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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파도
시마즈 가문에 이어 큐슈의 영주들은 순식간에 정리 되었다.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도 막지 못했다.
해안은 이미 탈탈 털려서 너덜너덜했고 배는 없었다. 어선들까지 몽땅 빼앗겨 큐슈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병들이 휩쓸고 다니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여진족 중에서 가장 약체라고 하는 야인여진이었지만 보병을 상대로 끙끙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은 정말 착실하게 약탈했다.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만 죽이지 않으면 된다는 말에 탈탈 털었다. 건드리면 안 되는 것 빼고 다 털었다. 나중에 자신들이 살 곳이 된다는 이야기에 열심히 싸웠다.
추운 곳에서 살던 야인 여진에게 큐슈는 덥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싫어하는 야인 여진은 없었다.
춥고 척박한 땅에서 살던 야인 여진에게 큐슈는 천국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아직 화산 폭발을 겪어보지 못해 그런 것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큐슈 정복에 성공한 요시시게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드디어 해냈습니다!”
“장하다! 장해!”
대마도에 웅크리고 살며 눈치만 보던 삶이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이젠 큐슈의 지배자가 되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
가신들도 모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야스와 요시시게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날이었다.
친아들인 마사모리를 쳐내면서까지 신유성을 따랐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큐슈 정복에 성공했다.
“이제는 내부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가신들 중에 외부 정복을 원하는 강경파가 있다면 굳이 쳐낼 필요는 없었다.
신유성에게 보내면 된다. 그러면 신유성이 알아서 싸우게 할 터였다.
요시시게는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서둘러 팽창하면 실속이 없기 때문이었다.
요시시게의 예상대로 많은 이들이 계속 정복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요시시게는 이를 일축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해를 복구하는 일이다. 싸우고 싶은 사람은 신유성님에게 보내주겠다.”
어차피 요시시게 또한 신유성의 가신을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몇몇 가신은 신유성에게로 갔다.
실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실력이 있으니 야심이 있던 것. 요시시게는 그런 이들을 굳이 밑에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아래에 둬봐야 피곤한 부류.’
반면 남은 이들은 모두 요시시게의 결정을 환영했다. 이후 요시시게는 해안선을 완벽하게 방어하기 시작했다. 바다만 잘 막아도 외부 침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임거정과 패거리의 백의종군은 끝났다.
큐슈 정복을 완료한 것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 드디어 끝이다!”
“얼른 가게 차리자.”
패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자금은 모두 모으니 충분했다. 더구나 요시시게가 특별히 저렴한 가격에 점포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 동안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배당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약소한 보상이었다.
“이제 편히 살죠.”
어선도 몇 척 샀다. 그리고 다들 잽싸게 바다로 질주했다. 얼른 잡아서 생선을 말려 팔아야 했다. 잡으면 그게 다 돈이니까.
하지만 임거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계속 싸울 생각이다.”
“예?”
“이제 너희들끼리 잘 살아봐라. 예전처럼 도적이 되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긴 하죠.”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은 무기를 들 생각이 없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싸우겠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 전투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계속 마주해야 했기에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난 주군을 위해 싸울 생각이다.”
순간 패거리의 뇌리에 임거정을 굴복시켰던 신유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사신이란 별명을 가진 임거정이 굴복했던 대상.
큐슈의 정복자인 요시시게를 거느린 남자.
‘정말 미친 짓이었지.’
신유성이 있던 곳에서 사고치려 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절대 사고 치면 안 돼.’
임거정 덕분에 패거리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은 다들 어렴풋이 알았다. 그래서 임거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백의종군하면서도 항상 자신들을 지켜주던 모습은 더더욱 임거정을 따르게 만들었다.
“이제 나이도 있으신데.”
“한 번 싸워볼까?”
“아닙니다.”
말을 하던 부하는 깨깽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임거정은 배를 타고 나진으로 향했다.
한편, 신유성은 신페이의 제안에 동의하며 야인여진족을 북해도로 보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해서여진의 타이란에게도 야인여진을 흡수하겠다고 알렸다.
흡수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일본 정벌을 위해서라고 했다.
‘잘 되면 좋고.’
안 된다고 해도 연해주 정도는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영향권 안으로 오는 이들을 속속들이 흡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나저나 조선은 엉망이군.’
사정이 전혀 나아지질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악화되는 중이었다.
두창으로 인한 피해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함경도로 움직이려는 인구가 많아 이들을 막느라 관군이 움직였다. 움직이는 이들은 고향을 등진 이들.
생산인력이 상당히 줄어드니 지주들에게도 피해가 갔다.
죽을 정도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멀쩡한 땅을 놀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 이 때문에 노비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악독한 자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멀쩡한 이들을 빚쟁이로 만들어 노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빌려줄 땐 미소로.
돌려받을 땐 인생으로.
급한 상황에서 숨통을 트이게 해준 은인은 사실 은인이 아닌 악마였던 것이었다.
물론 모두 이런 식으로 노비가 되진 않았다.
자식을 파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도저히 방법이 없어 스스로 노비가 되길 자청하는 이들도 나왔다.
이것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세를 내고 군역을 치를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곧 조정의 재정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황이 어렵다보니 비리를 저지르는 이들이 더욱 늘어났다. 죽지 않기 위해 수탈을 감행하는 아전들이 늘어난 것.
의원은 약값을 올렸고 대장장이들은 가격을 올렸다.
여기에 상인들은 매점매석에 나서고 있었다. 매점매석은 악독한 행위였지만 뒤에는 손을 잡은 양반들이 버티고 있었다.
윤원형도 그들 중 하나였다.
결국 조선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심이 나날이 떨어졌다.
정말 먹음직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성은 나서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강압적으로 나선다면 조선의 혼란을 틈타 많은 이들을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을 비롯한 지식인층은 쉽게 끌어안기 어려웠다.
‘사림처럼 기회를 엿보겠지.’
내부의 적은 골치 아픈 것이었다. 외부로 뻗어나가기 바쁠 때 내부에서 독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대가 있으면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권력은 많은 이들을 끌어들인다. 가장 열정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초반부터 내부에 분열의 씨앗을 품게 되면 외부로의 확장은 어려웠다. 조금만 흔들리면 바로 뒤에서 흔들 테니까.
‘연해주를 먼저 먹는다. 흑룡강 하구까지 치고 올라가는 거야!’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여진의 힘은 꼭 필요했다.
홍콩.
한 척의 배가 홍콩에 들어섰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형태의 선박에 홍콩의 사람들은 모두 호기심을 보였다.
“여기가 명인가?”
선박은 에스파냐의 갤리온이었다.
새롭게 나온 갤리온은 항해 능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 적재량도 상당했다. 더구나 포문도 꽤 있어 상당한 전투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군함으로 했다면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해 더 강한 전투력을 보유할 수 있었으나 무장상선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균형이 중요했다.
“반갑습니다.”
홍콩의 에스파냐인들이 나와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이들은 홍콩에 상주하며 명나라의 문화를 배우며 새로운 상품을 발굴하기 위해 상주한 상인들과 그 호위들이었다.
“명은 좀 어떻습니까?”
“여전히 부유하죠. 해적들이 좀 시끄럽지만요.”
“그래요? 이렇게 거대한 나라가 해적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요.”
“듣기로는 바다로 나가는 걸 금지했다고 하네요.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에스파냐인들은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 이 와인. 정말 그리운 맛이군요.”
“여기도 술이 있지 않습니까?”
“제 입맛에는 와인이 더 잘 맞아서요.”
“그럴 수 있죠.”
해산물 요리와 와인을 즐기는 시간이 이어졌다. 타국에 있다 보면 어려서부터 먹고 자랐던 고국의 음식이 왠지 모르게 그리워지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외국인으로서 타국에서 느끼는 고독은 상당히 컸기에 자국인을 만났다는 사실이 크게 반가웠다.
“그런데 제독께서는 어떠십니까?”
“여전하죠. 필리피나스 주변을 본격적으로 정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계십니다.”
상인들이 언급하는 제독은 루이 로페즈 데 빌라로보스였다.
“빨리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우리 같은 상인들이 더 편해질 텐데.”
“그나저나 제가 떠나기 전에 들은 얘기인데 지팡구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히 아는 것 있습니까?”
“예전에 그쪽에 가 있던 상인들이 모조리 사라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대충 들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쪽 내전에 참가했다가 전부 몰살당했다고 하더군요.”
“무서운 일이군요.”
“바보 같은 일이죠. 남의 나라 내전에 직접 끼어들었다가 당하다니.”
상인들은 단순히 물건만 사고팔지 않았다. 정보를 교환하는 것도 상인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모피는 많이 구했습니까? 요즘 이쪽에서 나온 모피가 상당히 인기 있습니다.”
“호피 말이죠?”
“그렇죠. 그런 맹수는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렇지만 진짜 인기 있는 것은 담비입니다.”
“담비는 이곳에서도 귀한 것이라 구하기가 힘들죠. 호피 만큼이나요.”
“으음, 그래도 구해야 합니다.”
“그럼 이곳이 아니라 나가사키란 곳으로 가보시길 권합니다.”
“아, 거긴 내전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상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갤리온을 타고 온 상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사키로 향했다.
조선.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 수군 증강 계획은 결실을 맺었다. 바로 판옥선이었다.
기존의 맹선과는 다른 2층 구조.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싸운다.
이것으로 기동성과 전투력을 한꺼번에 잡은 것이었다.
“하하하하! 수고했네!”
판옥선을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왜구의 소굴을 소탕하기 위해서. 판옥선의 전투력이라면 왜선과 1:1로 싸워 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토벌입니까?”
“해야지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대신들이 뜨거운 눈으로 윤원형의 입을 바라보았다. 반면, 윤원형에 대항해 조선을 지키고자 하던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려고.’
없는 살림에 판옥선까지 개발했다. 왜구를 친다는 명분이 아니었으면 벌써 말렸을 일이었다. 허나 이제는 큐슈가 대마도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그들은 또 어찌 나올까?’
신유성과 손을 잡은 세력이라는 것은 알기에 함부로 건드릴 순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군선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이 때문에 윤원형을 미워하는 대신들도 결국은 장단에 따라주었다.
이후 양반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유행이 번져나갔다.
왜구토벌허가를 받기 위해 기부를 하는 행위였다. 허가를 받으면 배를 살 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공적을 세우면 명나라에 보고해준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줄어든 재정을 채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나도 한다!”
“나도!”
돈 많은 집들은 돈을 모아 왜구토벌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돈을 쓰기 시작했다.
모두 공을 세워 신유성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 편의 사기에 가까웠다. 양반들이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무도 신유성이 명나라 황제를 만나고 부마가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들 또한 그다지 전망이 밝지는 않지만 한 줄기 희망에 모험을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싸움은 수군 출신들을 고용해 할 생각이었으니까. 목숨을 잃을 위험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오직 재산이 좀 되는 가문들만이 여기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구토벌허가를 받았다고, 판옥선이 개발되었다고 금방 함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배를 공급하기 위해선 조선소를 늘려야 했다.
이것 또한 경비가 드는 일.
조선의 본격적인 왜구토벌은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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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