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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파도
친구인 성혼을 보낸 이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일상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술을 마신 권씨의 주사는 이이를 괴롭게 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배워온 학문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어질 정도로. 하지만 효심이 지극한 이이는 결국 그런 부정적인 마음을 부정했다.
‘이것은 좋지 않은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한다고 해도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이 죄악인 시대였다. 조선의 법이 그랬다. 성리학을 기초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가정에 문제가 있어도 자식은 참아야 했다.
문제가 있다면 가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이 때문에 종가의 장남이 가지는 친족내의 권력은 어마어마했다. 하나의 소왕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이는 자신이 배운 것을 믿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씨의 주사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이도 인간이었다.
‘힘들다.’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은 계속 방황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이이의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세상도 어지럽고 나도 어지럽구나. 차라리 속세를 떠날까?’
이이는 짐을 꾸렸다. 그리고 집을 나갔다.
‘어디로 가야할까?’
집을 나선 이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마음은 그저 어딘가의 산속에 들어가 승려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까?
길을 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 접종.’
두창이 창궐했으니 돌아다니다 보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이는 우선 접종을 받기 위해 이이가 사는 곳까지 소문이 난 박지화의 집으로 향했다.
박지화의 집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러나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지화를 비롯한 의원들은 접종을 해주느라 바빴다. 한쪽에서는 우두에 걸린 소들을 관리하느라 또 바빴다.
이이는 줄을 섰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죽음은 무엇인가?’
모친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이이는 생사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아직까지 나름대로 답을 내놓지 못한 문제였다.
생각을 하며 기다리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지루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차례가 되자 이이는 팔을 내밀었다.
“접종을 하고 나면 며칠 아플 수도 있으나 푹 쉬면 나을 테니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멀리서 와서 머물 곳이 없는데 이곳에서 쉴 순 없습니까?”
“좁은 곳이라도 괜찮다면 그리 하시지요.”
박지화는 접종을 해주었다. 그리고 허준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향했다. 안에는 이이처럼 멀리서 온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이걸 받아주시지요.”
빈손으로 신세를 질 순 없으니 이이는 집을 나설 때 가져온 쌀과 약간의 패물을 건넸다.
이후 이이는 사람들과 대화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이와 대화를 하던 이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그거야 그쪽이 잘못한 것이죠.”
이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 하는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체면을 생각해주지도 않았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다보니 남의 흉을 보면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기대하며 뭔가 말을 꺼낸 이들은 무안해졌다. 화도 났다.
결국 이이는 금방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이가 상처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득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가차 없었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이이는 혼자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얼마 뒤, 슬쩍 열이 오르자 이이는 사색하기보다는 끙끙 앓기 시작했다.
건주 여진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니칸와일란과 기오창가의 세력 다툼으로 주변 약소 부족들이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강력한 세력들이 정면으로 부딪치기 전에 세력을 키우려고 하다 보니 주변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
같은 편이 되거나 아니면 강제로 흡수되거나.
양자택일만이 남은 것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거대 세력들의 편 가르기는 언제나 격렬했다.
“잘 돌아가고 있군.”
싸움을 조장한 원흉, 신유성은 보고를 받고 흐뭇하게 웃었다.
‘날 건드리고 편히 살 생각을 해? 어림없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정말 깨끗한 유리가 나올지 모른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군.”
이어서 들어온 보고는 바로 유리 개발 현황. 유리를 개발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은 사실 그리 많지는 않았다. 바닷가에서 모래를 퍼와 이런 저런 방법으로 녹여보고 실험하는 정도니까.
되도록 깨끗한 유리가 나올 수 있도록 상황을 지켜보며 연구를 하는 나날이 이어질 뿐이었다.
“다음은 신녹입니다.”
신녹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세워진 이후 해서여진의 타이란은 자신의 아들을 아예 상주시켜 버렸다. 그리고 꾸준히 거래를 할 것을 종용했다. 물론 신유성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었다. 타이란의 아들이 있는 한 방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근 신녹에 찾아오는 야인여진들이 늘었습니다.”
문제는 신녹의 인구 팽창이었다.
신유성이 넙죽넙죽 받아 주다보니 야인여진의 약소 부족들이 자꾸 의탁해왔다.
“식량이 부족해지겠군.”
만약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의탁했던 이들은 몰래 떠날 것이다.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일을 시켜라. 그냥은 받아주기 어렵고 각 호마다 장정 한 명을 병사로 내놓도록 해라. 그리고 그렇게 모은 이들은 말과 함께 사이카이도로 보낸다.”
큐슈 정복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기병을 늘릴 생각이었다.
큐슈만 완전정복하면 한시름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가끔 화산이 폭발하지만 따뜻한 큐슈는 어쩌면 추운 곳에서 살던 여진인들의 새 보금자리로 각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여진인들이라고 마냥 떠돌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스한 지방에서 자신의 땅을 일구며 걱정 없이 사는 것은 농사를 짓는 이들의 소망이었다.
신유성은 척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왔다.
“오셨어요?”
집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매화였다. 이제는 슬슬 여인으로 성장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활짝 피어난 미소를 보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진과 레이가 나서서 신유성의 외투와 검을 받아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녹정이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은 뭐하고 있었지?”
“책을 읽고 요리를 좀 해봤습니다.”
“오! 요리!”
잠시 뒤, 신유성 앞에 접시가 하나 놓였다. 접시 위에는 동그란 햄버그가 놓여 있었다.
햄버그 위에는 살짝 소스가 뿌려진 상태. 소스는 남만 상인들이 가져온 향신료를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드디어 성공했군.”
“다음에는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빵 사이에 넣어 볼 생각입니다.”
“고마워.”
여유가 생긴 신유성은 다시 식도락을 이어나갔다. 추억의 음식을 재현해 먹어보는 것이 신유성의 낙 중 하나였다.
쇠고기를 갈아 만든 햄버그는 유학 생활을 떠올려주는 아주 소중한 음식이었다.
살짝 잘라내자 부드럽게 썰리는 햄버그.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니 살살 녹는 느낌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아아, 이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햄버그스테이크.’
뭔가 모자란 것 같으면서도 다르게 신선한 느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잠시 뒤 햄버그를 뚝딱 해치우자 주녹정이 부드럽게 다가왔다.
“하나 더 드시겠어요?”
“아니. 이젠 됐어.”
“그럼 다른 거라도?”
“다 필요 없어.”
신유성은 주녹정을 껴안고 입맞춤했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입술이었으나 주녹정은 웃으며 입술을 마주했다.
주변에 있던 소녀들은 저마다 조용히 숨 쉬며 지켜보았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자 주녹정은 신유성의 품을 벗어났다.
“이제 나츠에게 가보세요.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신유성은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츠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씻으시겠어요?”
“그래야지.”
옷을 벗자 나츠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이후 신유성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미리 준비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하루의 피로가 싹 풀어진다.
잠시 뒤, 나츠가 들어왔다. 건장한 신유성의 몸을 본 탓인지 아니면 욕탕의 뜨거운 공기 때문인지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두 사람은 곧 욕탕 안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게 되었다. 따스한 물 속에서 이어지는 입맞춤은 현기증을 유발했다. 나츠는 영혼이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아아,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조선은 물론 세상은 혼란의 극치. 신유성의 여자관계도 세계정세처럼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남자를 알아도 될 정도로 큰 매화는 언제나 신유성이 안아줄까 기다리고 있었다.
신페이의 동생인 레이는 호위를 빌미로 신유성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손만 내민다면 언제든 안길 태세였다.
이 두 사람은 나츠도 인정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했으니까.
주녹정은 인정하고 말 것도 없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대상. 만약 주녹정이 신유성을 독점하고자 했다면 나츠는 홀로 지내는 날이 더 길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화진의 존재는 나츠를 한숨짓게 했다.
추위에 약하면서도 돌아가지 않고 버티는 화진이었다.
‘아 몰라.’
잠시 생각난 혼잡함을 덜어내고자 나츠는 더욱 신유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신유성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신유성만을 원했다. 곁에 없으면 허전해 할 정도.
그래서 더욱 사랑 받고 싶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독차지 할 수 없는 남자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여자가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신유성의 나라가 커지면 커질수록 여자가 더 많아질 거란 주녹정의 이야기는 가슴을 외롭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했다.
“좀 더.”
“곧 물이 식을 것 같은데. 나가자.”
두 사람은 바로 목욕탕을 벗어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의 장식은 단출했다.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가 전부였다.
침대 위에 눕자 푹신한 느낌이 몸을 감쌌다.
신유성은 천천히 나츠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응.”
이윽고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열기가 피어오르며 음란한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나츠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멀어지는 느낌.
그래서 사력을 다해 신유성에게 매달렸다.
“더! 더!”
더욱 깊게 안으로 파고드는 신유성.
서로를 향한 감정은 몸과 함께 더욱 뜨겁게 뒤엉켰다.
‘영원히! 더!’
나츠는 가슴 속으로 염원했다. 하지만 정사는 영원할 수 없었다.
끝이 찾아왔다.
현명한 남자가 될 시간이 찾아온 신유성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나츠는 그런 신유성의 곁에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좀 더.’
항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외로움은 나츠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자고 일어난 신유성은 곁에서 자고 있는 나츠를 바라보았다.
‘또 울었네.’
슬퍼도 울고. 행복해도 울고. 아무 이유 없이 울고.
처음에는 눈물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모든 눈물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
신유성은 나츠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잠결에도 나츠는 품으로 파고들었다.
손은 어느새 부드러운 몸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느껴지는 감촉이 팔을 타고 머리에 전해졌다.
좀 더 끌어안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깰까 싶어 신유성은 가만히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으음.”
한참 쓰다듬으니 나츠가 깨어나 신유성을 향해 입을 내밀었다.
입술을 찾는 아기새 같은 행동.
입술을 마주하니 달라붙는다.
“일어났어?”
대답 대신 나츠는 신유성을 자극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더 뜨거워졌다.
방 안의 공기가 요동치고 쾌락의 신음은 천둥 같았다.
뒤엉킴이 심해질수록 의식이 깨어나며 쾌락에 취했다.
뜨겁게 엉켜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