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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87화 (8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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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필리핀, 사마르섬.

필리핀 원주민으로 이뤄진 원주민 군대의 대장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고?”

“네, 바다가 화를 낼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신유성은 보고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항만 시설은 아직 형편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배를 잃을 수도 있겠어.’

사마르섬의 원주민들은 태풍의 피해를 자주 입었다. 뭐 조심한다고 해봐야 태풍 한 번 불면 침수는 기본이고 집이 날아가기도 했다.

‘돌아갈까?’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아직 뭔가 부족했다. 술루 왕국을 처리하지도 못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얻지도 못했다. 성과라면 에스파냐인들을 협박하고 필리핀 중부의 섬 몇 개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

직접 원정을 챙긴 것치고는 얻은 게 별로 없었다.

‘일단 술루 왕국이나 한 번 더 쳐야지.’

신유성은 함대를 이끌고 배를 완성한 술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배를 빼앗는 과정은 전과 같았다. 병사들이 가까이 오는 술루 왕국 병사들을 막아내면 신입 병사들이 가서 배를 나포하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원주민 병사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병력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그리고 떠나려 할 때였다. 한 남자가 갑자기 무기를 버리고 바닷가로 달려 나왔다. 열심히 팔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응?’

관심이 생긴 신유성은 일단 작은 배에 남자를 태워 배에 오르게 했다. 뭔가 할 말이 있어보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아! 위대하신 정복자여! 항복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너희는 술탄이 있지 않나!”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어?”

“예,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였나?”

질문에 사신으로 온 남자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답했다.

“화난 병사들에게 죽었습니다.”

배를 두 번이나 빼앗긴 뒤, 술루 왕국의 술탄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다시 배를 만들자고 말했다가 살해당했다.

힘겹게 배를 만드느라 온 섬의 주민들이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또 배를 만들자니 어이가 없었던 것.

그냥 항복하자고 했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섬에 계속 갇혀 지내게 되었으니 결국 폭발한 것.

“그런가?”

자신들의 주인을 죽였다는 이야기에도 신유성은 담담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좋다. 살려주겠다. 너희들은 무슬림이겠지? 그 또한 허락한다. 신앙을 강제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세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처형하겠다. 받아들일 수 있겠나?”

“감사합니다!”

살기 위해서 종교를 바꾸라고 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술탄이 있는 나라이긴 했지만 술루 왕국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나라. 이슬람교가 그렇게 뿌리 깊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신유성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 너희들은 일단 전부 내 노예병사다. 전에 날 공격했었으니 그 정도 처벌은 각오했으리라 믿는다.”

“예.”

이번에는 조금 불만이었지만 받아들였다. 정 마음에 안 들면 기회를 봐서 반격을 할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숨김없이 답해야 할 것이다."

술루 왕국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래, 그렇게 된 것이로군.’

술탄은 죽었지만 술탄의 가족은 남았다. 신유성은 술탄의 가족들을 거둔 뒤에 자세한 사정을 캐물었다. 그리고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는 나라 믈라카 술탄국은 결국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했다.

향신료를 탐낸 포르투갈이 믈라카 술탄국을 공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국이 멸망했다고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믈라카 술탄국의 술탄은 가족과 함께 도망쳤다. 그리고 여기저기 술탄국이 난립하게 되었다.

술루 왕국도 이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것이었다.

‘남만인이라면 적대적인 것도 조금 이해가 가는군.’

더구나 종교적인 문제까지 겹치니 관계가 더욱 나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문제는 향신료라 이거지?’

그렇다. 향신료가 문제였다. 향신료의 원산지를 탐낸 포르투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은 것이었다.

‘잘 됐군.’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부족했었다.

‘배 좀 몇 대 더 나포해야겠어.’

신유성은 술루 노예병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난 지금부터 믈라카로 갈 것이다. 그리고 남만인들과 싸워서 배를 빼앗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을 것이다. 나와 함께한다면 너희들은 빼앗긴 것을 되찾을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주민들은 빼앗긴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술루 술탄의 가족들은 아니었다. 남만인에 대한 원한을 듣고 자랐기에 신유성의 선동에 너무나 쉽게 넘어갔다.

물론 신유성에 대한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술탄을 죽인 것은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신유성은 공격 받은 것에 대한 반격을 한 것뿐.

원래부터 뿌리가 깊지 못했던 왕가이기에 겪은 비애였다.

‘위험하긴 하지만 요긴하단 말이야.’

술탄의 가족들은 정말 요긴했다. 지금까지 모르던 정보를 입수한 것은 물론 수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술탄의 집에서 나온 책들이 바로 그 증거. 술루 왕국의 초대 술탄이 원래부터 학자인 덕에 상당한 양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 가족들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었다. 원주민에 비해 더 뛰어난 지식을 이용해 지배력을 강화한 것이었다. 그것이 신유성을 만나 깨지고 말았지만.

때문에 신유성은 술탄 가족을 그냥 버릴 순 없었다. 아랍어를 모르니 일단 배워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감시를 제대로 붙이면 되겠지. 그리고 딴 놈들과 붙어먹지 못하게 하면 돼.’

지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것이 다른 종교를 가진 나라의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혹은 더 미개하다 여겨지는 부족의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지식은 힘이다. 좀 더 아는 것으로 좀 더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으니까.

‘완벽하다 자부하는 순간 도태된다.’

신유성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미래의 지식이 있기에 쉽게 안주하지도 못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자동차가 떠오르고 전화기가 생각났다. 텔레비전도 그립고 컴퓨터도 그리웠다.

‘세계는 더 발전해야 해.’

잃어버린 즐거움을 생각하면 속이 탔다.

함대는 서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보르네오 섬이 있었다. 거대했다. 허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려했던 술탄의 가족들은 배신하지는 않았다. 보르네오 섬에도 술탄들이 살고 있었으니 도움을 요청한다면 신유성에 대항해 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술루 술탄의 가족들은 반대로 움직였다.

“싸웁시다. 드디어 싸울 기회가 왔습니다.”

오히려 술탄들을 선동했다. 이는 신유성이 가진 함대 때문이었다. 신유성의 함대라면 포르투갈과 싸워도 자웅을 겨룰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실제로 다른 술탄들은 신유성의 함대를 보고 합류하기도 했다. 흩어진 상황에서는 대단한 전력이 아니었지만 뭉치자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르네오 섬을 지나 결국 말라카 해협으로 향하는 길목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호르 술탄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호르에 도착하자 술루 술탄의 가족들은 자신들을 놓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지. 대신 포르투갈과 전투를 한 이후에 풀어주겠다.”

항해를 하면서 얻은 지식이 상당했다. 아랍어도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감사합니다.”

조호르 술탄국은 술루 왕국의 초대 술탄의 출신지였다. 결국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거이라 할 수 있었다.

“같이 싸우자고?”

“그들을 몰아낼 생각이다.”

“그래? 그런 말을 할 만하더군.”

신유성의 함대를 포함한 연합 함대는 어느새 100척에 가까워졌다.

“함께 한다면 공에 따라 분배하기로 했다.”

분배. 그 말에 조호르 술탄은 눈을 빛냈다.

“내 도움 없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남만인들의 수는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안다. 가능하다.”

조호르 술탄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원수인 포르투갈인들을 친다는데 빠지는 것도 우스웠다. 무엇보다 기회를 놓쳐서 다른 자들이 말라카 해협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 손해였다.

결국 조호르 술탄이 참가했다. 연합 함대의 전력은 크게 상승했다.

수상한 함대가 접근 중이라는 말에 믈라카에 자리 잡았던 포르투갈인들은 긴장했다.

“놈들이 또 온 모양이군.”

“미리 나가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루거리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래. 나가자.”

항구에 있다가 싸우게 되면 불리했다. 배가 나가지 못하고 뒤엉키면 난전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포를 활용한 해전을 벌이기 힘들어진다.

‘난전은 피해야 해.’

믈라카를 철통 같이 지킨다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 원주민에 비하면 숫자가 적었다. 작정하고 대군이 덤벼든다면 포르투갈인들도 어쩔 수 없었다.

화약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단지 지금까지는 공포와 회유 정책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믈라카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다. 얻게 된 향신료를 본국에 가져가서 팔면 막대한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항해에 드는 비용을 모두 뽑고도 남았다.

괜히 향신료가 금값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소중한 금과 같은 향신료 산지를 지키기 위해선 철통 방어를 할 필요가 있었다.

잠은 바다에서 잤다. 바다에서 자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배의 잠자리는 좁고 열악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포르투갈 군인들은 편안히 수면을 취했다. 전투가 일어나면 언제 쉬게 될지 모르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는 것이 최고였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연합 함대가 나타났다.

“적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해야만 한다. 일단 중앙의 우리가 포격전을 벌이는 동안 좌우로 퍼져서 포위하는 방식으로 간다.”

군선의 숫자에서 우월했다. 문제는 포르투갈 함대가 과연 포위망 안에 순순히 들어오느냐 하는 것.

‘해보는 수밖에 없지.’

자칫하면 질질 끌려 다닐 수도 있었다. 신유성은 전투용 캐럭을 전면에 세우고 돌진했다. 반면 사선들은 후방에 배치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포르투갈 함대는 움직였다. 적에게 둘러싸이지 않기 위해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적의 날개부터 부순다!”

포위당하는 것은 금물. 날개부터 차근차근 분쇄해나갈 생각이었다.

신유성의 함대가 속도를 냈지만 포르투갈 함대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슷한 속도에서 따라잡으려니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쏴!”

포르투갈 함대는 연합 함대의 날개를 스쳐지나가며 포격을 날렸다. 대충 쏴도 맞을 정도로 밀집한 상황이라 대부분의 포탄이 명중했다. 하지만 한 방에 침몰하는 배는 별로 없었다.

“재장전!”

포르투갈 함대의 제독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연합 함대의 중앙에 있는 신유성의 캐럭들은 주의해야만 했다. 싸우다 발목 잡히면 결국 백병전으로 가게 되고 그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이대로 간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면 적들이 흩어지리란 계산이 있었다. 만약 흩어지지 않는다면 잠시 물러나서 보급을 한 뒤 다시 싸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는 포르투갈 제독의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후방에 자리했던 사선들은 포르투갈 함대의 발목을 잡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함대 뒤에 숨어서 포르투갈 함대의 예상 경로로 움직였다.

“전방에 적!”

포르투갈 함대는 깜짝 놀라 방향을 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책이었다. 방향을 틀면서 속도가 느려졌고 결국 예상 경로를 점하고 있던 사선들과 붙게 되었다.

“쏴!”

이번에는 사선에서 포격이 있었다. 그리고 쇠뇌를 쏘며 대나무 폭탄이 던져졌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포르투갈 함대는 그대로 지나치는 데는 성공했다. 백병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다시 앞을 가로막는 연합 함대의 군선들을 만났다.

한쪽 방향으로 돌다 따라가지 못하게 될 것을 안 다른 쪽 날개가 방향은 아예 변경해 사선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포르투갈 함대의 예상 경로로 움직인 탓이었다.

“틀어!”

방향을 또 틀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성의 캐럭들이 다가왔다.

“쏴!”

포르투갈 함대는 포격을 맞았다. 이번에는 사선에서 나온 것처럼 연약한 포격이 아니었다.

연속으로 방향을 틀다가 결국 따라 잡힌 것.

물기둥이 치솟았으며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쏴라!”

포르투갈 함대도 반격했다. 신유성의 캐럭도 몇 발 맞기는 했으나 운이 좋아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이후 포르투갈 함대는 흐트러진 연합 함대의 선박들을 요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신유성의 함대가 뒤를 쫓았고 사선들이 길목을 막았다.

아침부터 시작한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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