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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84화 (8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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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조선

원주민들은 기꺼이 훈련을 받아들였다. 우선 건장한 남자들은 검을 쥐게 되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필리핀에서는 금속 제품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무기의 질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살을 손쉽게 가르는 검은 탐나는 무기였다.

“너희들은 이제 내 부하다.”

신유성의 말을 남사고가 촌장에게 통역해주었다. 그러자 촌장이 이를 외쳤다. 그러자 모여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강자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제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무기를 쓰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계속 복종하면 나의 상인들과 거래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었다. 옷도 있었고 도자기도 있었다. 마을 남자들의 눈에 열의가 맺히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훈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임거정이 앞으로 나섰다. 신유성은 한가하게 병사들 조련할 시간은 없었다.

임거정이 남사고의 도움을 받아 훈련을 시킬 때, 신유성은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

“응?”

뭔가 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더니 차돌이 여자들과 뒤엉켜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었다.

‘저건 촌장 손녀인데.’

여자들 중 한 명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차돌과 여자들은 정사에 정신이 팔려 신유성이 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잠시 감상을 하던 신유성은 조용히 물러났다.

“네가 남아줘야겠다.”

“네?”

“앞으로 이곳에서 남아 저들을 훈련시키고 나에 대한 충성심을 심도록 해라.”

뜬금없는 명령. 갑자기 뒤에 남으라니 막막했다.

“네가 안은 여자들은 책임을 져야지. 죽을 때까지 살라는 건 아니다. 이곳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때 다시 부르겠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영원히 섬에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차돌은 안심했다.

“무기와 상인은 꾸준히 거래를 하기 위해 올 거다. 네가 이들을 잘 이끌어서 거래를 중개해라.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세력을 더 넓히는 것도 좋고.”

“예.”

신유성의 명을 받고 물러난 차돌은 임거정을 만나게 되었다.

“저 남게 됐습니다.”

“잘 되었다. 이제 여기서 열심히 하면 영주가 될 수도 있겠다.”

영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등골이 짜릿했다.

‘내가 영주?’

필리핀은 낙후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영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차돌을 흥분케 했다.

‘노비였던 내가?’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 하지만 신유성을 오래 모시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었다.

‘주인님!’

갑자기 감격이 밀려왔다. 눈물이 차올랐다.

“잘 해봐라.”

임거정이 어깨를 두드려주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차돌은 열심히 해서 꼭 좋은 영주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받아들인 원주민들은 차돌에게 맡겼다. 차돌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남사고가 남아 보조해주기로 했다. 원주민들의 문자는 물론 지리와 문화에 관심이 있던 남사고는 뒤에 남기로 한 것이었다.

사선 5척, 전투용 캐럭 1척, 수송용 캐럭 1척이 차돌에게 배정되었다. 신유성이 받아낸 척가군은 정확히 반으로 쪼개져 차돌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이 근처 어딘가에 남만인들이 있다. 일단 그들을 만난다.”

이후 신유성은 섬들을 뒤지고 다녔다. 원주민과의 교류는 하지 않고 섬들을 빙글빙글 돌며 에스파냐인들이 정착한 곳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찾았습니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신유성은 찾아내고 말았다. 필리핀 중부에 있는 사마르와 레이테섬이 바로 에스파냐인들의 본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신유성은 곧바로 접근했다.

사마르 섬의 항구는 난리가 났다. 갑자기 나타난 배들 때문이었다.

“어디서 온 배냐?”

“모르겠습니다! 명?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이상합니다!”

사선을 보고 명나라라고 생각했었으나 캐럭들이 보이니 판단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포르투갈 놈들이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젠장! 일단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싸울 준비를 한다. 기본이었다.

항구 마을은 순식간에 부산스러워졌다.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유성의 배들은 부두로 접근했다.

“이걸 전하고 오도록.”

신유성은 편지를 써서 부하에게 내밀었다. 에스파냐어로 된 편지였다.

작은 보트에 탄 몇 명의 사람만이 들어서니 일단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에 든 편지를 흔들자 한 병사가 와서 편지를 받아갔다.

편지를 받은 항구 경비 책임자는 일단 펴보았다.

“이건?”

편지의 내용에 깜짝 놀랐다. 상대의 정체가 밝혀진 까닭이었다.

“명나라 도독이라고 한다.”

“명나라 도독이라고요?”

“그래.”

경비 책임자는 편지를 썼다. 일단 입항을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항구에 들어선 신유성과 경비 책임자는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도독께서 우리말을 할 줄 알다니 의외입니다.”

“내가 좀 잘났지.”

경비 책임자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에 있는 그대들은 뭔가?”

“제독의 명령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킨다? 이곳이 그대들의 땅이라도 된단 말인가?”

순간 긴장이 어렸다.

“그렇습니다. 이곳 원주민들은 이미 우리 에스파냐 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가? 이상하군. 내 눈에는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미개하니까 그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유성은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그들을 해방하면 되겠군.”

“지금 전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대들이 어디서 왔는지 잘 안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왔지. 반면 명은 가깝다. 싸우면 어떻게 될지는 그대들이 더 잘 알 텐데?”

신유성은 협박했다. 말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최선이었다. 전투를 하게 된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은 없었다. 항구에 들어오면서 이미 병력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섬을 지배한다고 하긴 하지만 에스파냐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병력은 더욱 적었다.

신유성이 데려온 이들로 전부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대답하게 협박하는 것이었다.

“우린 신성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끼어든다면 명나라와도 전쟁입니다.”

경비 책임자는 자랑스러운 에스파냐 제국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신성한 전쟁?”

“그렇습니다. 이 미개한 이들을 물들이려 하는 사악한 자들과의 전쟁입니다.”

경비 책임자의 설명을 들은 신유성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남쪽의 왕국들이라.......’

필리핀에 왕국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술루 왕국과 남쪽 민다나오 섬에 위치한 마긴다나오 왕국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왕국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슬람이었다.

‘성전이라 이거지?’

에스파냐가 이슬람을 적대하며 전쟁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라고 신유성은 믿지 않았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아마 향신료를 찾기 위해서겠지?’

아무리 이슬람을 적대한다고 해도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아시아 지역에서 성전을 벌이겠다며 난리를 피울 정도는 아니라고 신유성은 생각했다.

경비 책임자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신유성은 대충 이유를 짐작했다. 무엇인가 꿍꿍이가 있으니까 이곳을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독이 떠들었을 거라고.

“그대들의 전쟁은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대들이 아국에 조공을 바치겠다면 이곳을 점령하는 것을 허락하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물러나라.”

신유성은 명나라를 슬쩍 이용했다. 조공을 바치라고 협박한 것이었다.

“그건 제가 정할 일이 아니군요.”

“빠른 시일 내에 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아.”

마음은 엄청나게 바빴다. 필리핀을 얼른 정리하고 더 남쪽에 있는 호주를 차지해야 했다.  신유성의 기억에 호주에는 원주민 빼고는 이렇다 할 국가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주공산이라고 생각했다.

‘호주를 얻는다면 원정에서 한 걸음 더 앞서 나갈 수 있다.’

아메리카도 중요하지만 호주도 중요했다.

무엇보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호주를 반드시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땅도 넓고. 여진인들이 좋아하겠지.’

무엇보다 향신료를 차지하려는 유럽인들과 싸우려면 근처에 강력한 거점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신유성은 호주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은 편히 쉬시지요.”

경비 책임자는 더 할 말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연락선을 띄워라. 명나라에서 이곳을 노리고 있다고.”

“명나라에서도 향신료를 원하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른다.”

신유성의 예측대로 에스파냐인들은 향신료를 찾고 있었다.

“그럼 저 도독이라는 자는 어찌할 겁니까?”

“일단 조공 문제는 쉽게 정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하면서 시간을 끌어야지.”

“죽일까요?”

“미친 놈. 일을 망치고 싶지 않으면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명나라와의 교역은 중요하다.”

향신료가 중요하긴 했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교역도 중요했다. 명나라에서 나오는 도자기는 인기 상품 중 하나였다.

신유성을 죽였다는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게 되면 교역은 끝이었다. 그리고 거점은 공격 받게 될 터. 특히 신유성은 자신을 소개 할 때 도독이외에도 명나라 황제의 부마라는 말도 곁들였다.

즉,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란 소리.

“골치 아프군요.”

“어쨌거나 잘 구슬려봐야지. 그리고 되도록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하는 게 좋아. 어쩌면 도움을 줄지도 모르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경비 책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 이후 신유성은 아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원주민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신유성이 빠르게 말을 배우자 에스파냐인들은 깜짝 놀랐다.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이후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을 하던 신유성은 한 가지를 선언했다.

“이들은 방금 나의 병사가 되겠다고 자원했다. 너희들은 이제 일을 시킬 수 없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다. 이들은 나의 병사가 되겠다고 했다.”

경비 책임자는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우리의 책임 하에 있습니다.”

“왜? 그들이 노예인가? 아니라면 자유롭게 누구를 섬길지 선택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보호? 누구로부터?”

신유성은 일부러 도발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 순간 경비 책임자의 눈에 신유성의 병사들이 들어왔다.

전원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쇠뇌도 들고 있었다.

‘이건!’

일부러 하는 도발이 틀림없었다.

‘정말 싸울 생각이다.’

경비 책임자는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처음부터 신유성을 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알겠습니다. 데리고 가십시오.”

“무슨 소리? 이곳은 저들의 땅이었는데. 그대들이 떠나야지.”

신유성의 이죽거림에 경비 책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이곳은 우리가 개척한 곳입니다. 그건 인정해 주시죠.”

“그럴 순 없다. 나는 이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들은 내 병사가 되기로 했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잃어버린 땅을 찾아달라고 했다.”

“제가 할 결정은 아닙니다. 일단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결국 경비 책임자는 또 다른 연락선을 보내야만 했다.

신유성이 나타난 이후 원주민들은 더 이상 노동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신유성의 병사들을 따라다니며 모시기 시작했다.

신유성은 절대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밥은 나눠 먹었다.

병사들이 먹는 것은 원주민들도 먹었다. 신유성도 같은 것을 먹었다.

같이 밥을 나눠먹는 행위를 통해 원주민들은 신유성을 가까운 존재로 인식했다. 에스파냐인들은 노예처럼 부리거나 함부로 대했지만 신유성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도구를 가지고 목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쥐어준 뒤 훈련을 시작했다.

명백히 에스파냐인들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은 벌어지는 일을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신유성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본국의 연락이 올 때까진 기다려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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