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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신유성은 갑자기 한가해졌다. 대부분의 일을 이지번과 이지함에게 맡긴 덕분이었다.
이지번과 이지함의 업무처리 능력은 신유성을 간단하게 능가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단숨에 업무를 파악했다. 그리고 신유성의 의향을 거르지 않는 선에서 나진을 발전시켰다. 일의 효율성도 더욱 올라갔다. 덕분에 신유성은 군사 부분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후지바야시 켄을 비롯해 다른 이들이 도맡은 상황이라 신유성이 직접 나설 일은 별로 없었다.
한 마디로 시간이 남아돌았다.
‘좋구나.’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하루는 좋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신유성은 금방 지루함을 느꼈다.
‘근질근질하네.’
뭔가 할 일을 찾고 싶었으나 나진에 손을 댈 순 없었다. 맡기겠다고 했는데 직접 나서면 맡긴 것이 아니게 되니까.
‘약속은 지켜야지.’
그래야 신뢰가 깊어진다. 하지만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셨다.
병사들이 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무장. 그냥 빈 공터에 불과했으나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 있으니 범상치 않은 장소처럼 보였다.
병사들은 구호에 맞춰 창을 내지르는 연습을 했다. 또한 흩어졌다 다시 줄을 서는 연습도.
둥글게 모여 창을 세우기도 하고 단체로 움직이며 창으로 다른 무리를 견제하는 연습도 했다.
정말 전투가 벌어지면 얼마나 효율적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말 효과가 있을지도 미지수.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열에 하나라도 제대로 사용해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잘 하고 있군.”
신유성의 말에 교관으로 있던 지휘관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신유성의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인정받았다는 느낌에 가슴이 뿌듯했다.
“나도 연습 좀 해야겠다.”
그 동안 검술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신유성은 여러 가지 무기를 꾸준히 연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상대가 줄어들었다.
실감나는 실전 같은 연습은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이 모두 신유성이 다칠까봐 차라리 맞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무기를 뻗지 못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신유성은 계속 홀로 연습해왔다. 다행인 것은 철포와 궁술의 경우에는 상대가 없어도 얼마든지 연습이 가능하다는 것.
허나, 철포와 궁술만 익힐 순 없었다.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검을 써야 한다.’
평소 창을 가지고 다니기는 어렵다. 수시로 가지고 다니기 쉬운 무기로는 단검이나 검 정도였다. 위기의 순간 달려드는 자를 딱 5초만 막아도 성공이다. 한 순간만 넘기면 항상 따라다니는 이들이 처리할 테니까.
‘목숨 가지고 시험해 볼 순 없지.’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니 점점 사람 속에 갇히는 기분을 느끼는 신유성이었다.
“목검으로 준비할까요?”
“아니다. 오늘은 다른 걸로 해보자.”
신유성은 죽도를 준비했다. 그리고 검도에서 쓰는 보호 장비도.
“이거라면 맞아도 아프지 않다. 어떤가?”
“과연!”
하지만 이어진 대련에선 아무도 신유성에게 유효타를 날리지 않았다. 헛손질만 연속하다 신나게 맞아주고 끝이 났을 뿐.
‘쌓이네.’
신유성은 뭔가 다른 경쟁할 거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산해는 신유성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몸이 정말 날렵하구나.’
자신과 달리 신유성은 범과 같이 날랬다. 상대는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했으나 신유성의 죽도는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 머리를 때렸다.
무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에 이산해는 별 생각 없이 구경했다. 신유성의 몸놀림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정도에 학문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이산해는 단순하지 않았다.
‘다음은 또 뭘 하려나?’
이산해는 졸졸졸 신유성을 따라다녔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몇몇 노인들이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신원이 확실하니 신고는 하지 않았다.
신유성은 이지번을 대리인이라고 소개했다. 이산해는 그런 대리인의 아들이었으니 믿는 것이었다.
‘낚시?’
검도를 한 바탕 하더니 이번에는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곁에는 여러 소녀들이 함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잠깐 부럽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뿐이었다.
‘왕이 되려면 얼른 아이를 낳는 게 좋겠지.’
아이는 중요했다. 특히 권력자에게는 더더욱 중요했다. 후사가 불안한 사람은 배신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너무 없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사고로 인해 아이가 죽으면 혈통은 끝난다. 그러면 신하들의 다툼이 벌어진다.
규칙이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는 아이를 많이 만드는 것이 의무이기도 했다.
괜히 여러 여인을 거느리도록 권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가 많으면 뛰어난 아이도 많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권력자의 주변에 싸움이 벌어질 일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의 숙명이었다.
정상의 바람은 언제나 매섭다. 그것이 두렵다면 정상에 올라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산해는 신유성이 여러 소녀들을 거느리고 있어도 그다지 부럽지는 않았다.
낚시는 순조로웠다. 신유성은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갔다. 여기서 이산해는 잠시 육포를 뜯으며 고민했다. 그러다 접근해보기로 했다.
“저, 지금 도독나리를 뵙고 싶은데.”
“바쁘시니 나중에 찾아와라.”
신유성의 호위들은 쉽게 이산해를 접근시키지 않았다. 신유성이 소녀들과 있는 시간을 보잘 것 없는 일로 방해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산해는 물러났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이산해는 계속 신유성을 주시했다.
“날 쫓아다니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흐음.”
이산해가 쫓아다닌다는 보고를 접한 신유성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산해를 바로 불렀다.
“왜 날 쫓아다니는 거지?”
“그저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
“예전에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뛰어난 분이시라고요. 그런데 홀연히 왜로 넘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이산해의 눈빛은 타오르고 있었다. 호기심의 불꽃이었다.
“한 번 사는 삶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흔해빠진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산해는 실망하지 않았다.
“정확히 무얼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새로운 것을 원한다. 세상은 너무 지겨워.”
아주 커다란 나라를 세울 예정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이산해가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 느끼는 감정을 토로했다.
“새로운 것이요?”
“새로운 음식. 새로운 놀이. 새로운 것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세상 만물의 이치를 이용할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산해는 우습게보지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변화를 추구하는구나!’
단숨에 신유성의 마음을 파악했다. 신유성이 굉장히 지루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어찌 이루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간단하다. 나 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니 백성들의 힘을 빌린다. 그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일하게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
점입가경.
이산해는 흥미를 느꼈다. 체면을 위해 어설프게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지 않는 신유성이 재미있었다.
“그러면 백성들을 마음대로 부리시겠다는 것이십니까?”
“그건 아니지.”
신유성은 이산해의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운 상상에서 나오는 것. 누군가 강제하는 순간 틀에 박히게 될 뿐이다.”
순간 이산해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분은!’
탐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군의 자질을 가졌다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분이라면!’
자유로운 상상을 허락한다는 것. 제한하지 않는 것.
분명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래서 죄를 저지르고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허나 너무 풀어주면 탐욕스러운 자들이 제멋대로 하지 않습니까?”
“나쁜 건 학문을 한 신하들이 알아서 막아야지. 난 무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질서 속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길을 찾는 것 일뿐.”
이산해는 신유성의 말을 듣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나라를. 이치를 찾는. 그러면서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서경덕.
어린 시절 이산해도 만난 적이 있던 거인. 이지번과 이지함을 가르쳤으며 이산해에게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새로운 이치를 깨닫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정신적인 지주의 모습이 신유성과 살짝 겹쳤다.
“날 도와준다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신유성은 은근히 한 마디 던졌다. 그것이 이산해의 가슴에 거센 불을 지폈다. 심장이 뜨겁게 타올랐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신유성이 바라보는 세상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산해는 더 알고 싶어 질문을 던졌다. 허나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을 논할 수 없는 때이니 말하지 않겠다. 난 지금은 명나라의 도독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산해는 바로 알아들었다. 신분이 있으니 쉽게 논할 수 없다는 우회적인 말을 알아들었다.
“그럼 나중에 꼭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해 기존의 질서가 가로 막으면 어찌할 거냐는 질문. 하지만 이는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을 듣기는 힘든 것이었다.
“나와 계속 하게 된다면 언젠가 듣게 될 것이다.”
이산해는 물러갔다. 이후 열정적으로 이지번의 일을 도와 나진이 빨리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산해와의 대화 이후 신유성은 이지함을 찾았다. 이지함이 이상한 짓을 한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대체 뭐하는 건가?”
“아, 걱정 마십시오. 쿨럭. 치료법을 알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의술을 펼쳐야 할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제 몸으로 실험하는 중입니다.”
“뭣이?”
신유성은 깜짝 놀랐다. 이지함은 일부러 병에 걸린 다음 하나씩 병에 대한 기록을 하며 치료 방법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다 몸이 상하면 어쩌려고!”
화가 났다. 너무나 무모해보였다.
“조금 아프고 나면 될 일입니다. 치료 방법을 찾으면 더 많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후우.......”
이지함은 막무가내였다.
‘진짜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하지만 사람들을 생각해 스스로 몸을 던지는 마음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정말 노력하는 사람들이구나.’
학문을 실천하기 위해 산다는 말을 들었다. 이지함은 정말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잘못되면 난 어쩌란 말인가? 이제 좀 편해진다 싶었는데.”
“하하, 죄송합니다.”
“얼른 치료법이나 찾도록.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함은 정말 자신이 걸렸던 병의 치료법을 찾아냈다.
“그렇게 좋은가?”
“좋다마다요. 이제 약재만 충분하면 사람들의 병을 하나 더 고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지함은 정말 말리기 힘들었다. 존경스럽기도 했다.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야말로 성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생각해보지 않은 방법은 아니나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니 병에 걸리기 쉬운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러니까 잘 먹이고 더 깨끗하게 지내게 해야지. 쉬운 것은 수시로 손을 씻는 방법이 있지.”
“허나 그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손을 씻으려면 물을 떠와야 하는데.”
부자라면 집안에 우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은 동네 우물에서 물을 떠다 쓴다. 물을 떠오는 것도 노동인데 그 물을 가지고 손을 씻으라고 하면 대번에 귀찮다고 안할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러니 집집마다 물이 나오게 해야지. 뭐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니 날 잘 도우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다 주지. 그럼 모두 집 한 채씩 가질 수 있으니까.”
“하하, 그래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지함은 마치 자신이 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두창에 대해 좀 생각해봤는데.”
어느새 존경하는 마음을 접은 것일까? 신유성은 이지함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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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