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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63화 (6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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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거정

“호오? 그런 일을?”

건주여진의 한 축인 오도리족의 경쟁 부족인 탈알령족에서는 은밀한 만남이 이뤄졌다.

“해주신다면 비단 오백 필을 드리겠습니다.”

“좋아. 하지. 대신 만약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그땐 한양으로 쳐들어가겠다.”

“알겠습니다.”

윤원형이 보낸 사람이 돌아가고 탈알령의 족장은 아들, 니칸와일란을 불렀다.

“네가 해줄 일이 있다.”

“무슨 일인가요?”

“나진이란 곳을 약탈하는 일이다.”

“나진이라면 명나라 도독이 있는 곳 아닙니까?”

“그래. 위험한 일이지만 한다.”

“명나라에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건주여진의 영역은 명나라와 가까웠다.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시장에서 얻는 교역품은 건주여진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를 망치게 되면 주변 부족들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명나라에서 누가 거길 쳤는지 모르게 하면 된다. 입이 무거운 놈들로만 추려서 가면 돼.”

“그럼 명나라는요?”

“그 놈들은 우릴 오랑캐라고 부르는 놈들이다. 우리가 해도 싸우는 건 엉뚱한 놈하고 할 수 있지. 마침 계절도 겨울이고 하니 아주 딴 데로 가면 된다.”

노림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기오창가 그 놈의 기세가 요즘 심상치 않다. 명나라와 그 놈이 싸우게 하면 좋겠지.”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죠.”

니칸와일란은 전사들을 모았다. 그 수가 1천이었다.

추운 겨울. 강을 따라 움직이는 여진족이 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조선의 국경은 긴장에 휩싸였다.

“당장 알려라!”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여진족이 겨울이 되면 춥다고 내려와서 지내다가 돌아가는 일은 있어왔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여진족은 전부 기마 전사였다. 단순히 겨울을 나기 위해 왔다고 할 수 없었다.

보고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를 막기 위한 군대는 소집되지 않았다. 그저 현재 자리를 지키라는 말뿐.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허가 없이 군을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자칫하면 역모로 몰리기도 하니까.

니칸와일란은 1천 기병을 이끌고 움직였다. 그리고 회령에서부터 국경을 넘어 빠르게 전진했다.

“최대한 조용히 간다. 약탈은 나중에 돌아가면서 하자.”

목적을 이루는 것이 먼저. 나진에는 상당수의 군사가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니 기습을 해야만 했다. 준비할 시간을 줘선 안 된다.

하지만 니칸와일란은 몰랐다.

나진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방비는 어떤가?”

“완벽합니다. 보초병들은 모두 숙련된 사수들이 되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나진이 점점 커지자 장정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은 점점 공병이 아닌 정예병이 되길 원했다. 공병과 정예병의 대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정예병들은 공병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언젠가 목숨을 걸고 싸울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일본 출신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이 호승심에 불을 붙였다.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젊은 청년들이 대거 정규 병사가 되고 싶다고 신청했다. 신유성으로서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쇠뇌는 물론 검과 창을 쓰는 방법부터 언어와 그 외에 필요한 지식들이 교육되었다.

젊은 청년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은 자신이 병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은 진짜 병사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되고 싶어 했다.

병사가 되어 진짜 싸우고 싶었다. 신유성이란 존재를 위해 적과 싸우는 것을 꿈꾸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병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자율적으로 받았다.

나진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신유성이 보기에 숫자는 한참 모자랐다.

‘좀 더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 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죽으면 다시 병력을 채울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려면 필연적으로 원거리 무기를 더욱 많이 확보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포 만드는 기술은 충분히 확보가 되었다. 예전이라면 어려웠겠지만 명나라 도독이 되어 토벌을 진행하기 때문에 대포 관련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포는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광산을 개발한다고 하면 막겠지.’

아무리 명나라 도독이라도 광산 개발까지 마음대로 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빨리 아메리카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정말 모두가 깜짝 놀랄 짓을 마구 해줄 생각으로 가득했다.

니칸와일란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나진까지 왔다. 중간에 윤원형이 준비해둔 곳에서 보급까지 받아 말도 그렇고 전사들도 모두 쌩쌩했다.

“저기가 나진인가?”

활기가 넘치는 곳을 보자 니칸와일란의 피가 끓어올랐다. 털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저 정도면 좀 힘들지 않을까요?”

“빠르게 치고 나오면 된다.”

굳이 모두 잡을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죽이면 다들 숨거나 도망칠 것이라고 니칸와일란은 생각했다.

“그럼 약탈은?”

“적당히 들고 나와. 우린 돌아가면서 턴다.”

윤원형과 한 약속만 지키면 그만이었다. 이후 돌아가면서 약한 곳을 실컷 털어갈 생각이었다.

해가 지기 바로 직전. 니칸와일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적이다!”

감시탑에서는 말을 탄 기병들이 나타나자 바로 적의 출현을 알렸다. 다수의 기병이 달려오는 것은 이상한 일. 보초들 중에는 항상 북해도 출신의 정예 병사가 함께 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쟁을 통해 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북해도 출신 병사의 외침에 바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사격 준비!”

보초들이 준비하는 동안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휴식을 취하며 잡담하는 시간이 대기시간이었다. 하지만 외침을 들은 병사들은 바로 무기를 들고 달렸다.

나진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에 니칸와일란의 기병은 근처까지 도달했다.

‘공격해야 해!’

공격했다가 잘못되면 책임 문제로 번진다. 하지만 대규모 병력이 곧바로 돌격해오는 것은 착각하기에 딱 좋은 행동.

북해도 출신 병사는 바로 공격을 명했다. 신유성에게 보고하고 기다릴 틈 따윈 전혀 없었다.

“쏴!”

명령이 떨어지자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선두에서 달리던 여진 기병이 다수 쓰러졌다. 말도 몇 마리 쓰러졌다.

화살에 맞은 말은 바로 죽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자 뒤를 따르던 이들은 위험에 처했다. 이에 잽싸게 피해가려 했지만 기병 몇 명이 휩쓸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하지만 여진 기병의 기세가 크게 줄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다.

“하앗!”

나진의 주변에 목책을 세우긴 했지만 완벽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취약지점인 곳을 노려서 왔기 때문에 쇠뇌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외부에 알려졌던 취약 지점은 사실 함정이었다.

취약지점은 신유성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쏴!”

어느새 모여든 철포병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일제 사격에 선두열이 쓰러졌다. 그 사이 2열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3열이.

철포병들은 북해도에서 훈련받았지만 나진에서 대기하며 토벌에 참가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바다로 나가지 않고 교대로 나갔다. 그렇기에 나진에는 비상시에 철포병을 운용할 수 있었다.

“당겨!”

여진 기병이 거의 도착한 순간, 밧줄이 당겨졌다. 그리 튼튼한 밧줄은 아니었지만 장치를 통해 당겨진 밧줄은 말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또 다시 선두가 무너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당수가 넘어졌기에 후열이 피해가거나 하지도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쏴!”

잠시 지체된 사이. 어느새 모여든 나진 사람들이 쇠뇌를 쏘았다.

수많은 이들이 쇠뇌를 쏘자 니칸와일란도 겁을 먹었다.

‘젠장 여긴 뭐야?’

“돌아간다!”

돌격이 실패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전투를 치를 순 없었다.

니칸와일란은 신유성의 얼굴도 구경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추격 할까요?”

멀리서 지켜보던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대신 죽은 말들은 도축해서 나눠 먹으라고 하고 살아있는 놈은 잡아서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도록. 그리고 공격 명령을 내린 병사에게 상을 내려라. 위험한 순간에 적절한 판단이었다.”

정말 큰일을 해낸 것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있고 공격에 대비했다고 해도 판단이 늦어지면 모두 허사였다.

만약 병사가 적의 접근에 이상을 느끼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신유성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면 기병을 적절히 막기는 어려웠다.

나진 내부로 들어온 뒤에는 그야말로 기병들에게 유린당했을 것이다.

“앞으로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다른 병사들에게도 주저하지 말고 공격하라고 전해라.”

공격 의사가 없다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은 해선 안 될 행위였다.

‘아, 이런 부분도 좀 더 신경 써야 하는구나.’

신유성은 고민했다.

너무 자율권을 주면 제멋대로 굴면서 피곤한 일을 잔뜩 만들지만 너무 명령에만 충실하게 만들면 조직은 경직되고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그냥 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결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권력을 주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신페이와 켄이 신유성에게 충성하고 있기에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지만 조직이 점점 크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어디 믿을 만한 사람 또 없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니칸와일란은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국경을 넘기 위해 북쪽으로 향하면서 보이는 마을은 잔뜩 약탈했다.

“이대로 가면 곧 국경입니다.”

남은 수는 600. 거의 반에 가깝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었다.

‘제기랄. 이대로는 좋지 않아.’

400명이나 죽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게 되면 정말 좋지 않았다. 차기 족장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었다.

크게 패배했으니 분명 자리를 노리는 녀석들이 덤벼드는 모습이 금방 떠올랐다.

“서쪽으로 간다.”

“괜찮겠습니까? 그쪽으로 가면 약속과는 다릅니다.”

“이대로 돌아가자고? 400이나 죽었는데?”

전사들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동료가 많이 죽었다. 상대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솔직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언제는 안 위험했나?”

니칸와일란은 먼저 방향을 틀었다. 나머지 전사들은 조용히 니칸와일란을 따라 달렸다.

니칸와일란과 여진 기병은 평안도를 휩쓸기 시작했다.

“뭐라고? 여진이 나타나?”

“네! 예전에 국경 근처에 나타났던 녀석들 같습니다!”

“얼른 병사를 보내! 잡아야 한다!”

임거정을 잡기 위해 움직이던 관군은 여진 기병이 나타났다는 말에 서둘러 방향을 바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돌이 일어났다.

관군은 약탈을 하던 니칸와일란을 덮치려 했다.

“죽여!”

허나, 이미 독이 오른 여진 기병을 막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더구나 수도 많지 않고 보병이었던 점이 문제였다.

여진 기병들은 무자비하게 관군까지 유린했다. 조선 기병이었다면 반대로 당했겠지만 도적들을 상대하려고 모였던 관군들이라 무장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관군들은 패해서 물러났다. 이후, 니칸와일란은 계속 약탈을 하며 움직였다.

토벌을 하기 위해 다가오던 관군이 갑자기 사라지자 임거정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니칸와일란이 한바탕 휘저어준 덕분에 움직임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는 잠깐이었다.

‘여기서는 더 못 버티겠군.’

다시 황해도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었으나 내키지 않았다. 떠나온 지 얼마 안 된 탓이었다. 그렇다고 평안도에서 털고 다니는 것도 불편했다. 여진족에 털린 탓이었다.

‘어떻게 한다?’

밑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산적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들을 만족시키려면 또 어딘가 털어야만 했다.

‘함경도로 가볼까?’

문득 임거정의 뇌리에 함경도가 떠올랐다.

맹수와 부하들은 먼 길을 돌아 함경도 나진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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