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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45화 (4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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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의 변화

서계와 엄숭. 두 사람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서계의 입장에서 엄숭은 처단해야만 하는 간신이었다. 반면 엄숭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위협하는 장애물이 서계였다.

가정제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싸우는 것을 두고 어느 한 쪽을 편들거나 하진 않았다. 가정제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거드는 것이 충신일 뿐이었다.

‘간신도 쓰기 나름이지.’

엄숭이 나쁘다는 것은 가정제도 알았다. 하지만 내버려두었다. 그러면 자신을 방해하는 신하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서니까.

엄숭은 간신답게 엄청나게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가정제가 싫어하는 대신은 귀신 같이 알아내 탄핵하거나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간신인 엄숭을 가정제는 내치지 않았다. 가정제에게 엄숭은 그야말로 말 잘 듣는 사냥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다 없애진 않았다.

엄숭이 지나치게 날뛰면 안 되기 때문에 적당히 견제할 자들은 남겨두었다. 오직 자신에게 크게 반하는 이들을 처리할 때 엄숭을 이용했다.

가정제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바로 황제가 된 이후 벌어진 대례의 의 때문이었다.

전임 황제의 자식이나 형제가 아니라 사촌동생으로 방계였던 가정제였다. 이 때문에 누구의 뒤를 잇는 황제로 정하는지를 놓고 신하들과 충돌했다.

사촌형인 정덕제나 백부인 홍치제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 생부에 대한 처우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신하들의 의견에 동의하다가 가정제는 자신의 생부를 황제로 추존하려 했다. 이로 인해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국 가정제는 신하들의 뜻을 꺾고 자신의 고집대로 했다. 그리고 이때 당시 반대하던 신하들 190명을 형부에 수감시켜버렸다.

이후 가정제는 권력에 더욱 집착했다. 그렇기에 엄숭과 같은 간신을 이용했다. 간신은 쓰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엄숭은 그렇고 조선의 신동이 큰 일을 했다고?”

엄숭 이후에는 신유성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대충 흘려듣던 가정제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오랑캐가 날뛰는데 괜찮은 방법 같은데?’

토벌 허가를 받은 신동.

자신의 재산을 들여 오랑캐를 무찌른 의인.

포장은 엄청나게 좋았다. 물론 서계가 의심했던 내용도 같이 보고되었으나 가정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소년인가?”

보고를 하던 환관은 세세하게 신유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신들이 신유성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푼 덕분에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을 익히고 왜에 넘어가 왜구를 토벌할 힘을 얻었다고? 대단하군.”

위험한 놈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오우치 요시타카가 죽으며 왜를 조선과 같은 세력으로 만드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배신이 판치는 곳이라 제대로 문치가 뿌리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놈이라면 될지도 모르겠네.’

신유성의 신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조선의 신분 사회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일. 신분이 미천한 신유성이 크게 자라면 사이가 안 좋아질 것이 훤히 보였다.

‘그래, 그 놈이 조선의 힘이 되기 전에 싹을 자르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그냥 죽이는 것은 별로 득이 되지 않았다.

북로남왜라 해서 육지와 바다로 약탈이 끊이질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신유성이 좀 더 버티면서 싸워줄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보고 싶군.”

황제의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신하들이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럼 어디 오늘은 또 누굴 안아볼까?’

가정제는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서둘러 약을 찾았다. 그리고는 아끼는 후궁을 불러 쾌락에 취했다.

약을 하고 쾌락에 취하고 나서야 두통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명나라 황제 가정제의 관심이 신유성에게 향할 무렵, 신유성은 신문 발행에 힘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 찍는다. 그리고 병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다.”

군사나 기술 개발에 대한 것은 우위를 점해야 유리하기 때문에 알릴 생각이 없었으나 의학분야는 달랐다. 널리 알리고 지식을 공유해야만 했다. 그래야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으니까.

가신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반대는 하지 않았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모두 신유성을 좋게 보았다.

‘주군은 성군이시다.’

신문에 실은 내용은 간단했다. 손을 씻을 것, 물은 끓여 마실 것. 더러운 물은 멀리하고 깨끗한 물을 가까이 할 것.

“더러운 것을 가까이하면 몸이 더러워진다. 더러운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

삶이 팍팍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깨끗하게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해둔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또한 쥐나 여러 동물들이 먹은 것을 먹지 마라. 벌레도 조심하라. 몸 안에 나쁜 것이 들어가면 병에 걸릴 수 있다.”

너무 깨끗한 환경도 면역력 향상에 좋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걱정할 시대는 아니었다. 지금은 최대한 병에 걸릴 일을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에는 무리해서 2만장을 찍어서 북해도 전체에 뿌렸다. 일반인들은 한글로 적혀 있으니 알 수 없었으나 하나둘 호기심에 주변에 수소문했고 내용을 알게 되자 감탄했다.

“역시 신유성님 외에는 다른 분은 안 된다.”

다른 영주들은 부려먹을 생각만 하지만 신유성은 그래도 약속을 지키고 챙겨주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호의나 인류애가 아닌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나 영지민들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회란 함께 살아가는 것. 신유성의 행동으로 더 살기 좋은 곳이 될거란 기대감에 영지민들은 신유성을 적극 지지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가신들은 더더욱 신유성을 중심으로 뭉쳤다. 정말 조금 더 지나면 거대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명나라 이상!’

하나둘 신유성과 비슷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더 큰 나라. 그리고 더 큰 나라의 공신이 된 자신의 모습.

상상만 해도 짜릿해지는 일이었다.

더 거대한 것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저 분은 신인이시다!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다.’

명나라의 황제는 천자라고 한다.

하늘의 아들이란 뜻.

하늘의 아들이라면 신이다. 그러니 신을 모시는 자신들 또한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신의 일부가 된다는 의식이 점점 번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닌자들이 올리는 보고는 모두 긍정적. 큐슈의 가문들이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

교역도 약탈도 막히면 영주들의 능력은 의심 받는다. 더 잘 살기 위해 누군가를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더 클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다면?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할 이유가 하나 사라진다. 그리고 계속 이유가 하나둘 사라지다보면 남는 것은 반발 심리 뿐.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없다면 지킬 이유도 없어진다.

조직은 무너진다.

반면, 승리하고 있기에 신유성에 대한 신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갈 뿐이었다.

빛나는화살은 평소처럼 즐기기 위해 여관을 찾았다. 그러다 종이를 읽고 있는 여관 주인을 보고 물었다.

“그건 뭔가?”

“신문이라는 겁니다.”

“신문은 뭔가?”

“이런 저런 소식을 알려주는 거지요.”

“오!”

신기하다고 빛나는화살은 생각했다. 아이누는 대부분 소식이나 지식은 입에서 입으로 구술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주관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왜곡되는 경우도 많았다.

옆 동네에 싸움 좀 하는 녀석이 소문을 타게 되면 어느새 팔이 여섯 개에 엄청나게 큰 덩치에 무시무시한 불을 뿜어내는 괴물 같은 녀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빛나는화살에게 문자는 참으로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나도 좀 알려주면 안 되나?”

“어렵진 않지만 이걸 읽기는 힘들 겁니다.”

“왜?”

“이건 조선어라서 소리는 읽어도 뜻을 모를 테니까요.”

“아, 그런가? 그래도 읽을 순 있는 거지?”

“적는 거라면 가능하죠.”

“그럼 알려줘.”

빛나는화살은 한글을 배워갔다.

신나게 여관에서 놀고 온 빛나는화살은 가족을 모았다. 아내와 아직 독립하지 못한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라와 봐. 내가 재미있는 거 알려줄게.”

“뭔데요?”

“이게 뭔지 알아?”

“뭔데요?”

“한글이래. 요걸 읽는 법을 알려줄게.”

“글? 그걸 읽어서 뭐하는데요?”

“아 거 참. 잘 들어봐. 이건 내가 적어서 남겨두면 내가 없을 때도 다른 사람이 내가 남긴 말을 볼 수 있는 거야. 생각해봐. 내가 옆에 없어도 내가 했던 말을 다시 듣고 싶을 때 이걸 읽으면 다 알 수 있다는 걸.”

“아!”

사람은 죽는다. 죽은 사람은 말을 못한다.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말을 까먹는다면?

잊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지식이라면 발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다.

“내가 사냥하는 법. 내가 본 것들. 하고 싶은 이야기들. 다른 사람에게 다 알려주지 못해도 요것만 읽으면 다 들을 수 있어. 내가 사냥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을 수 있어.”

빛나는화살의 아내는 빛나는화살이 현자처럼 보였다.

“당신!”

“어험.”

와락 안기는 아내와 한바탕 뒹군 빛나는화살은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조선어는 못해도 문자는 사용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쓰면 빛나는화살?”

“그래. 그게 빛나는화살이고 이건 당신. 바람의눈물.”

바람의눈물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소리나는대로 이것저것 써서 남겨보았다.

‘이건 혼자만 알면 소용없어. 다들 같이 알아야지.’

문자란 모두가 알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다음 날, 바람의눈물은 동네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게 있어?”

“그래. 한 번 볼래?”

바람의눈물이 글씨를 써서 읽어주었다.

“이건 나 ‘바람의눈물’. 이건 너 ‘늑대의꼬리.’”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글씨들을 보며 여자들은 재미있어 했다. 아이들도 신기해했다.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낀 여자들은 한글을 익혔다. 그리고 여자들이 한글을 쓰면서 수다를 떨자 노인들이 흥미를 보였다.

“이걸 알면 내가 없을 때도 말을 전할 수 있다고?”

“그럼요.”

“나도 가르쳐줘.”

부족의 노인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새로운 것을 생각해서 말해주는 것은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다. 자신이 아는 것들을 알려주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과 좀 편하게 있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충돌했다.

하지만 한글이란 것을 알게 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한 번만 쓰면 돼.’

아이누들은 아이누식으로 한글을 이용했다. 소리만 이용해 아이누의 지식을 전하는 데 썼다.

노인 하나가 이 일에 뛰어들자 다른 노인들도 참여했다. 나무조각에 한글을 새겨 넣는 일을 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운 아이들이 이를 제대로 읽는지 시험했다.

실험은 성공.

“좋아! 그럼 이제부터 해보자고!”

노인들은 즐거웠다. 사냥을 할 순 없지만 사냥의 지식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알려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같은 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단어를 배울 때 다른 것으로 혼동한 것이었다. 그래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다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기 때문.

하지만 문자로 적어서 뜻을 공유하려니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꽤 골치 아픈 일.

하지만 아이누 노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록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이들이 좀 더 풍족하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한글을 이용하는 이들은 아이누뿐만이 아니었다.

북해도의 일본인들도 한글을 이용해 기록을 시작한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조선어로 된 신문은 읽지 못하지만 한글을 이용하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문자가 있었으나 북해도의 영지민들은 한글을 새로 배웠다. 신유성이 한글을 전파했으니 이에 따른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야. 편하네.”

“그렇죠?”

상인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한글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자로 한글을 택했을 뿐.

신유성은 이러한 보고를 듣고는 조금 실망했다.

‘역시 이런 건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군.’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

한글을 퍼트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조선어를 배우게 하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하지만 신유성은 아직 기대를 접지는 않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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