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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대체 어디서 오신 분들이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근처의 현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처음 기세와는 달리 현감은 곧 고분고분해졌다.
명나라의 도독이라는 말에 긴가민가하면서도 믿지 않을 순 없었다. 어촌 앞바다에 떠있는 20척의 군선 때문이었다. 그 중 10척은 조선의 대맹선이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왜구로는 전혀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오늘부터 이곳을 수군영으로 삼을 것이다.”
“조정의 명을 받으셨습니까?”
현감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신유성은 피식 웃으며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은 일이라고 했다. 이어서 직인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현감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일단 확인해 볼일이라면서 돌아갔다.
“마을남자들을 모아라.”
신유성은 바로 사람들을 모으게 했다. 마을남자들은 겁에 질렸으나 병사들을 거스를 순 없었다.
결국 모두 공터에 모이게 되었다. 수는 약 30명. 별로 많지 않은 숫자였다.
“오늘 하루 일을 도와주는 자에게 쌀 한 되를 주겠다.”
그러자 남자들은 쌀을 받기 위해 일을 하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한 일은 신유성의 군대가 사용할 터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터를 모두 정리하고 짐을 내린 뒤에 신유성은 약속대로 쌀을 지급했다.
마을남자들은 쌀을 받고 신유성이 조금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일을 시켜도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 보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현감의 보고를 받은 경원의 도호부사는 바로 함경도 관찰사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함경도 관찰사는 조정에 문의했다. 대답은 곧 돌아왔다. 명나라의 정1품 도독이 맞다는 확인만을 해주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은 적지 않았다.
조정의 대답을 받은 함경도 관찰사는 골치가 아팠다.
“대체 어찌 하란 말인가!”
“아무래도 도와주지 말라는 것 아닐까요?”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내 목이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더냐?”
신유성을 적극적으로 돕다가 조정에 찍히면 관찰사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신유성을 돕지 않거나 방해했다가 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물고 늘어지면 조정에서는 역시 관찰사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둘러댈 것이 훤했다.
“내가 사석이라니.”
버리는 돌.
관찰사는 금방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찌 하고 있나?”
“지금은 쌀을 주고 사람을 부리는 모양입니다. 주변에서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허, 그것 참.”
신유성에 대한 정보가 새삼 떠올랐다. 명나라 황제의 부마도위가 된 역관의 자식.
그냥 명나라에서 계속 살았다면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었으나 신유성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문제였다.
조선 사람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 막을 순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이 엄청난 직위를 가졌고 명나라 조정에서 내린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는 것뿐이었다.
조선이 명목상의 제후국이라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명나라 황제의 신하를 자처한 상황, 협조하지 않을 순 없는 일이었다.
‘외줄타기군.’
일이 잘못될 경우, 함경도 관찰사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원망이 샘솟았으나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나도 외면해야겠군.’
결국 함경도 관찰사는 조정이 한 것처럼 묵인하기로 했다. 직접 나서서 뭔가 하다가는 자체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으면?
아랫사람을 잘못 관리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지언정 그보다 더 큰 죄목으로 처벌 받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일단 명나라 도독이 확실하다고 확인해주어라. 그리고 절대! 그 외에 아무런 말도 해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도와야 하냐고 물으면 어찌할까요?”
“못 들은 척 하고 얼른 돌아와라. 그리고 내가 지금 한 말이 밖으로 새어나갔다가 잘못되면 나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관찰사의 명은 그대로 이행되었다. 눈치 빠른 지방관들은 계속 책임을 아래로 전가하기 위해 밑에서 올라오는 질문을 계속 묵살했다.
신유성의 등장으로 경원은 혼란에 휩싸였다. 지방관들은 위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하니 답답했다. 결국 자의적으로 알아서 행동하라는 의미.
그러는 사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점점 나진으로 모여들었다.
척박한 곳이라 먹고 살 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하루 일을 하면 일당으로 쌀을 나눠주었다.
신유성은 일단 이들을 이용해 필요한 시설을 만들게 했다.
‘부두를 먼저 만들어야 해.’
배에서 편히 사람과 짐을 내릴 수 있어야 빠른 발전이 가능했다. 어촌에 불과했던 나진의 생산력으로는 군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배를 통해 타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급해야만 했다.
부두를 만드는 일은 북해도 출신 조선공들이 지휘했다. 이들은 북해도에서 대맹선을 타고 온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옆에는 통역을 해줄 아이들이 붙어있었다.
신유성이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아이들은 많이 성장해 이제는 어느 정도 통역이 가능한 상태였다.
항주에서 데려온 조선공들은 일단 말이 통하질 않아 나무꾼으로 쓰고 있을 정도였다. 이들에게 일단 목재 가공부터 시작해 조선소를 짓도록 명령만 전달한 상황이었다.
이들의 곁에는 항주의 말을 배우기 위해 병사와 함께 다른 아이들을 붙여 놓은 상태였다.
‘집을 얼른 지어야 하는데 미안하군.’
신유성은 한쪽에 있는 천막들을 바라보았다. 작은 어촌 마을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력이 쉴 수 있는 건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집이 있었지만 욕심내지 않았다.
대신 모두 천막에서 살게 했다. 주녹정과 신유성의 가족 모두 천막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신유성이 함경도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며칠 지나니 벌써 사람들 사이에 이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을 확인했다.
인심을 다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대가로 많은 이들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배에서 지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제 배들은 모두 저마다 돌아가면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대맹선들은 빠르게 오가며 보급 물자를 실어 날라야 했고 사선들은 돌아가며 주변 해역을 순시했다.
잠시 미안한 감정에 한숨을 내쉰 신유성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이고 참말로 좋으신 분 아닌가?”
“그렇지.”
나진에 모인 함경도 사람들은 저녁밥을 먹고 나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제는 물론 신유성이었다.
“캬! 벌써 대명의 도독이시라니. 역시 남다르셔.”
“아무렴. 그리고 보라고. 빼앗아 가기는커녕 더 주시고. 집도 안 뺐고. 얼마나 좋으신 분이야.”
최근 함경도 사람들은 생활이 무척이나 나빠졌다. 명종이 즉위한 이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진 탓이었다.
무역소에서 여진과 하는 장사는 물론 모든 것이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마치 말려 죽이려는 것처럼 빼앗아가는 일이 많아 생활이 점점 궁핍해지고 있었다.
원성이 자자했으나 지방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득세로 기강이 해이해진 조정에서 이들을 벌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위로 상납금을 잘 바치니 관리들은 놔두고 함경도 백성들만 더욱 나쁜 놈으로 몰아갔다.
그러던 차에 신유성이 나타난 것이었다.
엄청나게 구휼을 하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주고 빼앗아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심을 샀다.
“그나저나 올 겨울은 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도독님이 어떻게 해주시지 않겠는가?”
“어휴,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수탈이 너무 심하다보니 사람들은 겨울을 나는 것부터 걱정했다.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서 굶기 때문이었다. 나진은 그나마 어촌이어서 생선을 잔뜩 잡아 말려 월동 준비를 했다.
“그나저나 들었는가? 얼마 전부터 갑자기 군역을 더 늘린다고 하던데.”
“그 옆 마을에 어제 갑자기 공납을 내라고 하던데 들었나?”
“뭐여? 갑자기 왜?”
“나야 모르지. 하여튼 이놈들은 허구한 날 그거 다 처먹고 뭐하나 몰러.”
세금을 엄청나게 뜯기다보니 나오는 푸념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새로 세금을 걷어가는 이유는 바로 왜구토벌을 위한 병력을 편성하기 위한 재정 마련 차원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절대 자신의 돈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세금을 더 늘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황을 비롯한 뜻있는 대신들이 만류했으나 윤원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렴청정을 다시 시작한 문정왕후의 결정에 반기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매가 사이좋게 조선을 말아먹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신유성으로 인해 수탈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거 혹시 여기도 오는 거 아녀?”
“에이. 설마? 저분이 계신데 걷으러 오겠어?”
“모르지.”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다음 날, 인근의 호방이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뭐냐?”
호방은 막아서는 병사의 위세에 위축되었다. 허나, 뒤로 물러날 순 없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통보를 하려고 왔습니다.”
“가봐라.”
뭔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고 왔다니 병사는 일단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방이 일하는 사람들이 지어놓은 간단하게 지은 움집촌에 다가가 뭐라 말을 하자 갑자기 사람들이 호통을 치며 호방을 위협했다.
“뭐야? 뭘 또 내라고? 배 째라 이놈아! 내려고 해도 다 처먹어서 줄게 똥밖에 없다!”
조세저항이 무척이나 거셌다.
호방은 앗 뜨거 하는 심정이었으나 물러나진 않았다.
“어허! 국법이 지엄하거늘! 쓴 맛을 봐야 정신 차릴 텐가!”
“꺼져!”
아낙네들이 빨래방망이를 들고 나서자 호방은 위협을 느꼈다. 정말 싸운다면 함께 있는 자들이 어떻게든 해주겠지만 다수가 주는 위세는 무시할 수 없었다.
“어험! 어쨌든 나중에 다시 올 테니 준비 해놓으라고!”
호방은 후딱 도망쳤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남자들은 당황했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또 공납을 바치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에 든 것을 던지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참았다. 아무리 분해도 먹을 쌀을 던질 순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놈들.”
남자는 눈물을 흘렸다. 혼자가 아니었다. 집집마다 분해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상당했다.
“어떻게 방법이 없나요?”
아내의 말에 남자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세금을 안내려면 도망치는 방법이 있었다. 어디론가 도망쳐 화전을 일구며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사람 취급도 못 받으니 언제나 끝이 좋지 못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노비가 되는 것이 있었다.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사람 취급은 못 받는다.
수탈이 심해지니 양인으로 사는 것이 점점 어려웠다.
“잠시 기다려봐.”
남자는 굳은 결심을 하고는 신유성을 찾아갔다.
한 남자가 찾아왔다는 말에 신유성은 일단 만났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 신유성은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세금이라. 그래. 뭔가 꾸미고 있긴 하군.’
갑작스럽게 세금을 걷는다면 분명 어딘가 쓸 데가 있다는 소리였다.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
신유성이 함경도에 자리를 잡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걷는 세금.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말이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다. 두 가지가 있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첫 번째는 내 노비가 되는 것이다.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으니까.”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노비가 되는 건 그렇게 참신한 방법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내 병사가 되는 것이다.”
“네?”
“여기 모인 이들 전부 내 병사가 되면 세금을 내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대신 남자는 물론 여자와 아이 노인들도 모두 내 병사가 되어야만 한다.”
병사가 되라는 말에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면 싸우다 죽으란 말씀이십니까?”
“너희들은 싸울 필요 없다. 그저 병사가 되어 내가 시키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지금까지 한 일들이다. 건물을 짓고 다른 병사들이 쓸 무기를 만들고 병영을 관리하는 그런 일이다.”
“참말로 싸우지 않는 겁니까?”
남자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마라. 방법은 그 둘 뿐이다.”
신유성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방법을 제시할 뿐이었다.
“돌아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주 막 나가자는 건가?’
남자가 돌아가고 홀로 남게 된 신유성은 피식 웃었다.
‘나라가 아주 엉망이군. 참 좋아.’
조선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신유성에겐 기회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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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