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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마포.
이지함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거리를 지나면서 만나게 되는 행인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했다. 토정은 그런 이들의 인사에 간단하게 화답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은 박지화의 집이었다.
이지함과 박지화의 인연은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화담 서경덕으로 인해 이어졌다.
이지함은 어려서 서경덕에게 글을 배웠고 박지화는 서경덕의 제자였다.
다른 점이라면 이지함은 출사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 박지화는 서자였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박지화가 학문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형님! 있습니까?”
“거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이지함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답하는 목소리는 좀 신경질적이었다.
“내 갈 곳이 있어 그러니 잠시 집 좀 부탁합니다!”
“또 어디를 가려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이지함이었다. 출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벼슬을 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한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서경덕에게 배운 바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골몰하던 이지함은 장사를 하기도 했고 의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나진에 가보려고요.”
“나진? 설마?”
“그래, 한 번 만나볼 생각입니다.”
“조심하게나. 야인들이 출몰할지도 모르니까.”
“그럼 갑니다!”
박지화에게 말을 한 이지함은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이지함의 등을 바라보던 박지화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집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소년이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그나저나 책은 다 읽었느냐?”
“예.”
“그럼 오늘은 침술에 대해 가르쳐주마.”
박지화의 지도 아래 의술을 익히는 소년의 이름은 허준이었다.
한양에서 나진까지. 이지함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 보게 된 백성들의 생활에 가슴이 아팠다.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힘들어지는데 양반이란 자들이.’
학문을 백날 익혀 머리에 먹물이 들면 뭐하겠는가? 실천을 하지 않는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자들보다 수탈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특히 윤원형 같은 간신에게 붙어 세를 불리기도 했다. 자신들의 힘을 믿고 날뛰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기근이 또 다시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먼저 죽어가는 것은 아래에 있는 백성들부터였다.
양반과 왕족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나라가 망할 때나 일어날 일.
‘그가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이지함이 나진으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신유성이 나진에서 하는 일을 확인해보려는 것이었다. 정말 소문대로 나진에 모인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지 궁금했다.
‘효웅인가? 아니면 제왕인가?’
이지함은 의문을 품고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더 서둘러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거정은?”
“잘 하고 있습니다.”
임거정은 부하들과 함께 요시시게에게 보내졌다. 요시시게 휘하에서 싸우게 한 것. 처음에는 다른 영지의 약탈에 참여했다. 여기서 임거정과 부하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산적은 순식간에 해적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들은 배당을 받지는 못했다. 백의종군이란 벌을 받고 있었으니까. 이 때문에 다른 이들이 임거정을 쉽게 받아들였다.
뛰어난 활약을 하는데도 배당을 안 받으니까. 같이 있으면 편히 더 번다. 얄팍한 심리이긴 했으나 이것이 먹혀들어 임거정과 부하들은 쉽게 적응했다. 최소한 적대적인 분위기보다는 훨씬 나았다.
“좋군.”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 임거정과 그 부하들도 뭐라고 하진 못했다. 임거정의 경우에는 재물에 별 관심은 없었다. 다만 열심히 싸워서 부하들을 최대한 많이 살리려고 노력했다.
반면, 부하들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보고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점점 신유성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화약은?”
“순조롭게 생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들어온 보고는 북해도 화약 생산이었다. 철포와 더불어 화약 생산시설까지 북해도에 만들었다.
‘이제는 남만 상인들에게 화약을 살 필요가 없지만.......’
하지만 그래도 화약은 계속 사야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화약을 사지도 않는데 끊임없이 화약이 나온다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명나라에서도 조금씩 사들이고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 양쪽에서 화약 제조 기술을 입수했기에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큐슈에서 나오는 유황까지 있어 더욱 쉬웠다.
‘대포만 나오면!’
그렇다면 바다에서 유럽인들과 한 바탕 할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진다. 신유성이 선박을 많이 만들 수 있으면서도 필리핀을 통해 인도로 진출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대포 때문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을 상대할 때는 현재 있는 선박만으로 충분하지만 유럽 함선은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하려면 최소한 무장이 비슷해야 했다.
“좋아. 더 보고할 건 없는 건가?”
“아, 하나 있습니다.”
“뭔가?”
“이지함이란 남자가 꼭 뵈어야겠다고 했습니다.”
“날 보자고?”
‘이지함?’
익숙한 이름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설마? 그 사람? 에이 아니겠지.’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보통은 아무나 만나주지 않은 신유성이었다. 만나고 싶다는 사람은 널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다 만나고 다니면 피곤했다.
“뭐하는 사람이던가?”
“의술을 좀 안다고 했습니다.”
“그럼 특별히 보도록 하지.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이유를 붙여야만 했다. 누구는 만나주고 누구는 안 만나주면 불공평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일정한 조건에 따라 만나주면 거기에 맞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든다.
그래서 신유성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만난다고 했다. 그래야 편해지니까.
‘이렇게 하면 단순 변덕으로 생각하겠지.’
이것이 중요했다.
어쨌거나 잠시 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이지함은 신유성에게 존대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신유성은 명나라 황제가 임명한 정1품 도독이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하대할 순 없었다.
반면 신유성은 이지함에게 하대하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무슨 생각으로 백성들을 군사로 만들었는지 궁금하여 찾아왔습니다.”
“그게 왜 궁금한가?”
이지함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의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부디 백성들을 살펴주십시오. 힘없는 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걸 알아서 어쩔 생각이신가?”
“그건 대답을 듣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신유성은 단순히 진짜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운수 하면 토정비결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이지함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겼다.
“그대가 보기에 내 앞날은 어떨 거 같나?”
뜬금없는 질문에 이지함은 대답을 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허나 이내 대답을 했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흐음?”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이지함의 입장에선 신유성이 왕이 될 수도 있단 소릴 함부로 내뱉을 순 없었다. 잘못 알려지면 이지함이 역모로 잡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알았다. 그럼 대답해주지. 나진의 사람들을 모두 명나라 병사로 만든 이유는 그들이 도움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잘 모르는 그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놔야 할 이유는 없다.”
이지함은 신유성의 말을 이해했다. 약간 아쉬웠으나 이 정도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들을 어쩌실 셈이십니까? 전쟁터로 몰아넣으실 겁니까?”
“그건 아니다.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단, 스스로 원해서 싸우겠다고 나서는 이들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이제 답은 되었나?”
“감사합니다.”
“그럼 감사의 의미로 여기서 일 좀 하고 돌아가도록.”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신유성은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점을 안 봐줬단 말이야. 내가 아는 그 이지함이 아닌가보네.’
미래의 기억에는 이지함은 뭐든 다 알아맞히는 기인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이지함은 병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진에서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 적당히 봐주다가 떠나라는 이야기에 이지함은 일단 일에 착수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있는 나진에는 아픈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못 먹고 못 살던 사람들이 한 겨울에도 나진을 찾아 움직였다가 병에 걸리기도 했다. 훈련을 받다가 다치기도 했고 일을 하다가 다치는 일도 있었다.
이지함은 묵묵히 이들을 돌보며 나진을 더욱 살폈다.
사람들은 정말 행복해보였다. 배고픔을 잊고 다들 잘 먹고 잘 살았다. 아픈 병자는 의원과 함께 의술을 배우는 이들이 돌보았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창고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고에 넣을 식량을 가져오는 배.
‘교역을 하고 있는 건가?’
조선에선 교역이 어려웠다. 상행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가장 천한 행위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지함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천하긴 무슨. 먹을 게 없으면 바꿔먹기라도 해야지.’
조금만 신경 쓰면 온 백성이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다. 백성들의 삶이 팍팍하고 힘든 이유는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해당 지역에서 자급자족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상인들이 있긴 하지만 길이 험해서 많지도 않았다.
이지함은 이것이 불만이었다.
농사를 중요시 여기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더 아래에 두고 천하게 여기는 행위를 그다지 좋게 볼 수만은 없었다.
‘명나라 도독이니 자유롭구나.’
힘이 있는 자가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상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진은 수탈을 당하지도 않고 있고 굶주리지도 않고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이지함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분명 세력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왕이 될지도 모르겠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조선 사람으로서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이 살짝 스며들었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신유성이라면 어쩌면 원하는 세상을 열 수 있게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는 성군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주고받는 것은 확실한 사람.’
이것이 신유성에 대한 이지함의 평가였다.
그다지 좋은 평가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나쁘다고만 하기도 어려웠다.
이지함은 신유성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봄이 왔으니 일을 해야 했다. 농사의 시작. 신유성은 나진 인근을 개척하게 했다. 또 다시 여진족이 쳐들어온다면 다 망칠 수도 있으나 그래도 식량을 어느 정도 자급하긴 해야 했다.
‘감자가 딱 좋은데.’
하지만 감자는 아메리카에 있었다. 가서 가져오려면 상당히 긴 시간을 항해해야만 했다. 아니, 지금 수준으로는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을지도 장담을 못했다.
‘아깝다. 아까워.’
감자만 있다면 맛있는 것을 잔뜩 해먹을 수 있었다. 특히 감자칩. 신유성은 문득 감자칩이 먹고 싶어졌다.
‘감자만 있으면!’
소금이나 기름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자가 없어서 감자칩을 먹을 수 없었다.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세상을 바꿔야 해.’
이지함이 알았다면 웃을 일이었다. 허나 신유성은 이지함과 만남 이후 관심을 끊었기에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다.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게 한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순찰을 늘리도록. 절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선 안 된다.”
신유성의 명령에 나진은 봄을 맞아 더욱 활기차게 움직였다.
한편, 이지함은 신유성의 명령을 전해 듣고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목적이 있지만 그래도 함부로 하지는 않는구나.’
조선의 상황과 자꾸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대한 원망이 컸다.
‘사리사욕을 위해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다니.’
사람인 이상 욕심이 있는 것을 이지함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예외였다.
욕심이 너무 많았다. 조금만 사정을 봐줘도 될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도독이 아니었다면 수탈이 덜 했을 수도 있겠지만.’
딱 그 정도뿐이었다. 어차피 왜구가 쳐들어오면 수군을 늘려야 했다. 신유성이 아니었어도 수탈은 일어날 일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가능할까?’
이지함은 신유성이라면 원하는 세상을 여는데 함께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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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