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신의 유희-54화 (5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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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

시간이 흘러 결국 식을 치르게 되었다. 혼례식은 의외로 조용히 치러졌다. 가정제의 허락 하에 신유성은 황궁에서 첫날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왕에 준하는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신유성을 마주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신유성과 마주한 것은 명나라 조정의 정1품 대신들 정도였다.

나이가 어리기에 신유성은 같은 품계의 대신들에게는 윗사람 대우를 해줘야 했다.

어쨌거나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니 기분이 묘했다.

‘이거 참.’

권력을 살짝 맛 본 것만으로 등골이 짜릿했다. 완전한 자신의 권력이 아닌데도 느껴지는 쾌감에 신유성은 더욱 불타올랐다. 허나, 내면의 불길을 외부로 드러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지금 있는 곳은 명나라 황궁.

사방이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래, 한 번 해보자고.’

신유성은 눈을 빛내며 문을 열었다. 식이 끝나고 방에서 기다리는 신부와 합방을 하기 위한 것.

화려한 실내를 밝히는 은은한 등불.

말은 필요 없었다. 신유성이 신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면사를 들어올렸다.

주녹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것은 어색한 침묵.

“한잔 하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강하게 나가는 신유성. 주녹정의 눈가가 꿈틀했지만 입을 열어 불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합환주를 마시자 주녹정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술기운이 돌자 세상이 도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털썩. 주녹정이 쓰러지자 신유성은 배운 대로 옷을 차례차례 벗겼다. 어찌 되었든 첫날밤이니 밤을 보내야만 했다. 더구나 이제 몸은 성인과 다름없는 상황. 정사를 치르기에 이상이 없는 몸이었다.

신유성은 부드럽게 주녹정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원하지 않던 것이라 해도 이제 너는 내 여자다.”

순간 주녹정은 눈물을 흘렸다.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에 반응하는 것. 동시에 신유성은 움직였다. 주녹정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한 밤.

정략으로 맺어진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침이 되었다. 눈을 뜬 주녹정은 멍하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건.’

알 수 없던 느낌들의 연속. 두렵고 무섭고 아팠다. 동시에 짜릿했고 든든했고 부드러웠다.

하나로 이어져 있던 순간들의 기억이 떠오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옆에는 신유성이 곤하게 자고 있었다.

‘상공.......’

복수를 위해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했으나 마음 한 구석이 살짝 금이 갔다. 잠든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을 뻗어 입술을 만져 보았다.

밤새 자신의 입술과 몸을 탐하던 욕심 많던 입술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음.”

잠에서 깨어난 신유성은 눈을 뜨지 않고 주녹정을 안았다.

“앗!”

신유성은 중얼거렸다. 주녹정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몸을 쓰다듬는 손길은 억셌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있는 느낌.

누군가 이렇게 자신을 꽉 움켜쥐었다는 생각에 주녹정은 마음이 점점 기울어졌다.

‘날 원하는 거야.’

차올랐던 외로움이 터져나갔다. 주녹정은 신유성에게 더욱 파고들었다.

‘난 당신 여자야.’

신유성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주녹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첫날밤이 지나자 주녹정의 분위기는 많이 변했다. 변한 분위기는 온화했기에 신유성은 불만은 없었다. 다만 조금 불안할 뿐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멀리 할 순 없는 사람이었다.

신유성은 주녹정을 슬쩍 껴안았다. 품에 안긴 주녹정은 신유성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상공.”

화를 내거나 말투를 문제 삼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일단 맞춰주려 한다는 것이 느껴져 입맞춤을 했다.

“흡!”

숨이 멎는 소리와 함께 주녹정의 눈이 감겼다. 신유성의 손은 주녹정의 몸 위를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옷을 벗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고 긴 입맞춤 끝에 놓아주자 얼굴이 붉게 변한 주녹정은 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일단 인사를 올리러 가지.”

황궁에서 합방을 했으니 다음 수순은 당연히 가정제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다.

가정제는 바빴다. 단약을 만들고 여인을 안는 중대한 거사를 치르느라 바빴다. 두통 때문에 신유성과 오래 얘기하는 일도 없었다. 대충 인사를 받고는 여자를 찾아 사라졌다.

‘역시 그냥 날 이용하려는 거군.’

좀 더 좋은 시간에 만나자고 할 수도 있었다. 허나 부마라고 해도 그리 나은 대접은 아니었다.

계속 커져가는 위협을 막기 위해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 방해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문안 인사를 마친 신유성은 주녹정을 먼저 보냈다.

“황궁의 서고에 잠시 들렸다 갈 것이니 먼저 준비하시오.”

주녹정을 보낸 신유성은 바로 서고로 향했다.

황궁 서고는 명나라의 모든 지식을 모아놓은 지식의 보고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보물 창고를 보고 싶어 했겠지만 신유성은 지식을 탐했다.

‘지식이 있으면 보물을 얻을 힘을 가질 수 있지.’

동방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라면 현재는 명나라였다. 그러니 신유성은 서고에 들어가 꺼내올 수 있는 것을 꺼내갈 셈이었다.

하지만 황궁 서고는 아무나 들어갈 순 없었다. 수많은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그럼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그러하옵니다.”

특히 신유성은 완전한 명나라 사람이 아니기에 특별한 허락이 있어야 했다.

“보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주시면 황상께 주청하겠나이다.”

아무 거나 볼 순 없다는 소리였다. 잠시 고민을 하던 신유성은 결국 선박과 무기에 대한 것으로 정했다.

‘의술도 중요하지만 역시 선박과 무기가 더 중요해.’

“선박과 무기에 대한 것들을 보고 싶네만.”

“알겠사옵니다.”

신유성이 원한 것들은 허락이 떨어졌다. 정1품 도독으로서 선박과 무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정제를 비롯해 서계나 엄숭도 별 생각은 하지 않고 허락했다.

선박의 기록은 크게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아니었고 무기에 대한 것도 크게 숨길 것은 없었다.

조선도 화포와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신유성은 서고 한쪽에서 계속 환관들이 가져오는 책을 살폈다.

‘뭐야 이게? 선박 건조 기술이 이것 밖에 안 돼?’

무언가 좀 이상했다. 기술이 발전한 명나라의 선박 건조 기술은 많은 것들이 빠져 있었다. 조선에 비해 더 낫다고 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였다.

화약과 대포에 대한 것들은 만족스러웠으나 선박 건조 기술이 부족한 것을 보고 계속 책을 요구했다.

그러자 환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박에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슬쩍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환관 정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환관은 한숨을 내쉬며 정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게 뭐야?’

명나라 역사에 대해 잘 모르던 신유성이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그것은 바로 정화의 함대 이야기였다.

환관이었던 정화는 해양 원정대를 꾸려 먼 곳까지 갔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죠.”

유학자들과 환관 사이에 알력이 엄청났다. 정화를 중심으로 환관들의 힘이 커지자 유학자들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가장 많이 예를 든 것 중 하나가 바로 한나라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환관이 힘을 잡으면 황실을 농락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환관들을 공격했다. 정화가 살아있을 때는 환관들이 버텼지만 정화의 사후에는 급격히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졌다.

그리고 유학자들은 정화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있으니 굳이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화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불태워버렸다. 이후 다시 쇄국 정책으로 돌아갔다.

‘한심하군.’

정치적 이해관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에게는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명나라 유학자들이 정화의 기록만 남겨놓았어도 바다에서 서양인들한테 밀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쇄국정책을 하지 않고 교류를 택했다면 정말 세상만사의 중심이 될 수도 있었겠다고 신유성은 판단했다.

‘그렇다면 난 미국이 아니라 중국으로 유학을 갔겠지?’

한숨을 내쉬는 동안 환관의 이야기는 끝을 맞이했다.

“이제는 그냥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습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군.”

신유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환관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신유성은 책을 더 읽다가 서고를 나섰다.

신유성이 원한 선박 건조에 관한 책들은 필사를 허락 받았다. 다만 대포와 화약에 관련된 책은 반출이 불가능했기에 머릿속에 담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다.

기술적인 것은 얻은 것이 크다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신유성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얻었다.

무엇인가를 배척하는 선택은 결국 고립으로 이어지고 고립된 세계는 도태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누도 그렇지.’

고립된 상황 속에서 추구한 평화.

그것은 달콤하지만 영원할 순 없는 것. 언젠가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다.

평화에 취해 안주하다보면 나태해지는 것이다.

‘상어처럼 쉬지 말고 헤엄쳐야 해.’

서고를 나서는 신유성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황궁을 나선 신유성은 일단 배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자금성을 떠나는 주녹정의 표정에는 후련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차 밖에서 말을 타고 움직이는 신유성을 보았다.

늠름했다.

멋졌다.

‘상공.’

더구나 주녹정에겐 부드럽기까지 했다. 어리다고 했지만 마음을 살살 녹이는 말들을 해주었다. 언행에 거친 면이 있었으나 오히려 주녹정을 더욱 불타게 했다.

황궁 밖으로 나와서 뒤를 슬쩍 본 주녹정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잘 있어라.’

화려한 황궁의 생활보다는 신유성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신유성과 주녹정은 객잔에서 쉬게 되었다. 금의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그 어느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객잔을 통째로 빌린 신유성은 식사를 하며 주녹정과 담소를 나누었다.

“이건 나쁘지 않군.”

“그러네요.”

황궁의 숙수가 만들어주는 것과 객잔의 숙수가 만들어주는 것이 같을 순 없었다. 특히 화려한 요리에 익숙한 주녹정은 더욱 심했다. 그래서 식사를 잘 못하자 신유성은 걱정했다.

“먹기 힘든 건가?”

“아니요. 그냥 피곤해서.”

“흠.......”

생각을 하던 신유성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말씀해주시면 당장 고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객잔 주인은 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었다. 음식에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으면 숙수의 목숨은 물론 객잔 주인까지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주녹정이 혼인을 했다고 해도 황족인 것은 여전했다. 더구나 신유성은 도독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신유성을 경호하는 금의위들이 도독이라고 칭한 것을 들었으니 모를 수 없었다.

알고 보면 실속이 별로 없는 도독이지만 객잔의 주인이 그런 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다.

일반인에게 도독은 군권을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존재일 뿐이었다.

“뭔가 좀 만들려고 한다.”

“말씀해주시면 얼른 만들어 대령하겠습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비켜라.”

신유성이 주방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반면 주녹정은 무슨 일을 벌이는가 싶어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신유성은 과일을 찾았다. 그러자 급히 말린 감이 대령되었다.

‘어쩔 수 없나?’

만들고자 하는 것은 간단한 잼이었다. 실력은 별로 없지만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말린 감을 잘게 잘라 중국 냄비에 넣고 술을 부었다. 그리고 끓이면서 계속 설탕을 넣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했다.

‘으악! 저 비싼 걸!’

한참동안 계속 설탕을 넣어서 졸이니 잼 비슷하게 완성이 되었다.

이것을 튀겨낸 만두피에 살짝 올렸다.

완성된 것을 내밀자 주녹정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상공.......”

지체 높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니라고 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묘한 감동이 주녹정의 가슴 한 구석에 울린 탓이었다.

바삭.

입안에 들어간 만두피가 부서지며 단맛이 확 퍼졌다.

주녹정은 입안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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