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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욕망
복속시키는 야인여진인들은 큐슈와 북해도로 계속 보내졌다. 큐슈로 간 여진인들은 대만족이었다. 북방의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농사도 더 잘 됐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언어.
큐슈 토박이와 야인 여진인들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진에 들어온 유랑민들도 가세했다.
3개의 언어. 3개의 문화.
자연스럽게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것은 후일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단시간에 해결할 수는 없다.’
문화의 융합이란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더 힘들어진다.’
간단한 방법으로는 어느 한 쪽을 우위에 두고 찍어 누르는 방법이 있었다. 허나 이런 방법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명나라 이전의 원나라가 결국 이것 때문에 사회적 갈등을 껴안고 있다가 멸망한 것이었다. 사회 상류층과 일반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이 결국 원나라 멸망의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어떻게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절망감은 상류층을 전혀 다른 부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국가의 힘이 강력할 땐 문제가 없지만 혼란이 찾아오자 계층 간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오래 억눌린 불만은 그만큼 컸고 거대한 욕망의 불꽃이 결국 주원장을 명나라 태조로 만들었다.
‘또 한 명의 주원장을 만들 순 없지.’
주원장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황제가 된 사람이 바로 주원장이었다. 물론 주원장의 성공 배경에는 난세라는 혼돈이 존재했다.
‘불만 없는 사회는 만들 수 없다. 국가라는 것은 굴러가다보면 언젠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럴 때 불만 세력이 많으면 분열이 일어난다.’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다는 것을 신유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본인부터 욕망 덩어리였고 미래의 기억이 이를 뒷받침했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전해도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과거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정도면 됐지!’하고 만족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부자의 생활을 보면 그것을 탐하게 된다.
괜히 견물생심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불만은 언제나 격차라는 것을 땔감 삼아 조용히 타오른다.
‘사회적 성공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무엇을 하건 뛰어난 자에겐 뛰어난 대우를 해준다.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교육을 시켜야 해. 그리고 일자리를 만들어야 해!’
신유성은 이지번을 불렀다.
“책을 대량으로 만드는 일은 어찌 되었나?”
“지금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학교를 세운다.”
“학교라니요?”
“서당 같은 곳이다. 모든 지역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를 세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집에는 세금을 일할 줄여준다고 해라.”
신유성은 자신이 아는 초등학교 과정을 떠올렸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해주는 국어 교육 그리고 간단한 산수와 세상의 이치에 대해 알려주는 과학. 3가지 과목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지번은 감동했다.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유성은 그것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다 나를 위해서 하는 거다. 그렇게 감동할 것 없어.”
이지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유성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순 없었다.
“일단 기본 부분은 그렇게 하고 특별히 재능이 있어 보이는 이들은 따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하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발굴해 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서자는 어쩌시겠습니까?”
“서자가 뭐 어쨌다고. 그런 것은 신경 쓸 것 없다. 능력이 있으면 내 가신으로 쓸 것이고 없으면 양반이라도 내친다.”
신유성의 뜻은 확고했다.
이지번은 문득 박지화를 떠올렸다. 서자이기에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버렸던 인재.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길이 열린 것이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후 이지번은 박지화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편, 박지화의 집에서 접종을 마쳤던 이이는 부산포에서 북쪽으로 가는 배를 찾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어딘가 산속에 들어가 승려라도 되는 것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박지화의 집에 머물다보니 박지화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신유성에게 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내 의문에 대한 답을 내줄 수 있을까?’
이이는 자신과 같이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신유성이라면 뭔가 얘기가 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만나고 싶어졌다.
그 마음이 이이를 나진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진으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이가 양반가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길을 막지는 않았지만 어딜 가나 북쪽으로 가는 것을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허나, 그 정도로는 이이를 꺾을 순 없었다.
‘가고야 만다.’
강원도에서 산을 타고 북쪽으로 가는 것을 실패하자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배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이는 부산포에 도착했다.
왜관이 있는 부산포에서는 북쪽으로 가는 배를 찾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타시죠.”
패물을 주자 코그선을 모는 상인은 이이를 태워주었다.
“그런데 이 배는 처음 보는 배군.”
“도독나리께서 명해서 만든 배라고 합니다.”
“도독께서?”
바람의 힘을 이용해 쭉쭉 북쪽으로 나아가는 코그선은 조선의 수군을 만나도 그냥 통과였다. 화물을 싣고 나진으로 가는 배는 잡을 수 없었다.
이이는 결국 나진에 도착했다. 그리고 활발한 부두를 보고 감탄했다.
‘여기가 이런 정도라니.’
함경도에 대한 조선의 인식은 시골구석이었다. 그래서 나진에 신유성이 있다고 해도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틀렸다.
나진은 한양보다도 더 활발했다.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군사들. 토벌을 하기 위해 출항하는 군선들. 어딘가로 이주하기 위해 배를 타는 사람들. 물품을 싣고 내리는 작은 상선들. 만선으로 돌아온 어선들.
‘살아있네.’
생기가 느껴지는 풍경에 이이는 잠시 한쪽 구석에 서서 감상했다. 살랑거리는 바닷바람과 사람들의 생기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멋지구나.’
걸음을 옮겨 안으로 가자 검사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이는 신유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건 어렵겠군요. 일단 누구신지 여기 적어주시죠.”
이이의 이름과 간단한 인적 사항이 명부에 적혔다. 병사는 호패를 보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통과시켜 주었다.
“어떻게 하면 도독나리를 뵐 수 있겠는가?”
“정 만나 뵙고 싶다면 일단 관청에 가서 얘기를 해보시지요.”
이이는 관청으로 향했다. 관청에는 수많은 소년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이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째서?’
하지만 곧 이해했다. 아이들은 유창하게 일본어나 여진어를 하면서 사람을 상대해주고 있었다.
‘놀랍구나.’
아이들이 외국어를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런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도독나리를 뵙고 싶다고 했더니 이곳에 와보라고 해서 왔네.”
“그럼 저기서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뵙고 싶다는 분들이 많아서 일단 다른 분이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시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낙담하며 나가는 이들을 보며 이이는 자신도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저 얼굴 한 번 보는 것 외에는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순서가 오자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 소년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앉으시지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도독나리를 뵙고 싶어서 왔네만.”
“그러십니까? 무슨 목적이시죠?”
“그저 궁금했다네.”
질문을 하는 소년 이산해는 이이에게서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마치 모든 것을 해탈했다는 느낌의 이이는 꾸밈이 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신유성을 만나기 위해 아부를 하거나 거창한 계획을 떠벌렸다. 혹은 뇌물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이는 그냥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그것이 이산해에게는 특별해 보였다.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이이라네.”
“저, 혹시 그럼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를 하셨던?”
“나를 아나?”
“알다 뿐입니까?”
이산해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자 이이 또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여기 있을 줄이야.”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런 게 인연 아니겠나?”
두 사람의 분위기는 금방 훈훈해졌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릴 듣고 자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느꼈다.
“많이 놀랐다네. 도독나리께서 해내신 일들이 많으셔서.”
“아직 놀라시려면 멀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학교? 뭐하는 곳인가?”
이산해는 신이 나서 신유성이 세우고자 한 학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이이는 충격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모두 다 가르친다고?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장차 쓰겠다고 하셨나?”
학교에서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당에서도 교육은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사람을 쓰겠다는 이야기는 달랐다.
더구나 여자아이도 잘한다면 쓰겠다고 했으니 놀랄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죠.”
“허어! 그 분은 성군이라도 되시는 건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시다고 봐야죠.”
“응?”
“그냥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뜻이 달라도 가는 길이 같으니 갈라질 때까지만 같이 걷자고 하시는 분이죠.”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분인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듣기로는 맛있는 것을 먹고 새로운 것을 즐기기 위해 하신다고 하시지만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이는 충격을 받았다.
‘고작 먹고 노는 일 때문에 이런다고?’
생사에 대해 고민하던 이이에겐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신유성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어떻게 한 번 만나 뵐 수 없겠나?”
“음,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요즘 엄청나게 바쁘셔서.”
“꼭 좀 부탁하네.”
면담을 끝내고 나온 이이는 관청을 벗어나며 거리를 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생기로 가득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진은 그야말로 생명이 약동하는 곳이었다.
‘이게 다 즐기기 위해서라고?’
이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꼭 만나봐야 하는가? 대체 누군데 그러나?”
“이이라는 선비입니다.”
“이이?”
심장이 쿵했다. 신유성은 이이가 찾아왔다는 말에 경악했다.
‘아니 이율곡이 나를 왜?’
구도장원공.
조선의 천재를 언급할 때 뺄 수 없는 남자 율곡 이이.
그가 신유성을 보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한 번 만나보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분명 도독나리께 도움이 될 사람입니다.”
“으음, 그렇다면야 한 번 만나보도록 하지.”
이산해도 아니고 이지번이 직접 추천하니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눈빛은 얼른 이이를 등용해서 밑에다 넣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요즘 일이 좀 많긴 했지.’
신유성까지 도와야 할 정도였다. 북해도에서 양성하던 아이들마저 대거 데려와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했다.
나진의 인구는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젠 배를 얻어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배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진으로 향하는 배가 있는 곳에서 신유성의 병사가 되고 싶다고만 말하면 누구나 태워줬다. 이 때문에 제물포와 부산포 그리고 여러 항구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사람이 많으면 좋긴 한데.’
신유성은 대답을 해놓고 걱정이 됐다.
배고픈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원하는 것을 주면 되니까.
하지만 학문을 익힌 사람들은 얘기가 달랐다.
뜻이 다르면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지함의 마음을 얻게 된 것도 행운에 가까웠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나직하게 한숨이 실내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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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