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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조선
함경도는 신유성의 땅이 되었다. 지방관들은 모두 물러났다. 빈자리는 빠르게 채워졌다. 겉보기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아 보였다.
허나,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정도로 끝내다니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주군께서는 그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셨다.”
“하지만!”
“주군의 명은 지켜져야만 한다.”
후지바야시 켄의 말에 항의하던 닌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켄도 불만이었다. 평안도와 제주도까지 넘어왔다면 화를 풀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넘어온 것은 함경도 뿐.
‘함경도는 원래 우리 것이나 다름없었다.’
함경도의 민심이 그랬다.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슬쩍 찔러주기만 하면 거사를 일으켜 전부 신유성의 병사가 되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 먼저 함경도를 떼어내며 부담을 덜어냈다.
반면 함경도에 비해 민심이 조금은 양호한 평안도나 거대한 섬인 제주도는 내놓지 않았다.
‘이런 것으로 보상이라고?’
부족하다고 켄은 생각했다. 그러나 신유성이 돌아오기 전에는 이지번이 책임자였다.
“방법이 있다.”
하지만 직접 싸우지 않는 거라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말씀하시죠.”
“민심을 동요시킨다.”
켄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광기는 전염되어 다른 닌자들의 눈에서도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죠. 쳐들어가지만 않으면 되죠.”
“그래, 쳐들어가지만 않으면 된다.”
“조금 바빠질 것 같습니다.”
“바쁘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주군을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구호를 외친 닌자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이제부턴 정말 바빠질 테니까.
북경.
“하여 조선의 함경도가 도독에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
환관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가정제는 신나게 웃었다.
‘내 예상대로!’
조선과 신유성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질 못했다. 결국 함경도를 빼앗긴 조선이었다.
“하옵고 항주에 들렸던 도독께서는 남쪽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남쪽?”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애매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봐야 별 거 없었다. 일본이 있는 방향과는 너무 달랐다.
‘일부러 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인가?’
가정제는 나름 분석을 해보았다. 그러다 머리가 아파지자 약을 먹고 여자를 안았다.
분석은 엄숭이 대신하게 되었다.
여자를 안은 뒤 한숨 자고 일어나자 두통이 사라졌다. 그제야 가정제는 엄숭을 불렀다.
“아마도 조선의 체면을 세워주려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음?”
“도독께서 계셨다면 조선의 왕이 사죄해야 맞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가정제는 넘어가주었다. 사실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항주에서 있었던 일이나 자세히 말해보라.”
엄숭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항주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신유성이 척계광을 만나더니 대뜸 척계광이 육성하고 있던 병사들의 절반가량을 떼어간 사실을.
“흠, 왜 탐을 냈는지는 아나?”
“듣기로 절강도사첨서가 상당히 유능하다고 합니다.”
척계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엄숭으로서는 하고 싶지 않은 칭찬이었으나 그래도 해야 했다. 가정제를 속인다면 총애를 잃게 되고 그것은 곧 권력의 상실로 이어지니까.
“상당히 뛰어나군.”
가정제는 척계광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생각했다.
‘녀석을 키운다면?’
신유성과 달리 척계광은 명나라 출신이었다. 신유성을 왕으로 봉하기로 했으나 가까이 두기에는 꺼려지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유능해도 너무 유능했다.
자고로 유능한 부하는 상전을 두렵게 만든다. 뛰어난 부하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겁이 나는 것이다.
‘적당히 견제할 수 있다면 딱 좋은 수.’
무엇보다 알탄 칸을 비롯한 부족들이 수시로 명나라의 북방을 약탈해 힘든 상황이었다. 왜구의 문제는 이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니 북방을 더욱 강화시킬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를 신유성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나 척계광의 등장으로 가정제는 마음을 바꾸었다.
‘둘이 동시에 하면서 서로 견제한다면 딱 좋다.’
가정제는 신유성이 너무 크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 척계광이란 자를 불러오라.”
이후 황궁으로 불려간 척계광은 가정제의 딸인 청교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
한편, 항주를 떠났던 신유성은 필리핀에 도착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것 참.’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사고와 함께 한 섬의 원주민과 끈덕지게 대화를 시도하며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게 되었다. 북해도의 경우에는 그쪽에 살던 일본 출신 주민들과 아이누와의 교류가 있어서 통역이 존재했었다. 허나, 필리핀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인종도 완전히 다른 이들로 보일 정도.
또 다른 문제는 제대로 된 국가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러 섬을 돌아다녀 봐도 그저 마을 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다.
왕국이 있고 왕이 있다면 왕을 휘하에 두는 것으로 지배력을 금방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경우에는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복속시켜야 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항상 원주민은 항상 우호적이지 않았다. 근처에 가면 싸우려고 드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자잘한 문제들이 존재했다.
‘포기할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태풍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원주민과 대화하던 남사고는 태풍의 존재에 대해 알려왔다. 매해 크고 작은 태풍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왜 이들이 제대로 된 왕국을 건설하지 못했는지 좀 알겠다.’
문화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필리핀 원주민들에게도 문자가 있었다. 하지만 마을 단위로 살았다.
숫자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통일된 국가로서의 기능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신유성은 이 모든 게 태풍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좀 기억이 나네. 수도가 침수되던 나라였는데.’
수도인 마닐라도 엄청난 태풍이 불면 물에 잠기는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었다. 잘못된 도시 건설에 의한 면도 컸지만 어쨌거나 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나라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클 수도 있다.’
계산을 해보던 신유성은 철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냥 물러나기도 어려웠다.
‘에스파냐!’
현 시점에서 세계 최대 강국으로 손꼽을 수 있는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노리고 있었다. 한 번 넘어가면 그만큼 전략적으로 불리해진다.
신유성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차돌은 임거정과 대련을 한 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더운 나라에 오게 되어 힘들었지만 아직은 겨울이라 살만했다.
“여긴 정말 더운 곳 같네요.”
“그래.”
물이 미지근했다. 찬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신유성이 항상 끓인 물을 마시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차돌은 미지근한 물은 여러 차례에 나누어 마시며 돌을 끌어안았다. 돌의 서늘함이 열기를 좀 더 빨리 식혀주었다.
“응?”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늘어졌던 차돌과 임거정은 금방 독 오른 독사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원주민에게 습격 받는 일은 종종 있었다. 몇몇은 우호적이긴 했다. 물건을 교환한다는 조건부였지만.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선 신유성의 함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애잖아?”
소리가 난 곳에는 원주민 꼬마가 서있었다.
꼬마는 멀뚱멀뚱 차돌과 임거정을 바라보았다.
“야, 이리 와봐.”
차돌이 불렀지만 꼬마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뭔 소린지 모르니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다.
꼬마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차돌은 가까이 가길 포기했다.
차돌과 임거정은 식사를 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러자 꼬마가 슬그머니 쫓아왔다. 그리고 고기를 굽는 병사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먹을래?”
차돌이 고기를 한 점 집어 내밀자 꼬마는 갈등했다. 그러다 천천히 다가와 고기를 받아먹었다. 뜨거워서 호호 불어 먹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병사들은 고기를 한 점씩 나눠주었다.
꼬마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는 돌아갔다.
다음 날, 꼬마는 일행을 데려왔다. 병사들은 꼬마들에게 이런 저런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신이 나서 막 떠들었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으나 병사들은 그냥 웃으며 상대해주었다. 이윽고 아이들은 병사들을 따라다니며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신유성과 남사고를 비롯해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은 원주민과 대화하며 말을 배우느라 바빴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과 병사들은 친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좀 더 큰 아이들도 다가왔고 곧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가 이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다른 무리의 원주민들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섬의 다른 방향에서 쳐들어온 약탈자들에게 원주민들은 쫓겼다.
전사의 숫자가 꽤 많았다. 그리고 강했다.
“무슨 일이지?”
“적! 적! 도와줘!”
신유성의 질문에 마을 촌장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 전투 준비! 침략자들과 싸운다!”
병사들은 금방 진을 짜고 전투에 들어갔다. 반면 마을을 털려고 하던 약탈자들은 갑자기 많은 수의 병사들이 나타나자 주춤했다.
“쏴!”
어느새 장전된 쇠뇌에서 화살이 날아갔다.
“아아아아아아악!”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약탈자들은 도망쳤다. 그러자 임거정과 차돌이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뒤를 쫓았다.
“아아아아악!”
쳐들어왔던 약탈자들은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피해를 입은 마을에는 슬픔이 감돌았다. 하지만 촌장은 얼른 시체를 치우게 하더니 의식을 치렀다.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간단한 의식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것은 연회였다.
사람들이 음식을 잔뜩 꺼내오더니 먹고 마시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촌장의 부름에 연회에 참석했던 신유성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또 뭔가?’
그때 여자들이 병사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엄청나게 야한 복장을 한 여인들은 병사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눈빛에 담긴 끈적한 욕망에 이끌린 병사들은 하나둘 일어났다.
신유성에게도 여자가 다가왔으나 신유성은 거절했다.
“차돌. 네가 가라.”
“네?”
“잔말 말고 어서. 저 여자 울겠다.”
차돌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그렇게 원주민과 병사들이 하나로 뭉치는 밤이 흘러갔다.
약탈자들이 들이닥친 다음 날부터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이제는 마치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친절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신들을 지켜달라는 염원이 서려 있었다.
‘으음.’
신유성은 고민했다. 일단 우호적인 원주민을 얻는 것에는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지켜줄 순 없었다.
‘난 바빠.’
정말 바쁜 몸이니까. 허나 모처럼 얻은 기회인데 그냥 버리기도 아까웠다. 데리고 다닐까 생각도 해봤으나 그것은 보급을 더욱 빠르게 줄어들게 할 뿐이었다.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하지만 잘 떠오르진 않았다. 그래서 남사고를 불렀다.
“좋은 방법 없을까?”
“계륵 같다는 것이군요.”
그렇다. 필리핀은 신유성에게 계륵이었다. 먹을 것은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
“그렇다. 하지만 기왕이면 이곳의 섬들을 점령해 하나로 묶고 싶다. 문제는 해마다 몰아치는 태풍 때문에 개발이 여의치 않다는 거지.”
그렇다. 필리핀의 원주민들이 문자를 가질 정도로 발전했으면서도 제대로 된 왕국을 이루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날씨가 개떡 같아서 살던 터전까지 날려버릴 정도니 뭔가 꾸준히 건물을 짓고 발전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다.
왕이 되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될 턱이 없었다. 날씨는 그냥 현상일 뿐이니까. 결국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발전에 대한 의지가 줄어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훈련을 시키시면 어떻겠습니까?”
“응?”
“훈련을 해서 좋은 무기를 쥐어주는 겁니다. 물론 지배를 받아들인 마을들만요.”
“지금은 그 수밖에 없겠군.”
남사고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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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