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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
“허허, 정말 장하구나. 아직도 꿈이 아닌가 싶다.”
항주로 가는 바다 위, 신겸혁은 아들을 보며 웃었다.
“꿈이 아닙니다.”
“그래.”
신겸혁은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신유성이 이대로 계속 산다고 해도 충분했다. 예전에 명나라로 이민 오겠다는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냈으니까. 그러나 나라를 세우려 하는 아들의 뜻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었다.
“앞으로 왜관일은 그만 두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직장을 그만두라는 말에 불안해지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거부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신겸혁이 계속 왜관에서 일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진다. 그야말로 품계 낮은 상전을 대하는 꼴이 되니까.
신겸혁의 품계가 낮다고 해도 그 자식이 임금과 맞먹는 품계를 가졌으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딱 봐도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형님도 그렇고 모두 함께 함경도로 가셔야 할 겁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함경도라니......”
청계천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한양에서 머무는 것은 이제 어려워졌다, 그런데 함경도로 간다니 이런저런 문제점이 떠올랐다. 걱정도 됐다.
함경도는 너무나 척박해 쓸모없다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인데다가 여진족이 들락거리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웬만하면 남쪽의 섬으로 가고 싶지만.’
생각 같아선 제주도를 꿀꺽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주도로 갈 순 없었다. 가정제가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북방에 자리 잡으라고 했으니 그래야 했다.
공식 문서로 내려온 명령은 아니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가정제의 분노를 피할 순 없었다.
“경원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경원?”
신겸혁은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졌다. 경원은 함경도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두만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안 되는 거냐?”
“안 됩니다.”
신유성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더 묻지 말라는 식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들의 행동에 신겸혁은 뭔가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성이 바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알았다. 그렇게 알고 있으마.”
“불편한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척박한 땅이었다. 여진족을 막기 위한 마을과 작은 어촌 정도가 있는 곳이었다.
‘누가 보면 귀양 가는 줄 알겠군.’
여진하고만 싸우는 것이라면 회령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왜구 토벌의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항구가 필요했다. 다른 큰 도시들은 차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기왕이면 연해주도 먹는 게 좋겠지.’
두만강 건너는 여진족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여진족의 영역을 넘어 땅을 차지해도 무방했다. 가정제가 허락한 일이니까. 가정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해.’
경원은 위험한 땅이었다. 여진족과 언제 약탈을 하러 넘어올지 모르는 땅. 여기서 여진족하고도 싸우고 왜구도 토벌하면서 일본도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탐험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까지 넘어가려면 정말 많은 것이 필요했다.
바닷바람은 시원하건만 신유성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항주.
수많은 문인들이 유람을 하는 도시.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으며 가장 살기 좋은 곳이란 이야기를 듣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부자들이 상당히 많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자들이 많기 때문에 특별하게 보호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수군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신유성이 사선을 받았으니 조선으로 가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유성은 바로 갈 생각이 없었다.
작더라도 항주에 집을 하나 살 생각이었다.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종종 배를 타고 명나라에 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명나라에선 여길 중심으로 활동한다.’
수군들도 있기에 조선공을 구하기도 쉬운 곳이었다. 또한 부자들이 많으니 고가품을 구하기도 더 쉬웠다.
항주에서 산 고가품을 조선이나 일본으로 가져가면 몇 배로 불려서 팔아먹을 수 있었다.
첫날은 휴식을 위해 고급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금의위는 계속 따라다녔다. 신유성이 조선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금의위가 책임지고 호위하도록 되어있었다. 덕분에 만사가 편했다.
금의위가 나타났는데 앞에서 버티는 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기서 유명한 것은 뭔가?”
“동파육이 유명합니다.”
“그래? 그럼 그걸로 하지. 나머지는 알아서.”
은전을 슬쩍 쥐어주자 점소이는 황제라도 만난 것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잽싸게 물러갔다.
“상공. 이 동파육이란 것은 유명한 문인인 소동파가 만든 요리라고 합니다.”
요리가 나오자 주녹정은 미소를 지으며 음식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럼 어디 위대한 문장가가 직접 만들었다는 요리를 맛볼까?”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고기를 콕 집은 신유성은 바로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일단 당신부터 한 입.”
주녹정 앞에 놓인 접시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녹정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 이후에야 신유성은 한 입 먹었다.
적당히 쪄진 동파육은 씹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머지 요리들도 나쁘진 않았다. 주녹정도 고급스러운 요리에 만족하며 식사를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상공이 만들어주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숙수도 한 명 구해야겠군.”
부자들이 사는 지역이기에 고급 요리를 잘하는 숙수도 구하기 쉬웠다. 북경에서 구할 수도 있었으나 선박과 무기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용정차를 마시며 밤을 즐겼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오자 한 가지 음식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유조였다.
밀가루 반죽을 길게 만들어 기름에 튀겨낸 음식.
“이건 뭔가?”
“그건 유조라고 합니다.”
“유조?”
“악비 장군과 연관이 있는 음식이지요.”
옆에서 점소이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남송의 위대한 영웅인 악비 장군은 재상이었던 진회에 의해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문에 진회는 백성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유조를 만들어 씹어 먹으며 진회를 씹는 것처럼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깃든 음식이었다.
“그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유조와 다른 요리로 간단히 요기를 한 신유성은 거리로 나섰다. 첫날은 주녹정과 함께 집을 보러 다닐 생각이었다.
집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의심을 사지도 않았다. 항주에서 지내는 동안 살 집을 산다고 하니 금의위가 금방 사람을 시켜 장원 하나를 물어왔다.
액수가 꽤 비쌌지만 신유성에겐 엄청난 양의 은이 있었다. 현재 일본의 사치품은 대부분 신유성의 손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엄청난 양의 은을 손에 쥐는 것이 가능했다.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집이었다.
집을 둘러보던 주녹정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신유성은 살짝 미안했다.
‘조선에 가면 엄청 실망하겠군.’
신유성이 가려는 곳은 정말 척박한 동네였다. 황궁에서 살던 주녹정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곳.
‘미리 말해야 한다.’
데려간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골치가 아프다.
“부인, 잠깐 얘기 좀 하지.”
“무슨 일인가요?”
“원한다면 이곳에 남아도 된다.”
“네?”
주녹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항주에 남겨놓고 혼자 조선으로 가겠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복수를 꿈꾸었지만 신유성을 만나 신혼의 달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신유성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깨졌다.
“아니, 내가 잘못하게 될 것 같아서 그런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내가 가려는 곳은 매우 척박한 곳이다. 사람도 거의 살지 않고 야인들과 싸워야 하는 곳이지. 폐하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가야만 한다. 그래서 걱정이다.”
살며시 손을 잡아주자 주녹정은 그제야 안심했다.
떼어놓고 가려는 이유가 자신을 걱정했기 때문이란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저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이곳 항주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괜찮아요. 상공과 함께 하는 게 무엇보다 제가 원하는 겁니다.”
애정이 묻어나오는 대답이었다. 이미 같이 합방을 한 사이인지라 신유성도 약간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애정을 표현하니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츠에게 조금 미안해지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안 되나요?”
“할 얘기가 더 있다.”
신유성은 나츠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숨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더 정이 들기 전에.......’
실망을 할 거라면 빨리 실망하는 편이 상처가 적을 것이라 생각한 신유성이었다. 하지만 나츠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주녹정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눈빛이 조금 위험하게 빛났다.
잊고 있던 원한에 대한 것이 떠오른 것이었다.
“상공.”
“응?”
“그녀를 받아들일 순 있어요.”
“진심인가?”
“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주녹정은 살며시 다가와 신유성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상공이 황제가 되겠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여자를 품어도 괜찮아요.”
순간 신유성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갈등했다.
‘날 시험하는 건가? 이것도 가정제의 시험인가?’
신유성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녹정을 떼어놓고 눈을 마주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주녹정은 다시금 신유성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정제에게 원한이 있고 그래서 명나라가 싫어졌다는 것. 그리고 기왕이면 신유성이 황제가 되었으면 한다는 이야기까지.
“내가 하지 않겠다면?”
“그럼 그 여자 일은 없는 일로 해야죠.”
“난 네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
“누가 시켜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절 남겨두고 떠나세요.”
주녹정은 신유성의 품으로부터 떨어졌다.
“상공 덕분에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했습니다. 평생 간직하고 살겠어요.”
신유성은 갈등했다. 아직 확실하게 신뢰를 쌓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녹정의 말은 믿기가 힘들었다.
“생각해 보겠다.”
신유성은 답을 미루었다. 이날 밤, 처음으로 두 사람은 따로 잠들었다.
다음 날, 신유성은 주녹정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금의위를 시켜 조선공을 최대한 많이 모집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려도 좋고 늙어도 좋다. 가족을 데려가고 싶은 사람은 가족까지 함께 데려가겠다고 해라.”
조선으로 떠날 조선공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최대한 많은 조선공이 필요했다. 당장 배를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포한 배들만 해도 숫자가 상당했지만 앞으로 만들 것은 더욱 강력한 군선이었다.
‘바다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더 많이 필요하다.’
상선도 만들어야 하고 배의 수요는 어마어마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많은 조선공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금의위가 떠나고 신유성은 청하방으로 향했다.
찻집들이 즐비한 문화의 거리.
길에는 화려한 복장을 한 이들이 보였다. 허나, 신유성이 주녹정과 함께 지나가니 다들 길을 비켜주었다. 호위로 따라다니는 금의위 때문이었다.
청하방을 둘러보다 가장 고급스러운 곳에서 용정차를 마신 신유성이 일본으로 가져갈 다기를 잔뜩 샀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주녹정의 마음은 답답함으로 가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유성은 볼 일을 봤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유명한 서호였다.
서호에 도착한 신유성은 작은 배에 주녹정과 단 둘이서만 올라탔다.
“위험합니다.”
“괜찮다. 나도 내 한 몸 지킬 수 있다.”
신유성은 차고 있던 검을 툭 치며 금의위를 떼어놓고 서호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사방이 탁 트인 서호의 아름다움 속에 떠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네 말을 생각해보았다. 사실 아직 널 믿지 못하겠다.”
“상공.......”
주녹정은 서글펐다. 서호의 한 가운데에서 홀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막막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 황궁에서 홀로 버틸 때 느꼈던 외로움이 밀려오려 했다. 그때, 순풍이 불어왔다.
“하지만 이미 내 여자다. 그러니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유성의 눈은 불타올랐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주녹정은 눈물을 흘리며 신유성의 품에 안겼다.
‘상공의 믿음에 꼭 보답하겠어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녹정은 기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소녀의 외로움이 녹아 없어졌다. 빈자리에는 신유성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차올랐다.
서호에서 두 사람은 더욱 더 강하게 얽혔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배는 천천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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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