면 양인이 될 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함께 다니자.”
신페이를 북해도에 남겨두어 곁이 허전했던 신유성은 미소 지었다.
배는 빠르게 나아갔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가기 위해 히라도를 끼고 돌 때였다.
갑자기 배 세 척이 나타나 맹렬한 속도로 접근해 왔다.
절대 스쳐 지나가는 배로 볼 수 없었다. 그랬다면 계속 신유성의 배를 향해 다가올 이유가 없었다.
“적이다!”
“속력을 더 올려!”
“따라잡힙니다!”
원래라면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배에 모피를 가득 실은 탓에 속도가 느려졌다.
‘모피를 버릴 순 없지.’
“전투 준비!”
전투의 냄새가 나자 신유성은 일단 선실로 들어갔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신유성을 신경 써주느라 제대로 못 싸우면 손해니까.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그러자 신유성의 배에 탄 선원들은 전원 무기를 들었다.
“주군의 배를 지키자!”
선원들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배가 붙었다.
“쳐라!”
적이 넘어오는 순간, 선원들의 검이 번뜩였다.
‘예사 솜씨가 아니다!’
선원들의 검술은 모두 수준급이었다.
갑판 위에 피보라가 일었다. 차돌도 질세라 뛰어들어 넘어오는 해적들을 베었다.
“죽어라!”
“아아아아아악!”
비명과 저주가 뒤섞인 선상. 검에 베여 너덜거리는 피부 사이로 흐른 피가 갑판을 붉게 물들였다.
넘쳐흐르는 피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자들도 생겼다. 그래도 전투는 이어졌다.
‘젠장!’
전투는 선원들이 아직은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선원들의 진짜 신분은 바로 닌자들이었다. 신유성이 배에 타고 간다니 후지바야시가 닌자들로 교체한 것이었다.
반면, 덤비는 해적들은 고용된 자들이었다.
낭인 생활을 하다 해적으로 변한 이들이었다. 명을 오가며 해적질을 해서 돈을 버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선상에서의 칼질이 뛰어나긴 했지만 닌자들은 표창도 사용했다.
“큭! 닌자들이 왜?”
선원으로 낭인들이 일하는 경우는 있었다. 선원으로 일하다가 해적질에 뛰어드는 것으로 한 몫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닌자들이 대규모로 탄 배는 처음이었다.
“그냥 밀어붙여!”
벌써 많이 죽었다. 물러난다고 곱게 돌려보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한편, 선실에서 가만히 살피던 신유성은 닌자들이 점점 불리해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투척 무기가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체력도.’
이대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몰살이었다. 목숨을 건 상태에서 쉬지 않고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은 엄청난 체력 소모를 동반하기에 빨리 지칠 수밖에 없었다. 고수들은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여 더 오래 버티지만 그렇다고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숨어서 잡히지 않겠다.’
신유성은 검을 뽑았다.
‘죽더라도 싸우다 죽자!’
다리가 살짝 떨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투는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다.
신유성은 이를 악물고 선실의 문을 열었다.
전투를 벌이는 이들은 아무도 갑판으로 나온 신유성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우선 한 놈!’
신유성은 잽싸게 근처에 있는 해적의 뒤로 다가가 목을 베었다.
반쯤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졌다. 신유성은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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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