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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거정
나진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이제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좋은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고. 이번에는 또 어떤 녀석들이려나?”
노인들은 새로 들어오는 이들을 날카롭게 살폈다.
나진에 들어와서 편히 놀고먹으려고 하는 자들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노인들은 이런 자들의 꼴을 볼 수 없었다.
“게으른 놈들이면 그나마 낫지. 문제는 나쁜 놈들이야.”
가끔 죄를 저지른 죄인들도 나진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뉘었다. 죄를 지은 사실을 숨기고 조용히 지내는 이들과 죄를 지은 사실은 까맣게 잊고 버릇이 나오는 부류로.
“그런 놈들은 잡아 족쳐야지!”
용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유성의 호의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에 들어온 이들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임거정을 비롯한 몇 명의 남자가 나진에 들어선 것이었다.
이름을 명부에 적고 주의사항을 들은 이들은 무사히 통과했다.
“이거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공병이라는 병사가 되었다. 잠시 지내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나가려는 계획을 품고 임거정을 비롯한 이들은 나진에 들어왔다. 소문대로 나진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병사가 되자 모피로 만든 털옷이 한 벌씩 주어졌다. 또한 때가 되면 밥이 나왔다.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긴 했지만 죽을 정도로 힘들거나 한 일은 없었다.
“밥이 참 맛있네요.”
맛있는 밥에 따뜻한 잠자리.
산속에서 살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도적질을 하게 되면서 먹는 것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됐었으나 잠자리만큼은 그리 좋다고 하긴 어려웠다. 더구나 언제 쫓길지 모르니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진에 들어오니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아아, 여기서 나가기 싫네.”
“그래도 병사로 싸우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땐 그때고.”
임거정은 풀어지는 부하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몇몇은 정말 떠나기 싫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노골적으로 남겠다며 배신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도적이었다는 것이 들키면 쫓겨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배신에 불만을 품고 떠나면서 정체를 밝히기라도 한다면 모두 허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땐 나진에도 남지 못하고 원래 함께했던 무리에도 합류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나올까 두려워서였다.
부하들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보며 임거정은 고민했다.
‘그냥 눌러앉을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산적질은 계속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결국 죽게 된다. 비참한 최후를 피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재물을 챙겨 다른 나라로 도망치거나 잠적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는 길밖에 없었다.
임거정에게는 모두 그다지 내키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안정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어차피 혼자일 뿐이었다.
반면 산적질을 하면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만두지 못하겠단 말이지.’
하지만 혼자만의 욕심으로 부하들을 계속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임거정은 갈등을 느꼈다.
‘그런데 신유성이란 놈은 어떤 녀석이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명나라 도독이라고 하는 신유성에 대한 것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물어보지 않아도 찬양하면서 신유성에 대한 믿음을 심으려고까지 했다.
‘진짜 역관의 자식인가?’
역관의 자식은 양반은 아니다. 하지만 임거정에겐 역관도 양반과 비슷했다. 역관치고 못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이는 어리다고 하던데.’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뿐이었다.
3살 때 사서삼경을 암기하고 검술에도 재능이 있으며 어릴 때 일본으로 넘어가 왜구를 토벌하고 명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임거정은 불편함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찌 이리 많은 거야?’
얘기만 들어보면 신처럼 모시려는 사람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심한 임거정은 쉽게 믿지 않았다.
‘정말 뛰어난지는 직접 봐야 알지.’
호기심이 생긴 임거정은 신유성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거 저놈 수상하지 않아?”
“그러게. 왜 자꾸 도독나리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저 놈도 간자 아닐까?”
임거정은 노인들에게 딱 걸렸다. 나진의 노인들은 나진 내부 이곳저곳에 쫙 퍼져있었다. 때로는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냥 보면 노인들끼리 모여서 잡담하거나 심심해서 돌아다니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 놈은 위험해. 알려야 해.”
임거정의 덩치는 꽤 컸다. 척 봐도 힘이 장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훈련을 받을 때나 일을 할 때 두 사람 몫은 간단히 해냈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니 수상해 보였다. 그런데 신유성의 거처를 알짱거리니 노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따라와.”
나선 것은 닌자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유성의 근처를 알짱거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닌자들에게 있어 신유성은 목숨을 던져서라도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신유성이 무너지면 북해도는 물론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북해도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가족들의 삶도 무너지고 더 나아가 자신들이 꿈꾸던 닌자들도 대접받는 세상도 무너진다.
여차하면 검을 뽑을 기세.
가까운 거리에서 포위당하니 임거정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상황도 아니기에 결국 요구에 응했다.
“왜 거기 있었지?”
“도독나리를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왜?”
“정말 소문처럼 대단하신 분인지 궁금해서요.”
“그런가? 그런데 여기 오기 전에 뭘 했었지?”
“백정이었습니다.”
취조가 이어졌다. 닌자들은 고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말 아무런 죄도 없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런데 무슨 죄를 저질렀던 건가? 백정이면 먹고 살만 할 텐데?”
“그냥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바로 답하려다보니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거짓말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얘기해라.”
잠시 머뭇거리던 임거정은 결국 실토했다. 양반을 때려눕히고 도망쳤다. 대신 산적질 한 이야기는 쏙 빼버렸다.
“그래?”
질문을 하던 닌자는 더 질문하지 않고 물러났다.
“어쨌든 네 행동이 수상했던 것은 사실이다. 잠시 신원을 파악할 때까진 기다려라.”
임거정은 감금당했다.
“또 간자를 잡았다고 들었는데.”
“네, 도독님의 거처를 기웃거리던 녀석이었습니다.”
“뭐라고 변명하던가?”
“도독님을 한 번 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군.”
신유성은 여느 때와 같이 처리될 일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일은 신유성이 생각한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임거정과 함께 왔던 이들과 시간차를 두고 나진에 합류했던 부하들이 임거정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부하들이 구하러 왔다.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임거정은 탈출하지 못했다.
나진의 주민들 전체가 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꼬마까지 창을 쥐고 길을 막아설 정도였다.
어른들은 남녀 구분 없이 쇠뇌를 들고 겨눴다.
도망치려다 포위당한 임거정의 무리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한 이유는 단순했다.
살고 싶어서.
반항해도 소용없는 상황이니 임거정의 부하들은 항복했다.
임거정은 가장 마지막에 무기를 버렸다.
“이제보니 다들 한 패였군.”
닌자들은 임거정 패거리를 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서 구금했다. 일단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외의 사실이 신유성에게 전해졌다.
“그들이 조정에서 쫓던 자들이라고?”
“네, 황해도에서 시작해 평안도를 거쳐 나진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유는?”
“여진 기병들이 평안도를 들쑤신 일 때문에 잠시 조용히 지내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거짓일 가능성은?”
“모릅니다. 단체로 같은 대답을 하도록 교육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극히 낮은 가능성이었다. 간자들이 단체로 도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도록 교육 받아봐야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거정이라고?’
처음으로 임거정의 이름을 들은 신유성은 뭔가 익숙함을 느꼈다.
‘임거정이라...... 아! 혹시 임꺽정?’
조선 3대 도둑 중 한 명이 바로 임꺽정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홍길동이었지만 임꺽정도 꽤 유명했기에 신유성도 알고 있었다.
“한 번 봐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성은 임거정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신유성?’
신유성을 본 임거정은 꽤 놀랐다. 신유성은 나이답지 않게 덩치가 큰 것이 어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이를 속였나?’
그러나 몸은 커도 얼굴은 상당히 어려 보였다. 그래서 마냥 의심만 할 순 없었다.
한편, 신유성도 임거정을 보며 감탄했다.
‘나이가 많다던데. 상당한 몸이군.’
임거정의 몸은 마치 짐승 같았다. 단단한 근육들이 옷 밖으로 드러났다. 잡혀있음에도 죽지 않은 눈은 맹수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임거정이 맞나?”
“맞다.”
고압적인 신유성의 말투에 임거정은 강하게 맞받아쳤다.
“이 놈이?”
“됐다.”
부하가 나서려는 것을 막은 신유성은 임거정과 거리를 좁혔다.
“왜 날 보려고 했던 거지?”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그래? 그럼 묻지. 살고 싶나?”
“별로. 하지만 부하들은 살려줬으면 좋겠다.”
이미 삶을 포기한 임거정에게 남은 미련이라면 좀 더 많은 양반을 털어먹지 못했다는 것 정도였다.
호기심 때문에 죽게 생겼으나 임거정은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죽이긴 아깝네.’
죽음에 미련을 갖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살려줄 순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임거정과 그의 부하들은 나진의 기강을 흩트렸다.
이는 처벌 없이 그냥 넘어가긴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특혜를 베푸는 순간 누군가는 불만을 품게 될 테니까.
“그럼 부하들을 한 번 봐야겠군.”
신유성은 임거정의 부하들을 공터에 모아놓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임거정을 끌고 공터로 향했다.
묶여있는 임거정이 신유성의 잡은 줄 때문에 마치 목줄을 한 개처럼 보였다. 이를 본 임거정의 부하들은 화를 냈다. 하지만 몇몇은 신유성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의 두목인 임거정은 너희들을 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난 너희들을 못 믿겠다. 너희들은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다. 그리고 나진에 와서도 죄를 다시 지으려고 했다.”
곧 죽일 것처럼 이야기하자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불안이 감돌았다.
“하지만 기회를 주지. 임거정.”
“말해라.”
“네 남은 인생을 나에게 바쳐라.”
“뭐?”
“그렇게 한다면 네 부하들의 목숨만큼은 당장 취하지 않는다.”
살려준다는 말과는 달랐다. 당장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왜 그런 약속을 하는 거지?”
“사람이 필요하니까.”
실제로 신유성은 인재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임거정을 신뢰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용하게 쓸 방법은 하나 알고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는 건가?”
“하겠다면 무사로 만들어주지.”
“무사?”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들으면 된다. 하지만 죽고 싶다면 설명 따윌 들을 필요는 없지 않나?”
잠시 생각하던 임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뜻을, 아니 도독나리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임거정은 묶인 상태로 머리를 숙였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숙였다. 이러한 모습에 임거정의 부하들은 감동하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신유성이 더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좋다. 그러면 넌 이제부터 네 부하들과 함께 왜로 가서 왜구토벌에 앞장서줘야겠다.”
신유성이 임거정에게 내린 벌은 백의종군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