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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거정
‘드디어!’
후지바야시 켄은 나진의 부두에 내려서며 감격에 젖었다.
지금까지는 유구 왕국에서 명나라로 가는 해적들을 잡는 임무를 해왔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해적들이 뜸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약탈을 떠난 배들이 돌아오는 확률이 확실하게 줄어들고 신유성이 일본에 푸는 주요 수입 품목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켄은 해적들을 잡는 것 이외에도 명과 나가사키를 오가는 상선들을 보호했다.
배들이 정기적으로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자 일본의 영주들은 약탈보다 교역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제는 오직 소수만이 아직도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명나라 해안을 약탈할 뿐이었다. 그런 이들도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항로는 쓰지 못했다.
큐슈를 지나 유구를 통해 항주를 비롯한 명나라 남부로 가는 항로는 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주로 조선의 섬을 거친 다음 요동에 잠깐 들리거나 아니면 바로 산동으로 넘어가는 일이 늘어났다.
적어도 조선의 수군은 어느 정도 따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조선 수군은 수없이 약탈당하면서도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유구로 가면 죽음의 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해역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그 분이 계시나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켄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덩어리를 둘을 달고 왔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려나?’
켄은 약간 걱정이 됐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뒤에 따라붙은 두 사람은 유구 왕국의 왕족이었으니까.
“티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화진입니다.”
유구 왕국의 말은 모르기에 통역이 나섰다. 그런데 화진이란 이름은 유구식 이름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름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조선식으로 지어봤습니다. 어떤가요?”
소녀, 화진은 활짝 웃었다. 살짝 까무잡잡한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보기 좋은 웃음에 신유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구 왕국의 왕족들이 여긴 어쩐 일이지?”
“당연히 명나라의 도독이신 신유성님께 인사를 드리려 왔습니다.”
“그 뿐인가?”
“그리고 여기 화진을 받아주십사 합니다.”
의외의 말에 신유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도독이란 것을 안다면 내 부인이 누군지도 알 텐데?”
“시녀로 쓰셔도 좋습니다. 편하실 대로 부리시면 됩니다.”
정략결혼도 아니고 그냥 연줄을 만들려는 것으로 보였다. 화진의 입장에선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님에도 웃음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미 다 얘기가 다 된 건가?’
슬쩍 켄을 바라보니 살짝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보고 신유성은 자신의 뜻에 반하면서 켄이 일을 진행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시녀라. 상의해보도록 하지.”
이야기를 들은 주녹정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처럼 지내도 좋다고 했으니 제 곁에 두죠.”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화진은 나진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쇼세이 왕의 둘째 왕자인 티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주군, 이제 해적 소탕은 유구 왕국에 맡겨도 될 정도입니다.”
“그렇게 강해졌나?”
“배를 좀 많이 팔아줬더니 강해졌습니다.”
“유구 왕이 배신할 가능성은?”
켄은 웃었다. 드러난 이빨은 늑대의 것처럼 빛났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주군에게 유구를 바칠 수 있을 테니까요.”
쇼세이 왕이 군대를 강화하는 동안 켄은 유구의 사람들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켄의 밑에서 싸운 유구 왕국 사람들 중 상당수가 켄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왕성에 가만히 있는 왕보다는 현장에서 함께 싸우는 켄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켄은 언제나 속이지 않고 약탈물을 배당했다. 또한 힘든 사정이 있는 자들을 세심하게 살피기까지 했다.
왕은 쇼세이지만 민심은 켄에게 점점 기울고 있었다.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유구가 제 것이 된다 해도 제 주군은 영원히 한 분 뿐입니다.”
“작은 유구보다는 더 큰 것을 가져야지.”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유구를 통하는 왜구 토벌은 유구 왕에게 맡기고 넌 이제부터 내 밑에서 함대를 지휘해라.”
“본격적으로 토벌을 하실 겁니까?”
“나에게 우호적인 영지는 내버려두고 적대적이라 생각되는 곳을 털면 된다. 일단 해안은 내버려두고 배부터 나포해와.”
“주군의 뜻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켄은 즐거웠다. 드디어 신유성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신유성은 왜구 토벌에 직접 나설 생각은 없었다. 아직 일본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세력이 너무 약했다. 더구나 감시하는 눈길도 있어서 전력을 다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배를 켄에게 넘겼다.
명나라의 사선이지만 배에 타는 병력은 전원 북해도 출신으로 채운 함대였다.
‘이렇게 하면 비밀을 좀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명나라에서 데려온 사람들은 계속 나진에 묶어두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일본의 수상세력과의 싸움은 신유성이 유리했다. 문제는 육지를 전부 아우를 수 있는 군대가 없다는 것 뿐.
‘함경도 전체를 갖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신유성은 자신이 뿌린 불씨가 잘 타오르고 있는지 닌자를 불러 확인에 들어갔다.
산으로 도망쳤던 임거정은 화전민들을 만났다.
“털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봐야 어차피 다 죽을 몸인데. 죽기 전에 배불리 먹어보자고.”
“어이구. 그러다 쫓기면 어쩌려고.”
“죽기 밖에 더 해?”
“됐네. 그냥 가.”
수탈을 피해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겠다고 도망친 터라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럼 지켜보기만 해. 내가 다 잡을 테니까. 수틀리면 도망치고.”
임거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몇몇 남자들이 임거정에게 합류했다. 싸우지는 않고 일이 잘 되면 털어가는 것만 도우면 되기 때문이었다.
겨울인 탓에 어둠이 빨리 내려앉았다. 산골의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삼켜졌다.
멀리서 사람이 다가와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자 임거정은 장정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의 중심에 있는 집은 꽤 컸다. 척 봐도 지역의 지주로 보였다.
임거정은 한 남자의 등을 밟고 올라가 안쪽을 살폈다. 모두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망 잘 봐.”
한 마딘 남기고 담을 넘은 임거정은 거침없이 안채로 향했다.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방 하나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애 만드느라 용쓰는 소리였다.
‘썩을.’
속으로 욕을 내뱉는 것과 달리 입은 웃고 있었다. 맹수가 이를 드러낸 것처럼.
조용히 문 앞에 서자 용쓰는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간다!’
심호흡 끝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놀라서 용쓰는 소리가 멈췄다.
“허억!”
놀라는 소리, 그리고 그림자를 따라 칼이 휘둘러졌다.
뒤를 잊는 비명. 허둥거림.
임거정은 칼을 몇 번 더 휘둘렀다. 이후 방 마다 돌아다니며 뛰쳐나오는 이들을 도륙했다.
하지만 한 방에서는 멈췄다.
방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쳇!”
이후 덤벼드는 하인들을 모조리 때려눕혔다.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슴 속에 뜨겁게 차오르는 분노는 아무리 날뛰어도 풀어지지 않았다.
결국 모두 때려눕혔다. 담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패거리는 덜덜 떨었다. 임거정의 몸놀림이 보통이 아닌 까닭이었다.
“들어와!”
임거정은 바로 곳간으로 향했다. 곳간은 정말 풍성했다.
“쌀만 빨리 챙겨!”
하지만 들고 갈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이고 아까워.”
“아까워하지 말고!”
엉덩이를 걷어차자 패거리는 얼른 쌀을 자루에 담아 하나씩 등에 지고 달렸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임거정은 불을 지를까 하다가 생각을 달리했다.
“나쁜 양반 놈이 죽었다! 다 가져 가라! 가져가는 놈이 임자다!”
사람들이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하자 임거정은 쌀을 지고 도망쳤다. 이에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오던 양민들은 양반집 상황을 보았다. 곳간이 열려 있었다.
‘지금이라면.’
뜯긴 것이 많은 이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
양민들은 서둘러 곳간을 털어갔다. 안에 사람들이 죽어 있었으나 알 바가 아니었다.
당장 겨울을 나는 것이 걱정인 판에 누가 누굴 걱정할까?
곳간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임거정의 행동으로 먹을 것을 상당히 얻게 된 패거리는 신이 났다. 그리고 임거정에게 철썩 붙었다.
“아이고. 이 형님이 어찌나 날쌘지. 그냥 범이라니까 범!”
“어흥! 하니까 싹 다 드러눕는데! 캬아!”
과장이 섞인 말들을 하며 패거리는 바람을 잡았다. 그러자 패거리가 좀 더 늘었다. 이후 임거정은 늘어난 패거리와 함께 움직였다.
소극적이던 패거리는 어느새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임거정은 항상 다 털어가지 않고 꼭 주변에 쌀을 비롯해 훔친 것을 뿌렸다.
“혼자 먹으면 채해.”
패거리도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이제는 임거정이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겨울이 깊어갔지만 산에서는 흥청거리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황해도 곳곳에서 양반들이 털리는 사건에 조정은 시끄러워졌다.
“허어! 말세군. 도적들이 날뛰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차질이 생겼다. 왜구를 토벌할 선박을 만들고 군사를 늘리려면 재정을 확보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한 데 돈이 들어가게 생겼다.
“아직도 못 잡았다고 합니까?”
“워낙 신출귀몰해서 어렵다고 합니다.”
대신들은 혀를 찼다. 임거정으로 인해 황해도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양반들은 어서 도적들을 토벌해달라며 하소연했다.
“불한당들의 정체는 알아냈답니까?”
“그게 아직 어렵다고 합니다.”
“허어. 놈들도 사람이니 어디선가 살 텐데. 아직 정체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게 탐문을 해도 사람들이 모른다고 합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사람들은 임거정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잡히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임거정이 한 번 뜨면 양반집 하나가 무너진다. 이때 잘하기만 하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죠. 어쨌거나 좀 더 두고 봅시다.”
“그냥 놔두자고요?”
“찾아다닌다고 잡히겠습니까? 함정을 파는 게 훨씬 낫겠죠.”
활동 반경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지주들을 비롯해 돈 좀 있는 이들에게 좀 더 경계를 할 것을 주문했다.
“중요한 것은 왜구 토벌입니다.”
왜구를 빨리 잡아야 신유성의 군대를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진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것을 보고 주녹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구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추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따뜻한 곳에서 살던 화진에게 나진의 겨울은 정말 무서웠다. 그리고 더 북쪽에 산다는 사람들은 그냥 괴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추워서 볼일을 보러 나가면 엉덩이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먹으면 볼일을 봐야했다. 볼일 볼 걸 생각하면 식욕이 떨어질 정도로 화진은 추위를 느꼈다.
“그럼 좀 더 따뜻하게 하고 있어라.”
“네.”
주녹정은 모피이불을 한 겹 더 두르는 화진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래서야 얼마나 버틸까?’
의외로 주녹정은 화진을 경계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신유성과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야 신유성이 좀 더 강해지니까.
‘혈연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더 큰 세력을 만들 수 있어.’
안락한 생활을 원했다면 벌써 항주로 떠났다. 하지만 주녹정이 원하는 것은 신유성과 함께 있는 것, 그리고 가정제에 대한 복수였다.
그래서 불편한 생활도 감내했다. 화진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화진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여서 안타까웠다.
‘인삼이라도 먹여야겠네.’
주녹정이 세심하게 보살펴주자 화진은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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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