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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욕망
“어서 오세요.”
집으로 돌아오니 주녹정과 나츠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식사를 하기가 무섭게 신유성은 주녹정을 안았다.
“상공.”
“응?”
“오늘은 계속 저랑 있어요.”
작은 투정. 신유성은 웃으며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아니에요. 있다가 나츠와 레이도 안아주셔야죠.”
망설임 없는 대답만으로 만족했는지 주녹정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신유성이 놓아주질 않았다.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좀 더 이러고 있고 싶은 데?”
주녹정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신유성의 가슴에 기댔다.
나츠와 레이의 차례는 다음 날로 미뤄졌다. 하지만 아무도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다. 누가 뭐래도 여자들 서열에서 최고는 주녹정이었다.
신유성은 바로 남사고와 만나지 않았다. 일이 밀리고 있었으나 주녹정을 비롯해 나츠와 레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집중했다.
즐거운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실컷 먹고 마시고 뒹군 신유성은 천천히 관청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바쁜 상황에서 신유성이 일을 처리 하지 않았으나 이지번을 비롯한 사람들은 아무도 신유성을 탓하지 않았다. 아이를 빨리 갖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 벗입니다. 한 번 만나보시죠.”
신유성은 곧 남사고와 마주하게 되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날 좀 도와주시게.”
“무엇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더 나은 세상.”
“그것을 위해선 물러나실 각오도 하신 겁니까?”
신유성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
‘나를 위해서.’
이기적인 사고 방식을 신유성은 숨기지 않았다.
“날 위해서네. 내가 먼저야.”
“소인이시군요.”
“그렇다. 소인이다. 하지만 세상은 소인으로 넘치지. 학문을 해도 마음은 소인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사고 또한 책 좀 봤다는 선비들이 뒤로는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꽤 보았다.
“허나 법도는 지키라고 있는 것이죠. 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습니까?”
“그럼 지키는 사람만 사람이고 나머진 짐승이니 마구 잡아 죽이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니겠는가? 내 기준에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선을 베풀면 되는 건가? 나는 나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진 다 짐승으로 본다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옳은 것 아니겠나?”
“그것 아닙니다.”
신유성의 궤변을 늘어놓는 것에 남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궤변 속에 묘하게 뼈가 들어있었다.
“농담 좀 해봤네.”
‘무척 진지해 보였습니다만.’
남사고는 말을 삼켰다.
“내가 원하는 것은 더 큰 나라네. 나는 야망이 크니까.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정복해서 더 많은 맛있는 것들을 먹고 재미있는 것들을 즐기고 싶을 뿐이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생각이고.”
“혼자만 살기 좋으면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자네 튀긴 닭 먹어봤나?”
“네, 먹어봤습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지는 아나?”
“압니다.”
튀긴 닭. 치킨. 이것은 이 시대에는 그야말로 귀한 음식이었다. 튀김 가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밀가루 자체가 조선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대량의 기름을 이용해 닭을 튀겨낸다. 조리법은 간단하지만 해 먹으려면 정말 손도 많이 가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음식이었다.
“상상해보게. 그런 것을 심심하면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세상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네. 그리고 그런 세상이 오면 튀긴 닭보다 훨씬 더 귀한 요리들이 많이 생길 거 아닌가? 더 많은 요리 재료들을 한데 모아놓고 이것저것 만들다보면 재미있는 요리도 나올 거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접하다보면 또 아나? 어떤 재미있는 것이 있을지.”
신유성은 남사고의 상상력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이이 때는 등용에 실패했지만 남사고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지번에게 간단히 물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냈다.
남사고는 격물치지에서 크게 감명을 받아 호까지 격암이라고 지은 사람이었다.
최근에는 역학, 천문, 지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거렸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남사고의 욕망을 들여다 본 신유성의 설득은 계속 이어졌다.
“난 말일세.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히 기록해두고 싶네. 계속 북쪽으로 가면 어떤 세상이 있는지. 바다를 건너면 어떤 땅이 나오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기록하고 그것들을 이용해 더 즐겁게 살고 싶다네.”
남사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와주게. 자네에게 나쁜 짓을 하라고 하지는 않겠네. 싸우라고 하지도 않고. 대신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일은 도와줄 수 있지 않겠나?”
지리에 흥미를 가진 남사고에게는 너무나 크나큰 유혹이었다.
“그거 아나? 왜의 북쪽에는 커다란 섬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이누가 살고 있지. 아이누는 원래 사람이란 뜻이라네. 재미있지 않나? 사람을 사람이란 말로 구분한다는 게?”
신유성의 이야기에 남사고는 점점 빠져들었다. 감동을 일으키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남사고의 욕망을 자꾸만 부채질하는 신유성이었다.
‘이것은!’
남사고는 저항하려 했다.
‘버티기 힘들다!’
허나 소용없었다. 마음이 이미 기울고 있었다.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것들.
전혀 다른 형태의 배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온 곳의 학문.
궁금했다.
“내가 듣기로 말이네 남만인들의 조상들도 학문을 했었네. 날 도와준다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게 최대한 지원해주겠네.”
남사고가 세상을 둘러보며 기록을 한 것만 챙겨도 신유성에겐 이득이었다.
‘돈 따윈 쓰라고 있는 것!’
물론 그렇다고 가정제처럼 쓸 생각은 없었다.
“재물을 탐하는 것은 상스러운 것이겠지만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나? 자네가 학문을 위해 쓴다면 후세를 위한 일 아니겠나? 제발 내 돈을 써줬으면 하네.”
한 마디로 ‘내 돈을 가져가!’라고 말하는 신유성이었다.
“후우.......”
남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허나, 자꾸만 두근거렸다.
신유성과 손을 잡는다면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해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모두 학문을 위해서다.’
결국 남사고는 신유성의 손을 잡고야 말았다.
“허허, 잘 생각했네.”
“내가 할 일은 뭔가?”
“너무 그럴 것 없네. 그 분은 원래 그런 분이야. 욕심이 많으시지. 하지만 그 욕심이 꼭 나쁜 건 아니라네.”
“누가 뭐랬나?”
이지번의 일을 돕게 된 남사고는 슬쩍 투덜거렸다. 남사고가 합류하자 일은 한결 쉬워졌다.
“준비가 되면 난 떠날 거네.”
“그래, 그게 약속이니까. 대신 준비가 될 때까지 일해야 한다네.”
“알았네.”
남사고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신유성의 이야기를 듣고 해안을 따라 북쪽을 한 번 둘러볼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것이 탐험가 남사고의 시작이었다.
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는 신녹의 소문에 결단을 내렸다.
“체첵을 그에게 보낸다.”
우호의 의미로 딸을 보내겠다고 하자 부족의 전사들은 모두 기오창가를 지지했다. 신녹은 여진인들에게 꿈과 같은 곳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신녹을 갔다 온 이들은 칭찬하기에 바빴다.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그곳, 신녹.
기오창가도 신녹에 가보고 싶었으나 다른 부족들과의 경쟁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서 전사들만 보내 거래를 해왔을 뿐.
하지만 거래를 할 때마다 막대한 부를 얻게 되니 신유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성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면 여러 모로 더 좋으리라 생각해 결국 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체첵은 그렇게 신유성에게 보내졌다. 한 번 보냈으니 다시는 돌려받지 않겠다는 말을 꼭 전하게 했다.
한편, 서둘러 움직인 타이란은 신녹에 도착했다. 신유성은 볼 수 없었으나 신녹은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기가 경마장!”
경마장에 들어서자 막 경주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타이란은 햄버거를 들었다.
종이를 벗기고 햄버거를 한 입 물었다. 빵과 고기가 입안에서 부스러지며 한 데 어우러졌다. 씹으면 씹을수록 소스의 맛이 진하게 퍼지는 느낌.
“으음!”
말이 안 나왔다.
순식간에 뚝딱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입맛을 다시는데 말들이 출발했다.
박력 넘치는 말발굽 소리가 관중석에 전해지자 타이란은 말에 집중했다. 돈을 걸지는 않았으나 좋은 말을 보는 것은 숨 쉬는 것과 같았다.
‘다 뛰어난 말들이구나!’
갖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들었다.
말들이 한 바퀴 돌아 결승점에 가까워지자 관중석의 함성이 점점 커졌다.
“달려!”
“너한테 햄버거 하나 걸었다!”
“선물을 사게 해줘!”
염원이 쏟아져 나왔다. 작은 욕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응원했다. 욕망을 이루기 위한 응원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여긴 전장인가!’
엄청난 기세였다. 타이란은 감탄을 넘어 감동했다.
‘멋지다.’
타이란은 감동을 더 느끼고 싶어 경주가 모두 끝날 때까지 벗어나지 않았다.
“뭣이? 오도리족의 족장 딸이 왔다고?”
“그렇습니다. 도독께 바쳐진다고 합니다.”
딸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를 의미했다. 휘하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신유성이 이를 받아준다면 건주여진의 오도리족은 신유성의 부하나 마찬가지인 셈이 된다.
신유성이 따로 뭔가 챙겨주지 않더라도 기오창가의 입지는 확실히 단단해지게 된다. 기오창가를 거치지 않고 신유성과 거래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랬다가 기오창가의 딸인 체첵이 시비라고 걸면 여러 모로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으음!”
타이란은 속이 불편해졌다.
‘밑으로 들어가긴 좀 그런데.’
기오창가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타이란만큼 거대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기오창가가 오도리족을 이끈다면 타이란은 해서여진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력만 놓고 보면 타이란이 몇 수 위였다. 허나, 이것도 곧 역전될 수도 있었다. 신유성과의 관계는 이제 명나라보다 더 중요했다.
명나라는 조공이란 명목으로 거래를 해야 하지만 신유성은 그런 거 없었다.
팔 것이 있으면 가지고 와서 자유롭게 팔고 사고 싶은 것은 대가를 치르면 얼마든지 내주었다.
자유로운 교역.
이것 하나만으로도 명나라보다 훨씬 더 가치 있었다.
‘그래, 사위로 삼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일단 만나자. 체첵보다 먼저 안겨야 해.’
타이란은 서둘러 본거지로 사람을 보내 딸 사르나이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니까 딸을 후실로 받아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보다 돈독한 관계를 원하고 계십니다.”
타이란의 부하가 찾아와 신유성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전했다. 기오창가의 딸인 체첵을 받아들이기 전에 잠시만 기다렸다가 사르나이를 먼저 받아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받아주세요. 전 환영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주녹정이 나서서 의사를 표명했다. 주녹정의 입장에선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족장들과 혈연을 맺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관계를 맺는다면 명나라의 침범 따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군을 데려온다고 해도 산해관을 넘어서는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운 것이 현재의 명나라 군대였다.
“이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여자가 많으면 피곤해지지만 그렇다고 안 받아들일 순 없었다.
‘타이란과 기오창가라.’
두 사람 다 확실히 뛰어난 족장들이었다.
‘이들과 뜻을 합한다면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
신유성은 문득 동쪽을 바라보았다.
눈은 망망대해를 넘어 자리 잡은 아메리카 대륙을 그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