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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서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날이 지날수록 나진에서 이지함의 인기는 높아져갔다. 아플 때 척척 치료를 해주니 사람들의 인심이 이지함에게 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일은 신유성에게 전해졌다.
“어쩌면 그가 공병들을 움직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해.”
“네?”
신유성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 정도에 날 배신할 정도라면 언제든지 배신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계속 먹여 살릴 이유는 내게 없다.”
강하게 나가긴 했지만 신유성에겐 속셈이 있었다. 사람들이 이지함을 칭송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지함은 신유성이 될 수 없었다.
이지함에게는 나진 사람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유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지함의 의술이 꽤 높다는 것에 주목했다.
‘필요한 인재일지도.’
토정 이지함이란 것은 오해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의술이 뛰어난 것은 알아보았다. 현재 명나라의 의서는 물론 조선의 의서도 모아서 의원이 될 사람들을 양성하고 의원들도 돈으로 구워삶아 모았지만 의술이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뛰어난 의술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지함에게 관심이 생겼다.
‘한 번 봐야겠네.’
이제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듣자하니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해서.”
“의술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있지. 난 오래 살고 싶으니까.”
이지함은 웃고 말았다. 웃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14살이 된 새파랗게 젊은 신유성이 오래 살고 싶다고 하니까 그냥 웃겼다.
“아직 살날이 많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위험한 것이 너무 많다. 특히 병은 가장 무섭지. 도둑이나 적은 베어버리면 되지만 병에 걸리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병에 걸리면 의원을 부르시면 되는 일 아니십니까?”
“의원도 못 고치는 병이 많지 않나? 그러니 못 고치는 병을 고치려면 의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방법을 찾아야지.”
‘왕들과 같군.’
이지함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신유성을 평가했다. 많은 왕들은 의술에 관심을 가졌다. 이유는 백성을 살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지함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치료법이 생긴다면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저는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쓸 뿐입니다.”
신유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 채고 미연에 방지하고자 슬쩍 거절의 말을 하는 이지함이었다. 허나, 신유성은 그냥 포기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네?”
“뭘 해주면 날 위해 일할 것인지 묻고 있다.”
노골적이었다. 솔직했다. 이지함에겐 이런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소인이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싶다고 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흠,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는 것은 당장은 힘들다.”
“그럼 아픈 사람들에게 의술을 펼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야 막지 않는다. 하지만 나하고 병사들이 쓸 약재 정도는 남겨놔야 한다.”
‘으음.......’
이지함은 살짝 갈등했다. 거의 반은 장난처럼 말을 하고 있었는데 진지한 신유성의 모습을 보니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만약에 백성들을 더 보살피라고 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네가 해라. 그 정도 권한은 주겠다.”
“네?”
“날 돕는다면 나진을 네게 맡기겠다.”
쿵. 이지함의 가슴에 충격이 밀려왔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에게 나진은 하나의 거점에 불과했다.
의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나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지함에게 맡길 수 있었다. 이지함에게 맡긴다고 그것이 신유성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참말이십니까?”
“그렇다. 하지만 내가 떠난 뒤에는 보장은 못한다.”
“그럼 받아들인 백성들은 어쩌실 겁니까?”
“나와 함께 가겠다고 하면 데리고 간다. 하지만 남겠다고 한다면 조선의 사람으로 남게 되겠지.”
“으음.”
이번에는 신유성의 시험이었다. 이지함이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조선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내 편이 될 것인가?’
입으로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말로 일일이 확인한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치 않는 것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마음을 정하는 것.
“저는 요구하는 게 많을 겁니다. 들어주지 않으면 떠날 겁니다.”
“뜻이 다르면 길이 다른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갈림길까지는 같이 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이지함은 계산해보았다. 조선 사람으로 남아 백성들을 돌보는 것과 신유성과 함께 하며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아무래도........’
이지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하는 결정이 올바른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언제까지 결정하면 됩니까?”
“기다리겠다.”
“그럼 잠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신유성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만약 신유성이 계속 성공해 정말 왕이라도 된다면 이지함이 할 수 있는 일도 그만큼 더 많아질 터.
그러나 좋은 제안이라고 넙죽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형님과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조선은 연좌제의 나라.
이지함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행여나 조카가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 주저하게 되었다.
집에 도착한 이지함은 바로 형, 이지번을 찾았다.
“형님, 드릴 말이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이지함은 나진에 대한 것부터 신유성에 대한 것을 모두 얘기했다.
“그러니까 도독나리와 함께 하고 싶다는 거냐?”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죠. 하지만 산해의 앞길까지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음.......”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정이 돌아가는 일쯤은 알 수 있었다. 윤원형이 무리해서 왜구토벌을 위한 수군 양성에 들어간 이유는 신유성 때문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선 신유성은 눈엣가시.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유성과 이어진다면 벼슬길은 막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다고 해도 뽑아주지 않을 공산이 컸다.
이지함은 벼슬을 하는 것에 염증을 느껴 그만두었지만 조카인 이산해마저 같은 길을 걷게 할 순 없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산해는 벌써 향시에 장원하기도 했다. 이미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지함은 함부로 신유성의 밑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나진을 살펴보는 것과 신유성과 손을 잡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 얘긴 산해를 불러서 해야겠구나.”
잠시 뒤, 이산해가 들어섰다. 설명을 모두 들은 이산해는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뜻에 따르겠습니다.”
“벼슬에 미련은 없느냐?”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도독나리는 저보다 한 살 어린 분이시죠. 그런데 벌써 그런 업적을 이뤘으니 솔직히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산해는 신유성이 궁금했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신유성 또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하지만 양반들 사이에서는 신유성보다 이산해가 더 이름을 날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산해의 집안이 더 뼈대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산해는 명성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언젠가 신유성과 만날 수 있기를 고대했다. 꽤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신유성의 생각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앞날이 만족스러우면 후회는 없고 불만이면 생기는 게 후회지 않습니까? 오늘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살 생각입니다.”
“고맙다.”
“별 말씀을요. 참, 가실 때는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요.”
“알았다.”
이산해가 나가고 나자 이지번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어땠느냐? 진짜 말한 것을 이룰 힘은 있어 보였더냐?”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조선의 어느 누구도 모를 비밀을 품고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들을 이뤘겠습니까?”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쩌면 생각하던 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알았다. 나도 준비 하마.”
이지번은 결국 승낙했다. 자식의 벼슬길이 막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현재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잘 해봐야 윤원형 밑에서 지내게 될 것이 훤했다. 잘못하면 옳지 않은 일을 강요받을 수도 있었다.
인종 사후, 윤씨와 얽히는 것을 꺼리던 이지번에게 조정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며칠 후, 박지화는 이지함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곳은 어찌하고?”
“그야 형님이 맡아주셔야죠.”
“아이고. 내가 어떻게 다 돌보냐. 네가 해야지.”
“형님과 준이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준이가 영특해서 한 사람 몫은 능히 해낼 것 같던데.”
“으음.......”
박지화는 못 이기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네. 그럼 알아서 해라. 여긴 내가 맡을 테니.”
“죄송하게 됐습니다.”
“죄송하면 나중에 약재나 더 보내고.”
“그야 이를 말입니까?”
이지함은 환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허준이 집에 돌아왔다.
“갔던 일은 잘 했느냐?”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그런다.”
박지화는 이지함이 나진으로 갈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허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해도 가는 겁니까?”
“그런다고 하더라.”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산해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다만 허준은 한 때 이산해를 경쟁상대로 여긴 적은 있었다.
허준 또한 상당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아무리 공부해도 서자이기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공부에 흥미를 잃었었다.
매일 공부해도 그것을 정작 써볼 기회를 잡을 수 없다면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박지화는 의술을 권했다.
벼슬을 하면 백성을 보살피는 일을 하게 되지만 의술을 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다시금 힘을 얻은 것이었다. 이후, 허준은 학문에 전념했다.
의원이 되는 것은 서자도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능력이 있으면 잡과에 응시해 훗날 어의까지 노려볼 수도 있었다.
“저도 갈 수 있을까요?”
허준은 이산해가 간다고 하니 따라가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멋대로 경쟁상대로 삼았던 이산해가 홀로 멀리 가버린다니 뭔가 가슴에 맺힌 것이 다시 느껴졌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느낌이었다.
“의술은 여기서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지 않겠느냐?”
박지화는 만류했다. 허준이 품은 감정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도독과 만나게 되면 의술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산해를 학문으로 이길 순 없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학문에 매진해왔지만 허준은 중간에 의술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동이었던 이산해를 따라잡으려면 더 많은 시간을 노력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허준에게 독이 될 수도 있는 일.
‘미안하구나.’
제자의 뜻을 꺾는 것이 미안했지만 박지화는 이것이 허준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허준은 박지화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나진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편했다.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로 간 뒤 그곳에서 나진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제는 신유성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한 터라 윤원형을 비롯한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지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함은 다시 신유성과 마주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날 때는 곁에 이지번과 이산해도 함께였다.
“혼자 가더니 셋으로 불어났군.”
“형님과 조카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곳의 책임자는 이제 너다.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자 이지함은 고개를 저었다.
“외람되오나 이곳의 책임자를 형님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토정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나는 좀 쉬어야겠다.”
신유성은 정말 약속대로 모든 것을 이지함에게 맡겨버렸다.
“통이 큰 건지. 배포가 남다르구나.”
잘 알지도 못할 텐데 덜컥 나진을 맡기는 행동에 이지번은 감격했다. 이지함이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정말 대단하네요.”
이산해 또한 눈을 빛냈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신유성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살펴보고 싶어 흥분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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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