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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 상인
전투는 참혹했다. 급소를 베이지 않는 이상 사람은 금방 죽지 않는다. 흐르는 피는 얼마나 살의가 진한지 알려주었다.
신유성은 살의 속으로 몸을 던졌다.
쉬지 않고 움직였다.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은 예전에도 해 본 일. 사람을 베는 것도 좀 더 익숙해졌다.
검을 피해 몸을 날리다 적이 보이면 벴다. 종아리를 잘린 해적은 쓰러졌다. 그러면 근처의 닌자가 처리했다.
신유성이 싸우기 시작했지만 이를 눈치 챈 닌자는 없었다. 처음부터 전투에 끼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주치는 일이 많아지자 닌자들은 다급해졌다.
“주군!”
누군가 외쳤지만 신유성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싸웠다.
이에 닌자들은 이를 악물고 더 빠르게 움직였다.
신유성이 죽으면 함께 배에 탄 닌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척살조가 한 번 뜨면 어디를 가든 죽일 때까지 쫓아온다.
조급함 때문에 다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해적들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상황이 안 좋아지는 속에서 신유성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보인다.’
흥분이 극에 달하자 모든 사물이 느리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산책을 하는 것처럼 신유성은 해적들 사이를 거닐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을 보고 자세와 속도에서 의도를 읽어내며 피하고 벴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며 가장 최단 거리에 있을 적의 급소만 정확하게 찔렀다.
“큭!”
해적들은 신유성을 잡으려고 모여들었다. 감히 자신들 사이로 파고든 꼬마에게 죽음을 내리기 위해서.
하지만 신유성을 잡을 순 없었다.
순식간에 이뤄진 계산에 의해 최적의 경로로 움직이며 모두 베어 넘겼다. 그리고 닌자들이 하나 둘 신유성의 뒤를 따르며 자세가 흐트러진 해적들을 벴다.
“주군!”
신유성이 멈춘 것은 모든 해적들이 쓰러진 뒤였다.
“후우.......”
갑작스러운 두통과 짠 바다내음이 머리를 쿡쿡 찔렀다.
“잠깐만.”
신유성은 주저앉고 말았다. 비교적 멀쩡한 닌자들이 주변을 지켰다.
차돌은 숨을 고르며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신유성의 전투를 보고 뒤를 따르면서 보게 된 신유성은 무시무시했다.
깔끔하고 정교한 움직임에 낭비는 없었다. 무모해보이기까지 한 돌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치지 않았다.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
안 본 사이에 신유성의 실력은 차돌을 까마득히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질투나 그런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대단하시다.’
조선에서부터 함께 했기에 신유성이 얼마나 뛰어난 신동인지는 알고 있었다. 학문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검술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 어린 몸으로도 적들 사이를 누볐으니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그야말로 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경외심에 차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비로서 가졌던 마음에 계속해서 더해지는 경외심은 신유성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로 보이게 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자리에 앉은 신유성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얼른 물수건을 만들어 신유성에게 다가가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쓰러진 해적들은 과다출혈로 죽어갔다. 닌자들은 그런 해적들의 숨통을 끊고는 옷과 소지품을 전부 벗겨낸 뒤 바다에 던졌다.
“어디 놈들인지 알아내야 한다.”
“주군을 노린 놈들이다.”
시키지 않아도 닌자들은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해적들의 배에도 단서는 없었다.
“분명 이 부근에서 활동하는 놈들이다. 철저하게 찾아내도록. 그리고 배에 대해 알아보려는 놈들이 있으면 무조건 잡는다.”
해전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이었다. 배는 무척 중요한 수단. 쾌속선이 3척이나 생겼으니 신유성은 더욱 강한 전력을 갖추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리가 끝나고 얼마 뒤, 신유성은 나가사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나가사키는 현재 쇼니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남만인으로 알려진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이윤을 챙기고 있었다. 명나라와의 교역은 오우치 가문이 꽉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살짝 달랐다.
쇼니 가문은 남만 상인들을 통해 명나라 물품도 사들였다. 명나라에서 상품을 판 남만 상인들은 새로운 교역 도시인 나가사키에 명나라 물건을 가져다 팔기도 했다. 그러면 더 많은 양의 은을 얻을 수 있었고 이 은을 가지고 명에 가면 더 많은 상품을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오가면서 은으로 명나라 상품을 배에 꽉 채울 정도로 모으면 인도 지역에 이미 개척한 항구에 가서 본국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기도 했다.
물론 큰 이윤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은 본국으로 가기도 했지만 길이 너무 멀기에 중간에 여러 번 오가며 파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가사키 덕분에 쇼니 가문 또한 부를 축적해 오우치 가문과 다른 큐슈의 영주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이에 큐슈의 영주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1549년 일본에 들어온 프란시스코 자비엘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상인들과의 거래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종교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영주의 자리는 실력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이니까.
어쨌거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통틀어 부르는 남만인. 이들과의 교류로 나가사키는 점점 번화했고 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배들.’
남만 상인들이 탄 배는 확실히 일본의 것과는 달랐다.
신유성은 배를 만드는 기술을 원했다.
‘배 만드는 장인을 내줄 것 같지는 않지만.’
시도는 해보아야 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습격한 놈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상인이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쇼니 가문의 가신과 이어진 상인이었다.
‘설마 이런 짓을.’
뭔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쇼니 가문에서 대마도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것인가 의심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날 습격하는데 연관이 있다는 건데.’
따질 수가 없었다.
진상을 밝히면 증거를 대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명확하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마도주가 직접 쇼니 가문에 반기를 들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힘으로 대영주를 찍어 누르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영주가 잘못해도 결국 참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쇼니 가문 쪽에서도 계속 대놓고 적대하긴 어려웠다. 별다른 명분도 없이 휘하 가신의 가족을 계속 핍박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가신들의 마음이 떠날 수 있었다. 이리되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들이 배신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혈연으로 이어졌어도 배신할 가능성이 컸다. 영주의 판단이 흐려져서 미래가 어두우니 영지를 위해 친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으니까.
‘그래, 지금은 웃어라.’
신유성은 이를 갈았다.
‘언젠가 다 갈아 마셔주마.’
원한을 품은 신유성은 서둘러 남만 상인과의 만날 약속을 잡았다.
만날 약속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쇼니 가문의 영주는 허락했다. 교역을 하고 일정 수익을 가문에 바치니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특히 마사모리를 이용해 한 몫 잡으려던 가신들은 찔리는 것이 있어 강력하게 나가질 못했다.
만남의 자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약속 자리에 포르투갈 상인, 호세 마르티네즈가 나타났다.
‘또 날 생선을 먹이려는 걸까? 먹고 싶지 않은데.’
호세는 시시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옆에는 명나라에서 구한 통역이 있었다. 명나라 사람을 선원으로 고용해 말을 가르쳐 통역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통역이 안 왔네. 뭐야?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원래 거래할 때는 포르투갈 말을 명나라 말로 통역할 수 있는 선원과 명나라 말을 일본어로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약속 자리에는 꼬마와 꼬마를 호위하는 무사들만 보였다.
호세는 눈앞의 꼬마, 신유성이 거래의 대상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어디 사람이지?”
“응?”
갑작스러운 스페인어. 뭔가 발음도 많이 다른 것 같고 이상한 부분이 좀 있었으나 포르투갈 상인인 호세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붙어 있기에 에스파냐어도 자주 접해 잘 알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에스파냐어를 어디서 배웠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하하하! 대단하군 그래.”
자세한 사정을 알 순 없었지만 신유성은 무척이나 어려 보였다. 이성을 알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대충 자신의 어머니나 동경하는 여자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해버린 것이었다.
“이 먼 곳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니. 정말 신의 은총이라도 받은 기분이군.”
“기분 좋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거래할 상인은 어디있지?”
“네?”
“자네가 통역이니 이제 거래 상대만 오면 끝 아닌가? 얼른 얘기를 끝내고 자네랑 식사라도 하고 싶군.”
‘착각하고 있군.’
“제가 바로 거래 상대입니다. 대마도의 영주님이신 소 하루야스님의 대리로 거래에 나선 신유성입니다.”
“뭣?”
“귀하의 이름이 듣고 싶군요.”
“험, 실례했네. 내 이름은 호세 마르티네즈. 포르투갈의 상인이다.”
“그러셨군요.”
‘놀랍군.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어도 유창하고 상거래의 책임자로 나서다니. 아니야. 영주의 인척이라면 어려도 나설 만하지. 그냥 경험 삼아 나와 본 걸까?’
호세의 감탄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 신유성이 상품을 안으로 들이자 신유성에 대한 감탄은 사라졌다.
“이게 제가 팔고 싶은 것입니다.”
“이, 이것들은?”
“어떻습니까?”
모피였다. 그것도 최고급품. 특히 여우의 모피는 아름다워 넋을 빼놓았다. 여기에 무시무시한 곰의 모피까지 더해졌다.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났나?”
“저는 모릅니다. 창고에 굴러다니는 게 아까워서 팔러 왔을 뿐입니다.”
“뭐? 창고에서 굴러다녔다고?”
순간 호세의 눈이 번뜩였다.
창고에서 굴러다닐 정도라면 가치를 낮게 봤다는 뜻.
‘잘하면 싸게 살 수 있겠는데?’
“얼마 주실 겁니까?”
“돈 보다 원하는 것 없나? 화약이나. 다들 화약을 원하던데.”
남만 상인들이 들락거리면서 일본 해적들과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다에서 털리면 답도 없다.
이 시대의 바다에선 무조건 강자가 법이었다.
그렇기에 일본 해적들은 당연히 남만 상인들에게 엉겼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엉겼다가 총으로 무장한 상인들에게 오히려 배를 털렸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알게 된 총의 위력은 많은 영주들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그래서 여자를 주고서라도 화약을 사는 이들이 많았다.
“화약보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지?”
“당신들이 타고 온 배의 설계도나 아니면 장인이 필요합니다.”
“뭐?”
호세는 약간 망설였다. 배나 총이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월등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알기에 쉽게 넘기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싫으면 에스파냐 상인과 거래하면 됩니다. 아니면 또 다른 상인들이 있겠죠. 어차피 언젠가는 제 손에 들어올 겁니다. 하지만 이 가죽들은 당신 손에 들어가는 일이 없겠죠.”
“내가 알아낸다면?”
“알아낸다고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려웠다.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협조 하지 않아도 거래가 힘든데 영주가 나선다면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해상에서는 강하다고 해도 땅으로 내려가면 그냥 한 명의 인간일 뿐. 화승총이 아무리 대단한 무기라고 해도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답이 없었다.
“그거면 되는 건가?”
“뭐 그것도 있고 명나라의 도공들을 구해다 줘도 좋고요.”
신유성은 기술자를 원했다.
물건은 한 번 사고 팔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기술자는 물건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
“명나라 도공을? 그건 나도 얻고 싶군.”
“그런가요? 아쉽군요. 그럼 나머지는 돈으로 계산해야겠죠.”
“그런데 수량이 얼마나 되지?”
“보여드리죠.”
거래를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상선을 본 호세는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들어가 보시죠.”
선창에는 엄청난 양의 모피가 보관되어 있었다. 습기를 먹지 않게 하기 위해 포장도 단단히 했다.
“언제 이만큼 다시 모을지는 모르겠네요. 사실 겁니까?”
“산다.”
엄청난 양의 모피를 본 호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피가 모두 돈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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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