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신의 유희-60화 (6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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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거정

가을이 되었다. 슬슬 추수를 해야 할 시기. 하지만 분위기는 매우 좋지 못했다.

“빌어먹을! 올해는 왜 이 모양인지.”

“덕이 없어서 그런 게지.”

몇몇 지주들이 모여서 떠들어댔다. 작황이 좋지 못했다. 그런다고 지주들의 입에 거미줄을 치는 일은 없지만 수입이 줄어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공납을 또 걷어간다니.”

“왜구 토벌한다고 그러는 거지.”

“에이. 명나라 도독한테 맡기면 될 걸 왜 나서나 몰라.”

“역관의 자식이 명나라 도독이 되었으니 눈이 뒤집힌 게지.”

“그럼 지들 돈으로 하던가.”

“그러게 말일세.”

공납을 낸다고 지주들의 입에 거미줄을 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기분이 안 좋은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슬쩍 아전들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봐주시죠.”

“어험. 사정이 딱하니 어쩔 수 없지.”

슬쩍 장부 조작이 시작되었다. 대신 아전들은 힘없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었다. 약자에게선 얻을 것이 없으니 봐줄 이유도 없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

여기에 아전들을 구워삶은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쥐어짰다.

전체적으로 비리가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주문한 고기를 배달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임거정은 이를 갈았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귀가 있으니 지나가다가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임거정의 가슴에 자꾸 불씨를 날렸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새끼들이.’

힘이라면 자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쉰이지만 임거정은 여전히 장사였다. 허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괴력을 발휘하는 장사들이 아니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문제를 일으켜봐야 좋을 일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임거정은 묵묵히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돈 많은 이들의 집에 고기를 배달할 때마다 가끔 듣게 되는 웃음소리와 불평불만은 임거정의 분노를 계속 일깨웠다.

집으로 돌아온 임거정은 자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하나 있던 아내는 못 먹어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오셨어요?”

병든 아내는 불편한 몸으로 임거정을 맞이하려 했다.

“아, 누워있지 왜 나와?”

“아까 사람이 왔다 갔어요.”

“누군데?”

“그게.......”

병든 아내가 말을 주저하는 것에 임거정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또 세금을 걷으러 온 것이었다. 백정이니 돈 좀 벌지 않았느냐며 계속 뒤지고 갔다. 임거정은 어떻게 해서든 없다며 버티는 중이었다. 아픈 아내를 위해 약값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속에서 천불이 일어날 것 같았다. 계속 뜯긴 것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조금이라도 시름을 잊어보려고.

신분이 백정이라고 해서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이면 서로가 더 잘났다며 자랑하는 것으로 천민임을 잊어보려고 하는 빌어먹을 친구들이었다.

“어휴. 뭘 이렇게 걷어 가는지.”

“내가 들은 얘긴데 거 왜구 토벌한다고 그렇게 걷어간다더라.”

“아따. 왜구를 잡긴 뭘 잡아. 난 구경도 못한 왜구네.”

친구들과 세상을 욕하며 응어리를 터트리는 시간이 없었다면 폭발해도 벌써 폭발했을 것이다. 이제 나이를 먹었다지만 임거정의 성격은 아직도 불과 같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들었나?”

“뭔데?”

“나랏님이 쌀 50섬을 주면 노비들 면천해준다는 얘기 못 들었어?”

“푸하하하하하!”

모여 있던 사내들이 모조리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노비 자식들이 쌀이 어디 있어서 50섬이나 내?”

“왜 없어. 노비라서 세도 안 내고 모아논 거 꽤 될 걸?”

“진짜?”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

“젠장.”

잠시 터졌던 웃음보는 금방 가라앉았다. 쌀 50섬을 가진 노비들이 있다. 없다면 왕이 면천시켜 준다는 허튼 소리를 할 이유는 없다.

“어휴, 이젠 노비한테도 밀리겠네.”

백정들이라고 다 가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뜯어가는 게 많다보니 살림이 많이 팍팍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뜯어 가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뜯겨야만 했다.

“빌어먹을.”

“그러게.”

침묵이 감돌고 분위기가 흐려지자 한 사람이 나섰다.

“거 칙칙하게. 좀 좋은 얘기 못하냐?”

“니가 있으면 해봐 이 자식아.”

“알았다. 험! 내가 저번에 들린 장돌뱅이한테 들은 건데 말이야.”

한 남자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듣게 된 이야기는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였다.

“푸하하하하! 그게 말이 되냐? 먹여주고 재워주고 옷도 주고? 세도 안 내고? 에이!”

“나도 안 믿기는데 그 장돌뱅이가 진짜 한 번 가봤다고 그러더라고.”

“그 놈이 너 벗겨먹을라고 하나보다. 거기가 도적 소굴인지 어떻게 아냐?”

사람들은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 때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나진? 거기 명나라 도독나리께서 와 있다는 데 아녀?”

“엉?”

분위기는 금방 뒤바뀌었다.

“그럼 그게 참말인가?”

“에이. 거기 병사들이나 그렇게 지낸다는 소리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까지 다 받아주겠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임거정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병든 아내를 대신해 밥을 짓고 짚을 꼬아 새끼줄을 만들었다.

추수가 끝난 뒤, 대대적인 징세가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곡소리가 나왔다. 물론 못 사는 집들 한정이었다. 그럭저럭 살던 집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잘 사는 집들은 욕을 내뱉었다.

임거정의 집은 못 사는 집.

곡소리를 내야 하는 집. 그러나 우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하늘을 향해 휘황찬란한 욕설을 날리는 남자가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임거정의 아내가 죽었다. 병을 앓다가 결국 그렇게 가버렸다. 매번 미안해하더니 그렇게 떠나버렸다.

한스러웠다.

‘나도 땅부자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그랬다면 빼앗는 쪽에 설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의원을 붙여놓고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천불이 가슴에서 일어났다.

자식들은 일찍이 떠나보냈다. 몸이 약한 아내의 피를 물려받아 그런지 어렸을 때 병마에 시달리다 죽었다. 그렇게 몇 번 아이를 보았지만 모두 오래 버티진 못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자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임거정은 아내를 버리지 않고 데리고 살았다.

그렇게 꼭 쥐고 놓지 않았던 사람이 결국 죽었다.

홀로 남게 된 임거정은 화가 났다.

“왜! 나한테 왜 이러는데!”

하늘을 향해 아무리 원망을 토해내도 대답은 없었다.

아내의 장사를 치르고 겨울이 왔다. 임거정은 계속 일을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이제 혼자가 되니 먹고 사는 건 오히려 편해졌다. 뭘 하든 몸 하나만 신경 쓰면 되니까. 나이가 좀 있지만 워낙에 튼튼한 몸이어서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다.

소를 도축한 임거정은 소피를 선지로 만들었다. 이것을 장에 내다팔면 돈이 된다. 그러나 임거정은 선지에 손을 뻗었다.

선지를 뜯어 입에 넣었다. 팔 생각 따윈 없었다.

‘벌어서 뭐하게?’

물려줄 자식도 없었다.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자식 또한 백정의 자식이라고 천대 받으며 살게 될 뿐이었다. 그야말로 빌어먹을 세상.

아내도 가고 혼자가 된 임거정은 그냥 먹고 죽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 최대한 즐기다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추운 겨울이 되었지만 도축일은 오히려 더 들어왔다. 곧 있으면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임거정은 바빠졌다. 그리고 매일 소의 부산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입은 행복했다. 하지만 가족이 없으니 가슴 한구석이 썰렁했다.

임거정은 선지를 우물거렸다. 역한 냄새가 올라오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기를 배달하기 위해 나오니 냉기가 밀려들었다. 하얀 입김을 거칠게 내뿜으며 임거정은 걸었다.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어 질척한 길. 똥을 밟은 기분 같아 표정이 나빠졌다.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나쁜 예감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한 양반집에 고기를 배달했다. 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담 밖으로 들렸다.

‘빌어먹을.’

속으로 투덜거리며 임거정은 문을 넘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기를 주고 나오려 했다.

막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엇!”

누군가 임거정의 가슴에 부딪히더니 뒤로 밀려났다.

“죄송합니다.”

척 보아도 고급스러운 옷. 임거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켰다.

“에이! 재수 없게. 퉤!”

여느 때에 별로 다를 것 없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땅바닥에 침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였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질척한 땅. 차가운 냉기. 잔치로 인해 소란스러운 흥겨운 소리. 부산스러움. 축축함. 양반의 침.

그리고 초라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신.

힘이 용솟음쳤다.

고개를 쳐든 임거정은 주먹을 날렸다.

“억!”

양반은 너무나 쉽게 쓰러졌다. 한 방에 나가떨어지더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크.’

가슴이 철렁한 임거정은 도망쳤다.

‘내가 무슨 짓을.’

두려움이 일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제 곧 날 잡으러 오겠지?’

백정이 양반을 쳤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임거정은 깨달았다. 지켜야 할 것이라고는 몸뚱이 밖에 없었다.

“으헛.”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차피 이리 살다 죽을 몸.’

자식들도 모두 떠나보내고 아내도 죽었다. 남은 것은 죽지 못해 사는 몸뚱이 하나뿐.

‘뭘 얼마나 더 살겠다고.’

해를 넘기면 쉰이었다. 살만큼 살았다고 임거정은 생각했다.

그러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양반을 때려눕혔던 사실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그 꼴이나 더 볼까?’

임거정은 일단 짐을 챙겼다. 산 속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챙긴 것은 소 잡는 칼이었다. 소를 잡고 깨끗하게 닦았던 칼을 슬쩍 뽑아보니 번들거렸다.

‘다 잡아 족치는 거여.’

긴 세월 동안 백정으로 살면서 쌓인 한이 터졌다. 그 동안 임거정을 억눌러왔던 족쇄는 모두 끊어졌다.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다.

미래가 없고 오직 오늘만 남았다.

몸뚱이와 아직 다 풀지 못한 분노가 남았다.

‘다 끝내 버리는 거여!’

밖으로 나가자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놈의 양반!’

임거정은 뛰었다.

맹수가 산으로 도망쳤다.

겨울을 맞이한 나진은 평화로웠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혹독한 추위가 예상 되었다. 그러나 나진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모두 털옷을 입고 움직였다. 일도 힘들지 않았다.

신유성은 겨울에는 무리하게 일을 못하게 했다. 대신 힘이 넘치는 장정들을 훈련 시켰다.

쇠뇌를 쏘는 연습부터 창술까지.

장정들은 나진을 지키기 위해, 신유성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배웠다.

‘모두 잘 하고 있군.’

어느새 나진의 인구는 2만에 가까워졌다. 그야말로 바글거리는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나진은 보통 도시가 아니었다.

나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신유성의 병사였다.

겨울이 되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었다. 살기 힘들어진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나진으로 향했다.

신유성은 훈련 상황을 둘러보고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는 식량으로 가득했다. 큐슈에서 요시시게가 엄청나게 많은 생선을 잡아 말린 뒤에 나진으로 보내왔다. 북해도에서도 사냥한 고기를 훈제해 보내왔다. 쌀 창고에는 난부 가문에서 보낸 쌀로 가득했다.

‘겨울은 충분히 날 수 있겠어.’

겨울이 오기까지 신유성은 부두와 창고를 계속 늘렸다. 덕분에 많은 양의 식량을 비축하는 데 성공했다. 교역을 하기 때문에 대량으로 식량을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만까지는 봄까지 먹일 수 있어.’

밖으로 나가자 멀리 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신유성은 바로 부두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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