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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69화 (6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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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파도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

수확의 계절이 한 번 더 찾아왔으나 시름에 젖은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원망했다.

“대체 왜.......”

원망 속에는 나랏님을 향한 것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선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연속으로 일어난 흉년으로 또 다시 기근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를 무마하려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래서 제사를 지냈다.

조상들에게 빌었다.

죄인들을 풀어주고 덕망을 쌓으려 했다. 물론 현실은 그저 기후 변화에 따른 영향에 불과했으나 글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통할 설명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지배자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남부와 달리 북부는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나진.

굶어죽는 사람들이 없는 땅.

나진의 병사가 된 백성들은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았다. 병마와 싸우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잘 곳이 있고 입을 옷이 주어졌다.

함경도와 평안도의 사람들은 점점 나진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나진으로 향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몸 밖에 없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탔다. 맹수를 만나 죽어가면서도 나진으로 향했다.

수탈로 인해 이미 겨울을 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일.

노비가 된다면 살 수도 있겠지만 노비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목숨을 걸었다.

한 번 노비가 되면 자식들은 계속 노비가 된다. 후손에게 노비의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은 이들은 목숨을 걸었다.

나진으로 가기만 하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신유성은 한 가지 고민에 봉착했다.

“이대로라면 버티기 어렵습니다.”

인구의 유입이 너무나 빨라졌다. 조선 조정에서 막고 있기는 하지만 산에 숨어살던 이들과 먹고 살기 힘들어져 도망치는 이들이 모조리 나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루에 약 1천명 정도 몰려드는 상황이라 식량 사정이 금방 나빠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왜구 정벌을 시작한다.”

기존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 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정벌이시라면 결국 병사로 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지번이 반대하고 나섰다. 부릅뜬 두 눈은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일단 나랑 같이 가보면 안다.”

신유성은 이지번을 데리고 큐슈로 향했다.

요시시게는 신유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정벌은 어떻습니까?”

“순조롭습니다.”

예전에는 아랫사람처럼 대하던 요시시게였다. 하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신유성의 아랫사람으로서 행동했다.

“이제 사이카이도를 완전히 손에 넣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드디어!”

“그 전에 먼저 이주민들이 정착할 곳을 좀 만들어주셔야겠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요시시게는 환영했다. 조선에서 사람이 온다고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생산력이 높아진다. 당연히 영지는 그만큼 더 강해진다.

더구나 이젠 근처에 요시시게를 건드릴 영주는 없었다. 요시시게가 큐슈 밖으로 진출할 뜻을 보이지 않으니 다른 영주들의 경계심도 많이 줄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게 할 생각이다.”

이지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은 나쁘지 않은 곳이었으나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큐슈는 얘기가 달랐다.

“그럼 싸우지는 않는 겁니까?”

“이곳은 명목상 내가 점령한 땅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나를 대리해 지배하게 되는 것은 이쪽이지.”

이미 요시시게와는 끝난 이야기. 오히려 신유성의 그늘에 있는 편이 더 이익이었다. 괜히 야심 때문에 신유성을 멀리해봐야 좋을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지번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구 토벌을 위해 신유성이 도독이 된 것까지는 알았지만 정확한 일본의 상황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 곳이 전쟁에 휘말릴 일은 없습니까?”

“사이카이도의 영주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요시시게가 통역의 말을 듣고 슬쩍 웃었다. 말 그대로였다. 해상 전력으로는 일본 전역에서 요시시게를 능가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 신유성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 아래였다.

더구나 이젠 육상 전력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교역을 통해 얻게 되는 수많은 식량과 자원들은 다른 영지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인재들이 모여들어 충성했다. 특히 상인들의 결집은 장난 아니었다.

나가사키는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남만의 상품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상인들 사이에선 큰 장사를 하려면 나가사키로 가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돈이 모이니 일자리도 많았고 또한 병력들도 어마어마했다. 요시시게의 휘하에 있는 철포병만 1만이었다. 철포병 1만이 전부 나가사키에 주둔했다. 철포병 이외의 전력까지 합치면 나가사키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나가사키의 상황을 보게 된 이지번은 감탄했다.

‘토벌을 한 게 아니라 아예 복속시켰구나.’

신유성이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어디까지 갈 것인지는 분명했다. 하는 짓을 보면 누군가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서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야심가였다.

‘폭군은 아니다.’

이지번은 희망을 보았다. 해금령과 공도 정책으로 인해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황. 이런 때일수록 돌아다니며 교역을 해야 했다. 필요한 것을 얻어야 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했다.

신유성은 그것을 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 뜻을 펼친다.’

이지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으로 가득했다.

나진의 파병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주였다. 처음 이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했지만 이지번과 함께 갔던 사람들이 본 이야기를 해주자 안심했다. 불안한 사람은 나중에 가도 된다고 하니 사람들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다.

순차적으로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하자 나진의 상황은 더 나빠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조선에서도 알게 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명목상 나진의 사람들은 모두 신유성의 병사였다. 그리고 신유성은 왜구토벌을 명받았다.

토벌을 위해 병사를 보내겠다는데 막아설 순 없었다.

그렇게 나진에서 인구가 빠져나가 큐슈로 향했다. 큐슈의 요시시게는 한참 영지를 늘리던 상황이기 때문에 인력의 증가를 기뻐했다. 투자해야 할 자원이 많았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신유성 덕분에 명나라에서 들여오는 최고급 다기만으로도 은을 긁어모을 지경이었으니까. 특히 용정차는 다기와 달리 소모품이었다. 한 번 쓰면 없어지는 소모품이었으나 황실에 진상되는 최고급 용정차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용정차를 차지하기 위해 영주들끼리 싸운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신유성의 신분이 낮았다면 최고급 용정차는 구하기 어려웠다. 허나, 정1품 도독에 부마도위라는 신분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은도 많았다.

이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찾아왔다.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기근으로 인해 제대로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이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제길! 이건 죽으라는 거 아녀!”

“빌어먹을. 죽어도 여기선 못 죽겠다.”

“갑시다!”

신유성이 나진의 소문을 꼼꼼하게 방방곡곡 퍼트린 덕분에 백성들은 나진의 존재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인구의 이동이 시작되자 지주들은 이탈을 막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달래보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사람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고 그렇게 되면 수확은 줄어든다. 지주 입장에서는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이런 문제점을 알면서도 막상 수확하게 되면 소작한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안 봐주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떼어간다. 수탈이었다.

풀죽을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겨울을 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조선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으아아아아아아!”

“마마다!”

마마. 엄마를 부른 것이 아니다. 두창. 천연두가 발생했다.

문제는 천연두가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동하는 자들 중에 병자가 있던 것이었다.

남쪽에서 시작한 천연두가 서서히 북상하자 조선 조정은 비상이 걸렸다.

“막아야 하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양반도 지주도 관군도 병에 걸리면 답이 없었다. 의원이라고 병에 안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사태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자 격리 조치가 이어졌다.

한양으로 그 어떤 자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낯선 사람은 무조건 잡아 가두는 일이 벌어졌다.

병에 대한 공포가 온 조선을 뒤덮었다.

함경도에서는 난리가 났다. 양반들이 나진으로 몰려들어서 외쳤다.

“약을 주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병을 낫게 하는 약은 없소! 걸리지 않게 하는 약만 있었을 뿐이라니까!”

병사들은 난리치는 양반들을 밀쳐냈다. 그리고 위협을 하려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접근하면 쏜다!”

외침이 울리자 주변 병사들이 쇠뇌를 들고 겨누었다. 사람들을 이끌고 여차하면 협박이라도 하려고 했던 양반들은 주춤하더니 물러났다.

“제발!”

“약을 얻으러 왔다는 놈들이 무슨 사람을 그리도 많이 끌고 왔나! 돌아가!”

병사들은 이제 막말을 날렸다. 양반이라고 기죽지도 않았다.

‘조금이라도 적대하면 다 죽인다.’

나진 병사들의 가슴에는 나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신유성과 이지함 덕분에 병사들은 두창으로부터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나진은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함경도의 민심이 꿈틀거렸다.

“봐라. 나 안 걸리잖어.”

“신기하네.”

접종을 받았던 이들은 멀쩡했다. 양민들은 진짜로 두창이 창궐했는데도 자신이 멀쩡한 것을 알고는 기뻐했다.

“나랏님보다 역시.......”

“쉿!”

누가 들을까 말을 막았지만 막는 사람의 표정도 말하려는 사람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뜻이 통했다.

나진.

그곳은 접종했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성역과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마마도 막지 못하는 나랏님과 비교해보면 훨씬 나은 것이 신유성이었다.

“얼른 가세나.”

“그래.”

함경도 사람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조선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마마와 함께 마구 늘어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마마에 걸린 양반들을 등졌다.

나진은 다시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밀려오는 숫자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힘들다.’

그렇다고 오겠다는 사람을 막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신유성이었다.

“방법이 있나?”

“더 빨리 사이카이도로 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음.......”

얘기를 듣던 신유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큐슈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큐슈의 땅이 넓긴 하지만 배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들을 전부 옮기려면 막대한 수의 배가 필요했다.

‘때가 되었나?’

적어도 함경도는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유성은 함경도를 탐내지 않았다.

‘강을 건넌다.’

나진에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기껏 개척했던 땅이 주거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도시가 팽창하며 주변의 농경지를 잠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봄에 또 다시 개간을 해야만 한다.

‘대도시를 세우기에는 아직 입지가 좋지 않아.’

미래라면 못할 것 없다. 발달된 유통 시스템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시대에 엄청난 인구가 사는 대도시를 잘못 세우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굶어죽는 것뿐만 아니라 대화재의 위험도 크고 전염병이 돌면 대규모로 죽어나가게 된다.

그렇기에 신유성은 결정을 내렸다.

“강을 건넌다.”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를 점령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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