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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사냥꾼
“노예로 잡혔던 이들은 어쩌고 있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명나라로 되돌려 보내준다니 순순히 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 있을 때 그들과 조금이라도 더 얘기하면서 명나라 말을 배우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해적들은 물건만 털어오지 않았다. 사람도 잡아왔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잡혀온 것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노예들은 포기한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탈출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삶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순응하거나.
순응하는 이들은 노예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신유성이 되돌려 보내준다고 약속하니 명나라에서 잡혀온 이들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재물은 얼마나 모였지?”
“배분을 하고 남은 은은 500관입니다.”
“많군.”
1관이 3.75킬로그램. 500관은 1875킬로그램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 외에도 다른 것들도 다수 있습니다.”
창고는 물건으로 가득했다. 대마도주 하루야스와 사략함대에 참가한 선원들에게 배당을 하고도 한참 남은 것이었다.
“슬슬 한양에 가봐야겠군. 일단 은 100관만 따로 빼놓고 나머지는 쌀을 사서 경상우수영으로 보낸다. 그리고 남은 은은 필요한 곳에 쓰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난 한양으로 가보겠다. 내가 없는 사이에 함대는 잠깐 쉬도록 한다.”
신유성은 배를 타고 곧바로 강화도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탄 뒤 한양에 들어섰다.
“받으시지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윤원형의 집을 찾았다. 윤원형은 등청해서 돌아오지 않아 정난정을 만나게 되었다.
“이게 뭔가?”
“중요한 겁니다.”
지게를 진 사람들을 시켜 상자들을 방 안으로 들이게 했다. 정난정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은근히 기대가 생겼다.
‘대체 뭘까?’
궁금함은 금방 풀렸다.
상자들이 열리자 안에 빛나는 은이 가득 들어있었다.
“은 100관입니다.”
상당한 양이었다. 정난정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은을 쓰다듬는 손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호호호. 그래. 뭐 불편한 건 없으셨나?”
말투가 대번에 친근하게 변했다.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다만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고생 좀 했죠. 죽어나가는 사람이 좀 있어서.”
“저런!”
혀를 차는 정난정의 얼굴에는 안타까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신유성을 향한 호감은 존재했다.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구한 것인가?”
“명에서 돌아오는 해적들을 잡았더니 배에 실려 있었습니다. 사실 다른 물건들도 있으나 사병들에게 목숨 값하고 합쳐서 삯을 지불하다보니 은만 가져오게 됐습니다.”
“그래?”
신유성은 얻게 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규모만을 축소해서 알려줄 뿐. 허나 정난정도 신유성이 어느 정도 챙긴 게 있을 것이란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별 다른 이유 없이 들춰내는 것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 정난정은 그냥 웃으며 넘어가주었다.
“앞으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그러는가?”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내 상을 준비하라 이르지.”
신유성은 어느새 귀한 손님이 되었다. 엄청난 양의 재물을 정기적으로 안겨주게 될 재신이었다.
‘그래, 왜구를 털어 돈을 번다? 참으로 대담하구나.’
정난정은 신유성이 왜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왜에 있었다더니 이런 방법을 찾았던 거군.’
어찌 되었거나 좋은 일이었다.
정난정에게 있어 명나라가 왜구에 의해 털리든 말든 관심 밖이었다. 명나라가 털렸다고 안타까운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득이었다. 그래서 명나라가 털리고 그걸 중간에 가로챈다는 사실에도 별로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왜구를 소탕해 얻은 것이니까.
식사는 정말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졌다. 혼자서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의 요리가 상 위에 즐비했다. 더구나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 맛이나 볼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시간은 많으니 느긋하게 드시게.”
식사를 하는 동안 정난정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신유성이 먹는 것을 손수 챙겨주기까지 했다.
‘대감에게 한 번 얘기해볼까?’
보면 볼수록 신유성이 탐이 났다. 출신은 좋지 않지만 돈을 벌어오는 능력이 매우 탐이 났다. 더구나 일을 벌이는 것을 보아 주변에 자신을 뒷받침해주는 이들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인들을 사로 잡은 거겠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했다. 그래서 조금 아깝기도 했다.
‘왜인보다는 조선 사람을 정실로 두는 게 더 좋겠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딸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신유성과 비슷한 나이의 딸로 한 명 있었으니 나이만 차면 바로 혼사를 올려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혼사는 정난정이 홀로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참, 그런데 빼놓고 하지 않은 얘기가 있습니다.”
“말하시게.”
“왜구들을 잡고 잡혀있던 명나라 사람들을 구했는데 이들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전할 테니 걱정 마시게.”
식사가 끝나자 신유성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나올 땐 예전과 달리 종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돈의 힘이로구나.’
신유성은 배를 두드리며 청계천의 집으로 향했다.
퇴청하고 돌아온 윤원형은 방에 가득한 상자들을 보고 뭔가 싶었다. 그리고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뭔가?”
“일전에 왜구를 소탕하게다고 한 신동이 주고 간 선물이죠.”
“뭣이?”
은 100관. 조선에서는 화폐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은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에 가져가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귀금속이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정난정은 신유성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왜구를 토벌하고 얻은 재물이라는 것.
“아마 얻은 것은 이것보다 훨씬 많겠죠.”
“으음, 그럼 우리도 해야겠군.”
“제가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정난정은 자신이 재물을 내놓아 왜구 토벌허가를 받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을 신유성에게 건네 더 많은 함대를 부리게 할 생각이었다.
“그냥 우리가 하면 좋지 않은가?”
“그러려면 배에 태울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면천을 미끼로 노비를 태운다고 해도 노비가 죽으면 손해가 막심했다. 더구나 모든 노비가 다 잘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뱃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울 사람들을 직접 구하다보면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왜에 연줄이 있는 모양이지?”
“어린 나이에 넘어갔으니 탐을 낸 자들이 있겠죠. 아마 누군가와 혼약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왜인이라고 봐야 하나?”
“그것도 좋은 목줄이 되겠죠. 하지만 기왕이면 사위로 들이는 게 어떨까요?”
“사위로?”
윤원형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양반으로 만들어줄 순 있지만 그것만으로 뭘 하겠는가? 차라리 다른 집안하고 하는 게 더 낫지.”
정략결혼 대상으로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왜인과 연관이 있는 집안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후손들에게 좋지 않았으니까. 조상 중에 죄를 저지른 자가 있으면 출사의 길이 막히는 조선이었기 때문에 집안을 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정난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신유성이 워낙에 마음에 들어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불찰이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니 단점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임자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가. 그 나이에 그러고 다닐 놈이 조선 천지에 몇이나 되겠어?”
신유성은 아직도 애였다. 그런데 그 애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웬만한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동이긴 신동이야. 아깝긴 해. 하지만 가문을 생각하면 어렵지.”
결국 신유성은 윤씨 집안의 사위가 되는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일은 내일 조정에서 얘기해야겠어. 그 명나라 사람들을 구했다고 했지? 이건 좋은 기회야.”
“명나라에 돌려보내면 뭔가 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당연한 얘기지. 그나저나 오늘따라 참 고와 보이는구만.”
“어머.”
훅. 불이 꺼졌다. ‘아응’하고 신음이 흘렀다.
다음 날, 조정은 시끄러워졌다.
신유성이 왜구를 토벌해 명나라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윤원형은 이야기를 하면서 신유성이 얻었을 재물에 대한 것은 쏙 빼버렸다.
“참으로 장하지 않습니까?”
“크흠.”
몇몇 대신들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극렬하게 반대했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으니 체면이 깎인 것이었다.
윤원형은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계속 얘기를 풀어갔다. 그리고 명나라 사람들을 데리고 있으며 돌려보내주는 일에 대해 상의를 해왔다는 말에 반대하던 대신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건 중요한 일이군요.”
잘만하면 명나라에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나서려 하고 있었다.
“그 전에 공을 세웠으니 상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나라를 위해 한 일입니다. 상을 준다면 그 의기를 어지럽히는 것이 되지 않겠소?”
“허나, 의기를 보고도 지나치는 것 또한 의기를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찬반론이 나왔다. 그러자 반대하는 쪽에서 폭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나이에 대체 무슨 힘으로 왜구를 토벌한단 말입니까? 왜인들을 사병으로 등록하질 않나. 분명 왜인들과 연줄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 인물에게 상이라뇨? 아니 의로운 일인지 의문스럽지 않습니까?”
“허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윤원형은 웃으며 말을 꺼낸 대신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신유성을 비난하던 대신은 슬쩍 입을 다물었다.
“왜인들과 연줄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겠지요. 허나, 그들이 결국 왜구를 처단했지 않소? 그 증거로 명나라 사람들도 구해냈고? 그럼 된 것 아니오?”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속으로 살짝 떨었다. 윤원형이 아주 작정하고 나서는 것은 막기 힘들었다. 만약 여기서 막으려 든다면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난리를 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을 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꼭 하고자 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 것으로 간주하고 괴롭히는 것이 윤원형이었다.
지금은 윤원형에게 찍히면 아주 피곤한 세상이었다. 그러니 화를 낼 것 같자 다들 납작 엎드렸다.
“또한 명나라에 사람을 보낼 때 아무런 관직도 없는 자가 구했다고 한다면 조정에서 한 일이 아니게 되지 않겠소? 이래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소?”
윤원형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럼 어떤 자리를 내주자는 겁니까?”
“오위의 부사용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수군영 소속으로 두지 않고요?”
“그리하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복잡해진다. 수영에는 책임자가 있다. 그런데 토벌허가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의미했다. 즉, 신유성이 경상우수영 소속이 되어도 경상우수사의 명령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경상우수사의 입장에서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위계질서가 무너질 수 있으니까.
반면, 최하위 말단직인 종9품 부사용은 얘기가 달랐다. 부사용은 실무는 보지 않고 녹봉만 받는 체아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신유성이 따로 움직인다고 해도 불편해질 상관은 별로 없었다.
“그럼 부사용으로 합시다.”
결국 신유성에게 관직이 내려졌다. 무과를 치르지 않았지만 공을 높이 사 이에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린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다. 불론 어린 명종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움직인 것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었다.
“대마도가 이상하다.”
쇼니 가문은 주변을 조사하던 중 이상을 알아차렸다. 마사모리와 일부 가신들과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보낸다.”
수상함을 느낀 쇼니 가문에서는 무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무사를 파견한 뒤에도 소식이 없었다.
한참 소식이 없으니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그래도 확인차 다시 한 번 보냈다.
결과는 같았다. 돌아오지 않았다.
“대마도 놈들이 뭔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습니다. 조선으로 갔던 약탈선들이 돌아오지 못한 것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주제를 알게 해줘야지.”
쇼니 가문에서는 대마도를 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소식은 빠르게 대마도와 신유성에게 전해졌다. 이미 쇼니 가문을 주시하고 있던 닌자들 덕분에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매우 빨랐다.
‘결전의 시간이군.’
연락을 받은 신유성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만 기다렸다.”
쇼니 가문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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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