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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56화 (56/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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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답답하구나.”

명종은 신유성이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명나라가 해금령을 시행한 이후 그 어떤 조선의 사신도 공식적으로 해로로 다니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신유성은 당당하게 배를 타고 나타났다.

사신이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유성은 사신이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명나라 원정군 사령관이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어 이제야 친정을 하게 된 명종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대신들은 그 어떤 위로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신유성의 일을 거론하지 않는 정도였다.

윤원형 또한 답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조정에서 거론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신유성의 암살 문제는 아는 사람이 없는 편이 더 좋은 일이었다.

‘살려둘 수 없다.’

이제 겨우 친정을 시작한 명종에게 신유성이란 존재는 매우 부담스러웠다.

회의가 끝나자 윤원형은 독대를 신청했다.

독대는 쉽게 받아들여졌다. 사관들을 뒤로 물린 명종은 윤원형과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소신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사옵니다.”

“뭔가?”

“잠시 와병으로 누워계시면 되는 일이옵니다.”

“와병이라.”

신유성과 대면하는 일 자체가 명종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명나라 정1품 도독에게 예우를 하다보면 결국 신유성은 명종과 동급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사관에 의해 기록된다면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었다.

‘그럴 순 없다.’

아들을 생각한 명종은 이를 악물었다. 수치스러운 일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잘못 처신하면 왕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와병만으로 되겠는가? 그가 날 부르면 계속 아프다고 피할 수 있는가?”

“총병관이라고 하지만 대명의 대군이 함께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 또한 사람. 분명 어딘가 틈이 있을 겁니다.”

말로 하지 않았지만 윤원형은 목을 슬쩍 긋는 경망된 행동을 보였다.

평소라면 언짢게 생각했을 일이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종도 윤원형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사람들이 알아선 아니 될 일이네.”

“무슨 말씀을 하셨사옵니까?”

능청스럽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돌변한 윤원형을 보며 명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모습은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명종은 신유성 암살을 허락했다.

다음 날부터 명종은 아프다며 드러누웠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물포에 도착한 신유성은 인사를 나온 윤원형과 만나게 되었다.

“그간 격조하셨습니다.”

다시 만난 윤원형은 예전과 아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너무나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으나 신유성은 섬뜩함을 느꼈다.

‘무서운 사람이네.’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 관계를 생각하면 슬쩍 불만어린 표정을 지을 법도 했다. 그런데 윤원형은 정말 반갑다는 표정으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뭔 꿍꿍이일까?’

의심부터 드는 것은 당연했다. 등골을 빨아먹으려 했던 인간이 갑자기 공손하게 나온다면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이상하게 볼 걸 알 텐데도 저러는 걸 보면.’

신유성은 시험하기 위해 슬쩍 한 마디 던졌다.

“그런데 전하께선 안 나오셨소?”

툭 던진 한 마디가 일으킨 파문은 컸다. 너무나 간단하게 던진 한 마디에 주변의 대신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이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단 부사맹이었던 자가 갑자기 임금에게 왜 마중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저 놈을 그냥?’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무관들도 있었다. 여차하면 뽑을 기세였다. 허나 그럴 순 없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유성을 죽인다? 같이 온 명나라 공주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전부 다 죽이고 신유성은 물론 주녹정도 도착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명나라에선 알 길이 없다. 누군가 발설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신유성과 함께 한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가 사실을 고한다면 바로 전쟁이었다.

명나라에 침공의 명분을 내주게 되는 것이다. 조선을 망가트릴 방법은 많다.

예를 들어 명분을 확보한 명나라가 명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누구든 명종을 쓰러트리고 조선왕조를 무너트리는 자를 제후로 만들어주겠다는 말만 해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니 죽이려면 은밀히 죽여야만 했다.

증인이 절대 남지 않도록.

‘알만 하군.’

험악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유성은 피식 웃었다. 살의를 대하는 것은 이미 익숙했다. 전장에서 직접 싸우기까지 한 신유성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았다.

윤원형은 표정 관리에 확실히 능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따지는 사람도 없고. 속으로 분을 삭이는 건 역시 꿍꿍이가 있다는 거겠지?’

예상했던 일이었다. 해서 신유성은 굳이 한양까지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하께오선 와병중이십니다.”

“와병이라. 그렇군.”

신유성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이야기 하지. 화포와 화약을 가져오도록. 아울러 배를 만드는 조선공도 필요하다. 아, 화약을 만드는 자들도 데려오고.”

신유성은 대놓고 하대했다. 마중을 나온 이들은 다들 예의를 모르는 천박한 놈이라고 속으로 욕했다. 그러나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으니 가슴만 답답했다.

“그럼 물러가도록.”

“자리를 준비했으니 관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필요 없다. 배에서 지내겠다.”

단호한 거절에 윤원형은 확신했다.

‘경계하고 있군.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확인한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왜 그러셨나요? 그냥 대접을 받아도 될 텐데.”

“그들은 날 반기지 않아. 어쩌면 기회를 봐서 죽일지도 몰라. 음식에 무슨 독을 탈지도 모르고.”

“그런가요?”

명나라 황궁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심지어 후궁끼리 질투해 서로 독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심한 독이 아니고 병에 걸리도록 몸이 약해지게 하는 독을 쓰기도 하고 아이를 갖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권력을 두고 다투는 여인들의 질투심은 그만큼 호전적이고 무시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은밀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미 본 것이 많기에 주녹정은 신유성의 말을 납득했다.

“그럼 폐하께 주청을 올릴까요?”

“그럴 수야 없지. 지금 해봐야 이득이 없어.”

신유성이 거부하자 주녹정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포와 화약은 왜 또 내놓으라 하신 건가요? 사람도 더 태울 자리가 없는데.”

“배는 곧 올 거야.”

그 말 그대로였다. 며칠 동안 제물포에서 지내자 남쪽으로부터 대맹선 10척이 올라왔다.

신주성은 짐을 챙겼다. 정든 청계천을 떠나야만 했다.

‘이별이구나.’

정든 고향이었다. 집을 둘러보니 어릴 적 추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동생인 신유성을 질투했던 일도, 여자의 알몸을 그리던 일도. 모두 이젠 추억이 되었다.

“갑시다.”

신주성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배에 올랐다. 노비들은 이미 처분했다. 재산은 모두 처분해 비단으로 바꿨다.

그래서 짐이 한 가득이었다.

‘참 많구나.’

하지만 이사가 어렵지는 않았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대맹선은 모든 짐을 싣고도 남을 정도였다.

신주성이 배를 타고 떠나자 근처를 배회하던 무리들이 혀를 찼다.

윤원형이 슬쩍 복수를 하기 위해 도적으로 위장했던 자들이 허탕을 치게 된 것이었다.

제물포를 떠난 신주성은 부산포로 가서 어머니 유씨를 태웠다. 그리고 바로 함경도로 향했다.

이와 같은 행보는 실시간으로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대체 어디로 가려는지 짐작이 갑니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선에 머물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은 풀렸다. 신유성이 함경도 경원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이름도 없는 작은 어촌에.

“으음. 이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설마 함경도로 가다니.”

함경도. 예전에는 함길도라 불렸던 이곳은 조선 조정에서 엄청나게 차별하는 곳이었다. 태조인 이성계가 태어난 고향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이 지역 사람들을 박대했다.

차별이 극심해진 이유는 바로 이시애의 난 때문이었다.

이징옥의 난 이후 세조는 함길도 인사들을 배척하며 중앙에서 직접 함길도로 지방관을 파견했다. 원래 함길도에서는 명망 있는 지방 호족들이 지방관을 해왔는데 세조의 이러한 행동에 함길도 호족들은 반발했다.

이에 지위에 큰 위협을 느낀 이시애는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난은 실패했고 함길도에 대한 차별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함길도 사람들은 아예 남쪽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게 법을 만들기까지 했다.

중종 때 함길도는 함경도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차별은 여전했다.

이 지역 사람들이 관직을 얻게 되면 또 다시 난을 일으킬 것이라며 사대부는 언제나 배척하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아도 벼슬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으니 함경도 사람들에게 나눠줄 자리는 없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엄청난 차별을 받는 곳이라 낙후 되어 있었다.

“으음, 이거 아무래도 불손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어쩌자고요? 조정으로 불러들일까요?”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신들은 신유성을 불러들여 역모로 잡아 죽이는 것을 논했다. 허나, 윤원형이 막았다.

“대명의 도독을 역모로 죽이겠다고요? 제정신입니까?”

신유성이 조선의 백성이라 하나 벌을 내린다면 명나라의 황제가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명종이 신유성에게 벌을 내린다면 이는 월권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람이라 해도 명나라 부마도위란 직위도 무시할 순 없었다.

“으으음!”

불편한 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유교를 숭상하는 이들에게 신유성은 그야말로 골치 덩어리였다. 날벼락이었다.

“그 자가 만약 불손한 자들을 규합한다면 어찌 해야 합니까?”

“방해어왜총병관입니다. 함경도 인사들을 데려다 쓴다고 어떻게 할 순 없습니다.”

“허허, 그럼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일단 우리도 왜구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섭시다. 왜구들이 싹없어진다면 일단 총병관으로서 머물 명분은 없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수군을 더 늘리는 겁니까?”

“일단 그것이 가장 좋겠지요.”

“허나 그만한 여유가 있습니까?”

없었다. 윤원형을 비롯한 인사들이 쪽쪽 빨아먹으며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에 재정은 엉망인 상태였다.

“그래도 해봐야지요. 군역을 더 늘리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군역만 늘려서 되겠습니까? 배는 어쩌고요?”

문제가 많았다. 특히 배는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왜구를 토벌한다고 해도 배가 느려서 제대로 쫓아가질 못하니 잡기가 힘들었다.

“으음.”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신기전도 있었고 대포도 있었다. 정면으로 붙게 되면 얼마든지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해상전은 화력만 가지고 모든 게 정해지진 않는다.

“어쨌거나 해봅시다.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윤원형의 말에 다들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네 놈이 그렇게 안 처먹었으면 이럴 일은 없었다.’

윤원형에게 반감이 있는 이들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회의에 참여했다. 어찌 되었든 신유성을 하루라도 빨리 총병관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함경도에서 나가라고 말할 명분이 없었으니까.

함경도에 들어선 신유성이 배를 내린 이름 없는 어촌.

‘이쯤이 나진이었던가?’

지도에서 몇 번 본 것이 다였지만 다행히도 이름이 기억났다.

“우린 이곳에 자리 잡는다.”

작은 어촌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갑자기 군선이 20척이나 밀려와 사람들을 토해내니 겁을 내며 숨었다.

몇몇 사람들은 인근의 지방관에게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얼른 내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유성은 데려온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 전념했다.

“고생스럽더라도 좀 참아라.”

“괜찮습니다.”

주녹정은 계속 배에서 지내게 되었다. 마땅한 거처가 없기 때문이었다. 북해도로 보내면 만사가 해결이지만 그렇게 되면 주녹정에게 딸려온 이들도 함께 가게 된다.

‘저들 중에 누가 밀정인지 알 수 없으니.’

북해도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곳.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주녹정은 물론 가족들도 북해도로 보낼 수 없었다. 가족이 전부 사라졌다면 명나라에서 일본을 뒤지기 시작하게 되고 결국 자세한 사정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마도의 협력으로 겨우 이기고 있다는 식으로 보여야만 해.’

최대한 방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이곳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든다.’

신유성은 함경도가 차별 받는 사람들의 땅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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