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신의 유희-82화 (82/271)

0082 / 0271 ----------------------------------------------

흔들리는 조선

조사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자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큰 돈을 만지기 시작한 사대부의 자식들이 나왔다.

“이 미친놈들은 숨길 생각도 없었나 보네.”

“그러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약탈을 했으면 물품을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상선에 실렸던 물품은 상당한 가치를 지녔었기 때문에 은밀히 처분하기에는 양이 많았다. 딱 한 척이었다면 여기 저기 나눠서 거래하면 숨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배를 털면서 팔아먹었기에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얼른 보고하지. 저 놈들은 그냥 내버려두자고.”

기생을 끼고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의 자식들을 힐끔 본 정보원들은 바로 나진으로 보고를 올렸다.

파들파들.

정보를 받은 이지번의 손이 떨렸다.

‘이래선 아니 되는데!’

조선을 등지고 신유성을 섬기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조선에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완벽한 전쟁 명분이다.’

선제공격을 당했다. 상선이 털렸다. 이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신유성은 건드려선 안 될 인물이었다.

특히 얼마 전에 사르나이와 체첵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입만 벙긋하면 기병 1만 쯤은 순식간에 모을 수 있었다.

지금 북진을 준비하는 기병들만 해도 살벌했다. 북해도에서 건너온 기병들은 매일 같이 신유성의 집을 향해 절을 하며 기도를 올릴 정도였다.

‘그들에게 알려진다면.’

북해도의 기병은 광신도들이었다.

이를 알고 있기에 이지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턱대고 전쟁을 막을 순 없었다.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먹잇감을 던져주지 않는다면 북해도 기병들은 조선을 유린하기 위해 쳐들어갈 터였다.

기병 1만이라면 조선이 어찌어찌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유성의 전력은 기병 1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

큐슈의 요시시게가 나서면 조선 남부는 금방 쑥대밭이 된다.

북쪽에서는 북해도 기병을 비롯해 여진 기병들이 날뛰고 남쪽에서는 큐슈의 해군이 날뛰면 조선이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더구나 일이 터지면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명나라 황제가 임명한 도독의 일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병력을 보내 조선 멸망에 한 손 보탤 수도 있었다.

‘빨리 이 일을!’

이지번은 서둘러 주녹정을 찾았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상공의 배를 공격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꿈틀. 주녹정의 입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럼 쳐야지 뭐하는가?”

“허나, 주군께서는 공을 들이고 계시던 곳 아닙니까? 이대로 친다면 점령은 가능하나 안정을 시키려면 시일이 오래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사신을 보내서 해결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신이라.”

주녹정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이지번은 감히 마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지번의 나이가 훨씬 많다고 하지만 주녹정은 결국 모시는 사람의 정실이었다. 나이가 어려도 상전인 셈이었다.

“그대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상공께서도 그걸 원하셨으니. 허나, 제대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다면 조선은 내 손으로 지우겠다.”

고작 상선이 털린 것 가지고 그러냐고 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녹정이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신유성의 보호 아래 있던 상선이 털린 것은 신유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았다.

권력자는 도전을 받게 되었으면 싸워야 했다.

싸우지 않으면 약해졌다고 여겨지게 된다.

황궁에서 자란 주녹정은 누구보다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지번은 조용히 물러났다.

“어쩔 셈이십니까?”

“어쩌긴 일단 책임을 물어야지. 조정이 어찌 나오는지에 따라 방법을 달리 하는 것 말고 뭐가 있겠느냐.”

이지번은 이지함과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신유성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조선의 왕실과 양반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싸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

‘비극은 피해야 하는데.’

무력으로 해결을 보는 것은 이지번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명나라에도 사람을 보내놓죠. 일단 조선 조정을 압박해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겠다.”

“그런데 왜의 영주들은 어쩝니까? 그들이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불만을 품을 겁니다.”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

이지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들에게 보상을 해줄 재물을 조선에서 받아내면.......’

대규모 적자를 피하는 방법으로는 최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장 피를 보는 것은 역시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한 수탈이 더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어찌 해야 하는가!’

윤원형에 대한 미움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차라리.......’

슬쩍 지도를 보던 이지번은 눈을 빛냈다.

조선, 조정.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러니까 누가 도독의 배를 건드렸다는 소리 아닙니까?”

“대체 어떤 놈들이!”

조정의 대신들은 기가 막혔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이었다.

“왜구를 토벌하라고 했더니 어찌 이런!”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왜구 토벌을 일시적으로 중단 되었다. 그리고 책임자들은 모두 한양으로 소환되었다.

한양에 오지 않는 선택지는 없었다.

제 발로 오지 않는 이들은 죄인으로 간주해서 잡아왔다.

“이제 어찌합니까?”

“으음. 이들을 넘겨주는 것으로 끝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범인들을 잡았다.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이들을 인도하는 것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허나, 이지번은 그럴 수 없었다.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이지번이 보낸 사신의 말에 윤원형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상 어떻게 책임을 지라는 겁니까?”

“설마 조선 조정에서는 모른 척 하시려는 겁니까?”

“뭘 말입니까?”

“죄인들에게 왜구토벌허가를 내준 것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탔던 배는 조정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까? 그런 무도한 자들에게 위험한 일을 허락한 것도 문제입니다.”

“커험!”

물고 늘어졌다. 만약 물고 늘어지는 상대가 약자였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버틸 수도 있었다. 허나, 신유성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었다.

건드려선 안 될 벌집이었다.

무시할 수가 없었다. 사대부의 자식들을 넘기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명종은 이 때문에 정말로 앓아누웠다.

결국 굴욕적인 사건이 실록에 기록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픈 척 하면서 신유성과 대면하지 않았던 일들이 이 한 번의 사건으로 모두 허사가 되었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들이.’

대신들의 원한이 쌓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편을 가르고 서로 물어뜯었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신유성을 견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윤원형이 부들부들 떨면서 질문을 던졌다.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제주를 넘기십시오.”

“뭣이?”

대신들의 노성에 이지번이 보낸 사신은 움찔했다. 손에 칼이라도 있었다면 바로 목을 칠 기세였다.

“더 있습니다. 앞으로 조선은 왜구토벌허가를 내릴 때 도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합니다.”

영토를 내놓으라고 한 것도 모자라 내정 간섭까지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체면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걸려있는 일에 체면만 차릴 순 없었다.

‘빌어먹을!’

명나라 사신을 대하는 기분을 맛본 윤원형과 대신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건 너무 과한 처사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행동일 뿐입니다.”

“조선 조정의 책임은 부정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죄인을 넘기고 피해를 두 배로 보상하겠습니다.”

“겨우 그걸로요? 도독나리의 일을 방해한 중죄를 저지르고 지금 그냥 넘어가겠다는 겁니까?”

실랑이가 벌어졌다. 조정 대신들은 체면을 내던지고 어떻게 해서든 조건을 낮추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하루 만에 얘기가 안 끝나자 다음 날 하자고 하고는 사신을 대접하겠다며 연회를 열려 했다. 허나, 사신은 거절했다.

“날 죽일 셈이오?”

사신은 닌자들의 존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후지바야시 켄이 최근 들어 닌자들을 엄청나게 불러 모았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닌자들은 신유성을 신으로 섬기는 광신도에 가까웠다. 사신은 조선 조정으로 떠나기 전에 한 과격한 닌자의 방문을 받았었다. 말은 별로 없었다. 다만 목이 부러진 인형을 선물로 놓고 갔을 뿐.

그게 더 무서웠다.

‘연회는 무슨 얼어 죽을! 목숨이 걸린 문젠데!’

사신은 연회를 거절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기나긴 협상이 이어졌다. 결국 조선 조정은 함경도를 넘겨주는 것과 왜구토벌허가를 낼 땐 신유성의 허가를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평안도와 제주를 뺀 대가로 지금까지 조선에서 만든 판옥선을 모두 넘기는 것과 죄인들의 집안 재산을 몰수해 넘겨주는 것도 포함되었다.

치욕스러운 협상에 조선의 대신들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신들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진 않았다. 오히려 위협에 맞서겠다며 군사를 더욱 늘리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을 더욱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나쁘지 않군.”

외교의 결과로 함경도를 무혈로 얻게 되었다. 주녹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죄인들은 모두 처벌했으며 빼앗겼던 재물도 모두 되찾았다.

“우선 손해를 본 상인들에게 보상을 해라. 죄인들은 목을 쳐서 평안도 쪽으로 가는 길목에 효시하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왜의 영주들에게 고지하고.”

“네? 어인 말씀입니까”

“그들을 달래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지번은 망설였다. 일본의 영주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신유성을 원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공격을 한다거나 할 리가 없었다. 대신 조선쪽에 분풀이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대가 걱정하는 것은 안다. 하지만 윤씨들이 조정을 쥐고 흔드는 한 백성들의 삶은 나이질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이지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빨리 그들을 몰아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번 일로 정신을 차렸다면 좋았겠지만 조선 조정의 행보는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함경도를 잃어 수입이 대폭 줄어든 것을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더욱 쥐어짜기 시작했다는 것과 군사를 늘린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허면 저는 함흥으로 가겠습니다.”

이지번은 서둘러 함흥으로 떠났다.

함경도 사람들은 더 이상 나진으로 몰려들지 않았다. 이젠 나진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이렇게 좋을 때가!”

조선의 조정에서 보낸 지방관들이 모두 물러갔다. 빈자리는 나진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이 대신했다.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은 갑자기 호강하기 시작했다.

지급 장비라면서 털옷을 비롯해 군복을 지급했다. 평소 자신들이 입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고급스러워서 입어도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진짜 그 분이 진짜 나랏님이시지. 아이고! 내 예전부터 알아봤다니까!”

무기도 새것이었다. 군복도 새것이었다. 여기에 먹을 것도 풍족하게 나왔다. 굶주릴 일이 없어졌다. 더구나 돈도 지불되었다. 이것이 가장 컸다.

“아니 군역이면 그냥 부리는 거 아니었나?”

“아니라던데? 고생하니까 내리는 녹봉이라던데?”

“참말로 내가.......”

어떤 병사들은 울먹거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함경도 전체에 내려졌던 세금 문제가 일시에 해결 되었다.

더 이상 조선에 내던 것처럼 많이 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각종 지원책이 쏟아졌으며 길을 만들고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인부가 필요하다며 고용했다.

대규모 토목 건설이 시작되자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인부들은 후하게 받은 임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더 나아가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니까 잘들 하라고. 알지?”

“암요. 알죠.”

어느 누구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겨우 좋은 사람 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영원히 계속 땅의 주인이 되길 바랐다.

1556년의 시작에 함경도 주민들은 신유성을 향한 경의를 가슴에 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