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신의 유희-72화 (7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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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파도

폭풍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신유성은 주녹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주녹정은 인삼차를 내밀었다.

‘이런 건 정말.’

미래였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다른 여자와 잔 다음 날 부인이 몸 걱정해주며 인삼차를 건네주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심하게 넘길 순 없다.

“고마워.”

인삼차를 받아 마신 신유성은 주녹정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작은 행동이었으나 이것 하나만으로도 주녹정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관계는 너무 자주 하면 안 돼요. 몸에 무리가 가니까.”

“그럼 오늘 밤에는 못 보는 건가?”

“그래요. 오늘은 혼자 자요.”

신유성은 피식 웃었다. 말 안 해도 오늘은 혼자 자야 했다. 할 일이 있었으니까. 이지번과 이지함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었으나 조선의 혼란으로 인해 신유성도 편히 쉴 수만은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침 드세요.”

아침밥은 빵에 햄버그를 끼워 넣은 햄버거였다.

‘마요네즈만 발라서 좀 그러네.’

마요네즈는 만들기 쉬웠다. 계란과 소금 식초 그리고 식용 기름만 있으면 대충 마요네즈를 만들 수 있었다.

‘케첩. 토마토. 케첩.’

마요네즈는 만들 수 있었으나 토마토는 없었다. 그러니 케첩을 만들 수 없었다. 케첩을 만들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것저것 실험하다보면 언젠가는 만들 수 있는 법. 그러나 가장 중요한 토마토가 없었다.

‘부자면 뭐해? 케첩도 마음대로 못 먹는데.’

금과 은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케첩을 먹을 수 없으니 신유성은 그것 또한 고통이었다. 결국 케첩 없는 햄버거를 씹었다.

아침을 먹은 뒤 신유성은 일을 하기 위해 나갔다.

북해도.

신페이는 나진으로부터 오는 정기 연락선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배는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으음.”

북해도의 일은 신페이가 알아서 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페이는 항상 신유성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유성의 의중과 달리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하시지요.”

“음.”

신페이는 식사를 위해 움직였다. 상에는 해산물 튀김이 한 가득이었다. 하나씩 간장에 씩어 먹고 나서는 차로 입가심을 했다.

기름기가 차에 의해 씻겨 내려가는 깔끔한 느낌.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아내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신페이의 아내는 이가 출신 여닌자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북해도의 정세에 관한 것뿐이었다.

“난부 가문이 곧 안도 가문을 먹어 치울 것 같아요.”

“아까운 건가?”

“아깝긴 하죠. 툭 치면 벌렁 자빠질 정도로 약해졌는데.”

안도 가문은 지속적인 약탈에 엄청나게 약해졌다. 하지만 신페이는 절대 점령을 시도하지 않고 계속 털기만 했다. 털고 또 털었다. 털어서 가져갈 것이 없으면 사람을 데려왔다.

사람을 데려온 다음에는 사람들이 살던 집을 해체해서 가져왔다.

북해도 해군이 뜨면 그야말로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만큼 지독하게 털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점령은 하지 않았다. 점령을 하면 수성을 해야 하고 여러 모로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안 돼. 우리가 내려가면 다들 우릴 경계할 거야.”

일본의 영주들은 신경 안 쓰는 척 하지만 북해도와 큐슈를 엄청나게 경계했다. 만약 북해도가 동일본 북쪽을 잠식하기 시작하면 영주들은 연합을 해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신유성이 두렵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거래만을 하고 내버려둔다면 적대할 생각은 없는 영주들이었다.

어쨌거나 북해도와 손을 잡아서 가장 신난 것은 난부 가문이었다.

이제는 동일본의 맹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하지만 난부 가문은 언제나 북해도에 저자세로 나왔다.

북해도는 건드려서 좋을 것 없는 벌집이기 때문이었다.

북해도의 진짜 전력은 일본의 영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직 해상전력만이 어렴풋이 전달되었는데 군선의 숫자가 200척을 넘어가고 있었다.

북해도에만 200척이었다.

큐슈까지 합치면 더 많았다. 여기에 나진을 오가는 배들도 있어 영주들도 정확히는 얼마나 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해상전력만 200척.

무시무시했다. 여기에 육상전력은 아예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두려웠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전력을 알 수 있다면 빈틈이라도 찾아볼 텐데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태니 빈틈 같은 것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안겨주는 법.

막상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에 웃을 수도 있지만 그전까지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쌀 좀 더 보내라고 할까 봐요. 우리가 해준 게 얼만데.”

“그래야지. 주군께서도 될 수 있으면 쌀을 많이 보내라고 하셨으니까.”

“그런데 아가씨는 어때요? 아직”

“뭐 그렇지.”

“어서 빨리 한 이불을 덮으셔야 할 텐데.”

“상관없어. 주군께서는 혈연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우린 그저 주군을 최대한 모시면 되는 일.”

“그래도 쿠노이치가 한 명쯤 주군 곁에 바짝 붙어있는 편이 좋죠. 앞으로 더 필요하시게 될 텐데요.”

“그건 레이에게 맡기면 돼.”

혈연을 통해 권력을 잡는 것보다 신유성이 외척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더 경계하는 신페이였다.

신페이에게 신유성은 이제 신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얼마 전에 했던 접종은 신페이를 비롯한 북해도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마는 입으로 내뱉기도 두려운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쁜 악귀들이 마마를 퍼트린다고 믿을 정도였다. 의술을 모르는 사람들 상당수가 전염병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유성이 퇴치법을 알아냈다.

이는 귀신을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해도 사람들은 신이 인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났다며 호들갑이었다. 음양사의 후예라는 소리도 있었지만 이는 금방 강림설에 묻혀버렸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곁들여지고 있었고 신유성의 행보는 모두 미화되어 전설로 기록되는 중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북해도에서는 이미 신으로 모시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여기에 가장 열렬한 신도 두 명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신페이 부부였다.

사실 부부가 된 이유에는 신유성을 적극적으로 모시는 성향도 있었다. 같은 성향이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그렇게 한 사람을 신격화하며 자연스럽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

휴식이 끝나자 부부는 다시 일에 들어갔다. 신페이도 일을 하지만 신페이의 아내도 일을 했다.

하루 뒤, 정기 연락선이 도착했다.

“기병을 더 늘리게 됐군.”

“병사는 지금도 꽤 많은데.”

“훈련이나 해야지 뭐.”

“아까워요.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신페이의 아내는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것은 새로 오는 야인여진족 기병들은 북해도에 남기고 기존의 기병들은 야인여진족 영역에 보내 해안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해안 개척도 더 빨라질 거예요.”

“그건 내가 혼자 정할 문제가 아니군.”

신페이는 아내의 뜻을 보고서에 적어보냈다.

요시시게는 기병이 계속 늘어나게 되자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제 총 진격이다. 아무도 우릴 막을 수 없다!”

요시시게의 가신들은 저마다 함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큐슈 정복이 코앞이었다. 아직 많은 땅을 차지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두려워할 만큼 기병이 모였다.

규슈의 영주들이 모두 연합해서 덤빈다고 해도 두렵지 않을 정도였다.

충원된 여진 기병은 그야말로 간신히 붙어있는 큐슈 영주들의 숨통을 끊어놓기에 딱 좋은 검이었다.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나가사키 해군이 움직였다. 함선 중에는 임거정이 지휘하는 배도 있었다.

“너무 앞서지 마라. 우린 목숨을 지켜야 해.”

“그래도 너무 안 싸우면 눈치 보이지 않습니까?”

“목숨을 아껴라. 살아 돌아가서 부를 누려야지.”

백의종군은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하지만 임거정 패거리는 아무도 불만을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큐슈에서 신유성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나가사키 사람들이 북해도처럼 신유성을 숭배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보 조직인 코가와 이가 닌자들은 신유성의 숭배자들이었다.

서로를 견제하는 와중에도 신유성에게 해가 될 것 같은 자들이 나오면 잡아갔다.

가끔 신유성이 왜 요시시게보다 더 위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름 요시시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파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출세욕이 있으니 그럴 만했다. 허나, 그 말을 했던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신유성을 욕하지 말라고. 어디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다고.

이 때문에 배당도 받지 못하고 매일 싸우기만 하는 임거정 패거리는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린 먹고 살만큼은 있지 않나?”

배당은 없다. 하지만 나름 절약하자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임거정 패거리는 이 돈으로 나중에 나가사키에 점포를 하나 내고 어선이라도 몇 척 살 생각이었다. 식량은 만들기만 하면 족족 팔려나갔다.

말린 생선이 그렇게 잘 팔렸다. 돈이 되니 점포만 내면 돈을 버는 것은 순식간이라 할 수 있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많은 식량이 필요해진 신유성이 있는 대로 다 사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정벌만 성공하면 아마도 우릴 풀어주실 것이다.”

도적의 삶은 이미 정리되었다. 이제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모두 안정된다면.......’

임거정은 패거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다 잃으면서 느꼈던 분노는 잠들었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유성을 따르는 이들의 세상은 전혀 달랐다. 백정이라고 억압하고 무시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무사 계급과 일반인들 사이의 차이가 엄격하게 컸지만 이 또한 넘어서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주인을 섬기면 그게 무사였다.

임거정은 무사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신유성의 세상에서는 양반 못지않은 지위였다.

‘그 분을 위해서라면.’

생에 남은 것은 별로 없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데 갑자기 생긴 무사라는 지위.

가슴 깊이 새겨진 한의 일부를 녹여주는 일이었다.

‘조선을 친다면 내가 앞장서리.’

결혼하고 안정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임거정이었다.

관심은 오직 신유성의 무사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자신을 모욕했던 조선의 양반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 그것이 전부인 삶이었다.

임거정을 태운 배는 큐슈의 남단으로 향했다.

시마즈 가문은 시끄러워졌다.

“쳐들어왔습니다!”

가문의 해상전력은 예전에 박살났다. 지금까지는 그냥 탈탈탈 털렸을 뿐.

“막아라!”

‘젠장.’

이제는 농성 밖에 답이 없었다. 농성을 위해 무기와 식량을 비축했다. 특히 활과 화살을 중점적으로 제작했다.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그리 많이 만들지는 못했다. 또한 궁수를 양성하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무사들이라면 몰라도 일반 병사들까지 익히게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밀려드는 쇠뇌병을 보면 보병들이 기겁할 뿐이었다.

쇠뇌를 따라서 만들려고 했지만 기술자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었다. 쇠뇌라도 입수했다면 복제를 하겠지만 아쉽게도 쇠뇌를 구하지 못했다.

결국 열악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

성문은 금방 무너졌다. 그리고 요시시게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크아아아아악!”

무사들은 최후의 순간을 장식하기 위해 싸웠다. 잡혀서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싸웠다. 그렇기에 사나웠다. 하지만 시마즈 가문의 무사들이 날뛰는 것은 임거정이 나타나면서 중단되었다.

임거정은 월도를 휘둘렀다. 순간 앞에 있던 무사의 팔이 떨어졌다. 슬쩍 월도가 방향을 틀어 목덜미 부분을 스치자 혈화가 피어났다.

“크륵!”

비명은 피거품에 삼켜졌다.

임거정은 사정없이 날뛰었다. 맹수가 따로 없었다.

시마즈 가문의 무사들은 맹수를 향해 덤볐다. 그러자 월도가 원을 그렸다.

순간 붉은 달이 대지 위에 떴다.

갑옷이 갈라지며 살이 베였다.

무시무시한 힘.

임거정은 이를 악물고 월도를 휘둘렀다.

땅에선 계속 죽음의 달이 움직이며 무사들의 목숨을 잡아먹었다.

날뛰는 맹수를 따라 달이 움직였다.

이후 큐슈 사람들은 임거정을 사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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