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 / 0271 ----------------------------------------------
바다의 사냥꾼
정난정은 무서운 여자였다. 윤원형의 첩이지만 첩과 같이 살지 않았다. 오히려 안주인 행세를 했다. 윤원형이 홀딱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니 윤원형처럼 권력을 휘둘러도 막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신유성은 정난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소생은 신유성이라고 합니다.”
“그래, 가져 온 것 좀 보자.”
슥. 상자를 내밀자 정난정의 눈이 빛났다.
“이걸 어디서 난 거지?”
“소생의 부친께오서 왜관에서 일하십니다.”
그제야 정난정의 눈빛이 풀렸다. 납득한다는 뜻이었다.
“그래 부탁할 것이 뭐냐?”
‘화끈하네?’
좀 더 은근히 말하리라 여겼는데 정난정은 그런 게 없었다.
“왜에서 왜구들이 요즘 들고 일어나 나라가 어지럽다 들었습니다. 해서 소생이 사람을 모아 왜구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걸 나한테 가져온 것이냐?”
“함부로 사병을 모으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공을 세워 무관이 되려는 것이냐?”
역관의 자식이라면 벼슬을 하긴 글렀다. 하지만 양반이 되는 길이 아주 막힌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 공을 세우면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당대에는 몰라도 자식은 양반 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러합니다.”
“네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소생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돌아가서 기다리거라.”
정난정은 신유성을 돌려보낸 뒤 마름을 불러 상세한 것을 알아오라 했다. 신유성에 대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신동이라?’
어려서 사서삼경을 달달 외웠던 신동. 그제야 정난정도 기억해냈다. 인종과 한 번 대면했던 신동이라는 것을.
‘남다르긴 하군.’
신유성에 대한 양반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잘나봐야 역관의 자식이란 말이 뒤에 붙어 다녔다.
그것이 정난정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되게 해줘야겠군.’
정난정은 서출이었다. 서출의 아픔은 가슴 깊이 새겨졌다. 돕고 싶은 이유는 이뿐이 아니었다.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은 폐지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윤원형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좋은 이야기가 들어왔다.
‘좋은 기회야.’
정난정에게 신유성의 행동은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잘만하면 서출들도 기를 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출에서 벗어나보자.’
정난정은 서둘러 윤원형을 찾았다.
조정에서는 연일 격한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병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허! 그냥 사병이 아니라 왜구를 토벌하기 위한 의용병이라니까요.”
회의에서 윤원형은 자신의 뜻을 설파했다. 정난정이 알려준 것을 이용하면 많은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은 분명 노리는 게 있을 거야.’
윤원형은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올곧은 선비였다면 절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신유성이 사서삼경을 달달 외운 신동이라고는 하나 속은 선비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어울려주지.’
윤원형은 자신 있었다. 신유성이 무엇을 하든 어차피 조선은 윤원형과 문정왕후가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유성이 공을 세워 뭔가 잘 되면 그 다음에는 직접 나서서 이용해먹으면 되는 거고 실패하면 모두 신유성 탓으로 돌려버리면 그만이었다.
“기특하지 않습니까? 역관의 자식이 나라를 위해 사재를 털어 나서겠다는데.”
“병조 판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한꺼번에 올라오지 않는다면 문제될 일은 아닙니다. 소유할 수 있는 배에 숫자를 정해놓으면 됩니다.”
병조 판서는 윤원형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반대 의견은 결국 힘없이 뒤로 밀렸다.
“그럼 우선 이 일을 가납하는 것으로 하죠.”
어전 회의가 남아있었으나 명종은 아직 어렸기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상황. 일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성에겐 토벌허가증이 나왔다.
토벌허가증은 어명으로 내려왔기에 받아들이는 절차를 거쳐야했다. 신유성은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토벌허가증은 왜구 토벌을 위한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대신 제한이 있었다. 선박의 소유 상한이 5척까지였다. 그 이상은 소유할 수 없었다. 사병도 배에 모두 탈 수 있을 정도로만 고용해야 했다. 아울러 사병들은 모두 관청에 이름을 등록해야만 했다.
여기에 사병들의 군포를 내야만 했다. 사병들은 엄연히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군역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신유성이 혹시라도 엉뚱한 생각을 품을까 제한을 걸어둔 것이었다.
‘이 정도야 뭘.’
신유성은 웃었다.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병에 관해서는 생각이 있었다.
‘굳이 조선 사람을 쓸 필요도 없다.’
신유성은 일본인을 사병으로 부릴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군포를 납부하란 것도 피해갈 수 있었다. 조정에서 내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줄 수 있었지만 주고 싶지 않았다.
받을 것을 받은 신유성은 곧바로 배를 타고 부산포로 떠났다.
경상우수영. 신유성이 배를 타고 향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경상우수사는 눈앞의 신유성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대맹선을 사겠다고?”
“그렇습니다. 얼마면 됩니까?”
‘요 당돌한 놈을 보게?’
경상우수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나, 신유성을 내칠 순 없었다. 신유성의 손에 들린 것은 토벌허가증이었다.
‘확실히 어명이긴 하나.......’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현재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지 않았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어린 명종을 앞에 세우고 권력을 휘두르는 시기였다. 많은 대신들이 권력의 칼날에 잘려나가지 않으려 납작 엎드렸고 명사들은 출사를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윤원형이 획책한 일이라 하니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네가 배를 살 돈이 있느냐?”
“얼마면 됩니까? 가격을 불러주시면 마련하겠습니다.”
“쌀로 가져오너라.”
경상우수사는 엄청난 양의 쌀을 요구했다.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물론 수군영이 최소 5년은 먹고 놀 수 있는 양의 쌀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져오면 배를 내주셔야 합니다.”
“허언은 안 한다.”
정말 신유성이 그만한 양의 쌀을 가져온다면 배를 못 줄 것도 없었다.
“아, 그런데 난 배만 준다고 했다.”
배만 준다는 소린 무기를 모두 뺀다는 의미였다. 신기전과 대포가 빠지면 전력은 크게 약화된다.
“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드릴 말이 있습니다.”
“뭐지?”
“임시로 선박을 토벌대로 편입하고 싶습니다.”
“음?”
“배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릴 순 없으니까요. 제가 선주들을 설득해서 배를 가져오면 일단 토벌대로 등록해주십시오.”
“알았다."
경상우수사는 허락했다.
대맹선은 전투력이 떨어지는 배였다. 하지만 신유성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 정도면.’
전투에 나설 때 대맹선을 쓸 생각이 없었다. 대맹선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맹선이 군선이기는 하나 조운선으로도 사용된다는 점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판옥선을 갖고 싶지만.’
판옥선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직접 나서서 배를 만들자고 할 수도 있었으나 거기까진 하지 않았다. 미구엘을 통해 배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배를 건조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있어도 함께 일하는 일꾼들에게 이를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배를 만들어도 완벽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신유성은 자신이 배를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잘못되었을 때 들어올 질타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벼슬이라도 하고 있으면 모를까 어명으로 내려진 토벌허가증을 가졌다고 설치다가는 질서를 어지럽혔단 이유로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
윤원형이 아무리 뒤를 봐준다고 해도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면 내칠 터였다.
‘어차피 상관없어.’
신유성은 배에 올랐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부산포였다.
왜관에 도착하자 요시시게가 맞이해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었다. 신유성의 곁에 찰싹 붙어있는 나츠를 보니 앞으로 좋은 관계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아버지가 담을 수 없는 녀석이라고 했던가.’
요시시게는 하루야스의 말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신유성의 행보가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러나 억누르기보다는 함께하며 좀 더 자신의 이익을 챙길 생각을 했다.
신유성이 잘 된다면 대마도도 더 크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까지 신유성 때문에 덕을 본 것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토벌을 허가 받았습니다.”
순간 요시시게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조선의 토벌령?’
아찔한 이야기였다. 또 다시 왜관이 문을 닫는다면 대마도의 타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 곳을 문 닫는다고 하는 건가? 그렇게 되면 해적이 더 늘어날 뿐인데.”
왜관이 문을 닫으면 물건을 얻으려 하는 영주들은 더욱 심하게 약탈을 시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대마도는 그런 영주들에게 항구를 내주며 살 길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구의 소굴로 변해버리면 대마도주의 권력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외부인들, 다른 영주들의 배에 탄 이들이 행패를 부려도 어찌 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장차 대마도주가 될 요시시게는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왜관은 그대로 둡니다. 다만 제가 왜구 토벌을 하도록 허가를 받은 것 뿐이죠.”
“그런 건가?”
일단 안도의 한숨. 그 뒤를 잇는 것은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토벌은 어찌 할 건가?”
“왜구 소굴을 토벌할 겁니다.”
“응?”
“제가 예전에 명나라에 갈 때 있던 일입니다만.”
신유성은 태풍을 만나 배가 항구에 묶였던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해적으로 보이는 자들을 죽인 일.
그로 인해 시마즈 가문과 오스미의 영주가 충돌했다. 요시시게는 이야기를 듣고는 웃었다.
“그럼 직접 그들을 잡을 건가?”
“단순히 그들만 잡는 게 아니죠.”
“응?”
“제 최종 목표는 바로 사이카이도를 손에 넣는 겁니다.”
두근.
“사이카이도를!”
사이카이도. 큐슈를 손에 넣겠다는 말에 요시시게의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룰 순 없는 일이죠. 하지만 이를 위해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일단 배와 병력을 지원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배와 병력을?”
“그들을 토벌에 쓸 생각입니다. 이곳 왜관에서 고용할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들을 고용할 땐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괜히 말이 새어나가면 다른 영주들이 안 좋게 볼 테니까요.”
“으음.”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에 성공하면 얻게 될 보상이 달콤했다.
“좋아. 하지.”
어차피 병력을 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탈영병을 비롯해 무사가 되고 싶어 하는 낭인들은 수두룩했다. 해적으로 나서나 토벌대로 나서나 그게 그거인 셈이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성은 대마도주가 소유한 전선 5척과 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
한양.
신유성에게 토벌허가를 내준 윤원형은 뒤를 캐도록 했다. 행보를 캐서 무엇을 노리는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이득을 취한다면 어떤 이득을 어떻게 취할까?’
개인이 직접 토벌에 나서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단순히 왜구의 목을 베기만 해선 이윤이 남질 않았다. 역관의 자식이니 공을 세워 무관이 되겠다는 목표는 표면적으론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윤원형은 납득하지 못했다.
‘분명 뭔가 있어.’
권모술수 속에서 살아남은 윤원형이었다. 윤임과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던 감은 신유성에게 뭔가 있다고 계속 속삭였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올라온 보고는 놀라웠다.
“왜인들을 사병으로 등록했다고 합니다.”
“뭣이?”
신유성의 행동을 보고 받은 윤원형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