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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청교공주의 마음을 조금 얻게 되자 척계광의 하루는 예전과 달라졌다. 전과는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분위기. 하지만 여기에 신유성은 경고했다.
“하루 좋아졌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나태해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분위기가 중요하다. 항상 잘해주기만 해서는 안 돼. 의외성도 필요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은 소중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과 지겹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한 모습을 유지할 것.”
“강한 모습이요?”
“그래, 자존심이 강한 여인은 약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니까. 남들보다 무엇이든 뛰어난 면이 하나쯤 있는 게 좋아.”
“생각보다 피곤하군요.”
“맞춰주려면 피곤하지. 하지만 안 맞춰줘도 피곤한 삶이라면 맞춰주고 좀 더 편해지는 걸 택하는 게 현명하지.”
척계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어차피 청교공주와 헤어질 순 없었다. 죽음이 갈라놓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청교공주가 죽으면 척계광의 출세도 끝이나 다름없었다. 공주와의 혼인 덕분에 단숨에 참장에 오른 것이니까.
“명심하죠.”
게을러지면 안 된다.
‘무예를 단련하는 것처럼.’
공주의 마음 또한 검과 같음을 마음에 새겼다. 또한 신유성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이젠 병사를 내놓으라고 해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신유성은 요구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필요 없으니까.
북경에서 어명이 날아왔다. 입조하라는 것.
명목상이라고 해도 명나라의 벼슬을 하고 있으니 안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켄, 먼저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주군!”
후지바야시 켄은 신유성이 항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함대를 이끌고 입항했다. 무려 10척의 전투용 캐럭을 끌고 온 것이었다.
“호위는 5척이면 충분하다.”
신유성은 전투용 캐럭 5척만 이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배만이라도 바꾸시죠.”
결국 신유성은 후지바야시 함대의 5척을 이끌기로 했다. 먼저 이끌던 이들은 켄이 나진으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럼 나중에 보지.”
신유성은 남사고와 켄을 먼저 보냈다. 남사고는 얼른 책을 읽고 싶어서 서둘렀다. 이후 모든 것을 정리한 신유성은 척계광에게 인사를 하고는 북경으로 향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 들어서고 있는 시간. 바람은 쌀쌀했으나 신유성은 오히려 반가웠다.
‘모기가 없어.’
모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학질의 공포는 그만큼 신유성을 곤두서게 했던 것이다.
치료약이 있었지만 심한 병을 앓게 되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아프게 되면 손해였다. 죽지 않고 살아난다고 해도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한 가지였다.
두 번 다시 어디 가지 못하는 몸이 되는 것이다.
후계자로 내세울 자식들이 한 20명 정도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혈통이 끊기는 것을 우려한 부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아설 것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신유성의 자유는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계속 돌아다니기 위해선 아플 수 없었다.
아프면 여행 금지니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항해 끝에 북경 근처의 항구에 도착했다. 멀리 항구를 보며 무엇인가 또 해냈다는 성취감을 살짝 느꼈다.
멀고 먼 여행의 끝이 다가온다는 느낌이 가슴을 간질거렸다.
항구에서 내린 신유성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아 북경에 도착했다.
‘여긴 여전하구나.’
황제가 사는 곳이라서 그런지 활기가 넘쳤다.
자금성 앞에 도착한 신유성은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지요. 도독나리.”
환관들은 신유성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가정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부마이기 때문이었다.
안내를 받아 간 곳은 황제의 거처였다.
가정제는 여전히 불로장생을 위한 수련에 열심이었다. 신유성은 대기해야만 했다. 가정제가 정사를 끝낸 뒤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이는 매우 지루한 시간이었다.
도독이기에 대접을 받기는 했다. 다과가 나오고 환관이 말 상대도 해주었다. 그러다 저녁이 될 때쯤 해서 가정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부터는 무한 대기였다.
신유성은 조용히 대기했다. 주변의 사물들을 감상하면서.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래 기다린 뒤에야 가정제는 나타났다.
“먼 곳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신유성은 에스파냐인들을 만난 이야기를 하며 용서를 빌었다. 가정제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조공을 받아내는 일은 그대에게 맡기지.”
아주 먼 곳에 붙어있는 나라라는 것을 들었기에 하는 소리였다. 어디든 신유성이 가서 싸우게 되면 그만큼 힘이 빠지게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조공을 받아내라고 시킨 것이었다. 정말 조공을 받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업적이 되기도 하니까.
명을 내린 가정제는 다시 돌아갔다. 뒤에 남게 된 신유성은 물러났다. 만남은 끝이었다. 허나,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신유성은 왕으로 봉해졌다.
신유성의 부하들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축하했다.
왕이 되었으니까.
허나, 신유성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달라진 거라고는 명칭뿐이다.’
정1품 도독이었을 때도 마음대로 했다. 왕이란 칭호가 주어졌지만 가정제가 땅을 준 것도 아니고 돈을 준 것도 아니었다.
신유성이 조선으로부터 받아낸 함경도를 신유성의 땅과 그 외의 지역을 신유성의 땅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안 좋단 말이지. 조공을 바쳐야 하고.’
조공 무역을 한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좋은 것을 생산해내면 명나라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유성은 조공 무역 따위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번잡하게.’
오히려 도독이었을 때가 더 편했다.
‘일반 백성들이 왕으로 만들어주는 거라면 모를까.’
백성들이 추대한 왕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직접 최고의 지위를 바친 것이니까.
하지만 가정제에게 받은 것은 만인지상의 권력이 아니었다.
위에는 황제가 있다는 뜻.
‘내가 직접 왕이 되고 말지.’
자신의 것을 지킬 힘이 있으면 왕이고 황제고 무엇이든 선포할 수 있다. 심지어 신을 자칭하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능력이었다.
“에이!”
열 받은 신유성은 고추를 찾았다.
‘열 받아.’
그래서 면요리를 만들었다. 고추를 기름에 볶은 뒤 고기를 볶고 이것저것 넣어서 볶다가 육수를 부은 뒤 국수를 넣었다.
그러자 얼큰한 면이 완성되었다.
“후루루루루루룩!”
뜨거웠다. 매웠다. 열 받는데 뜨겁고 매웠다.
입이 얼얼했다. 엄청나게 매웠다. 몸이 후끈했다. 그래도 신유성은 계속 먹었다.
“크으!”
다 먹고 나니 몸에서 땀이 흘렀다.
‘이제 좀 개운하네.’
빈 그릇을 흐뭇한 눈으로 보던 신유성은 고추가 든 자루를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왕이고 자시고 조공 따윈 내가 받아야지.’
다짐을 한 신유성은 조용히 북경을 떠났다.
한편, 이미 나진에 도착한 남사고는 책에 푹 빠졌다. 포르투갈 말을 하는 이들을 시켜 책을 번역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책에 빠져든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이지함이었다.
“이것들이 그러니까 학질 치료제라 했습니까?”
“그래. 그쪽에서는 이걸 달여 먹는다더라.”
“정말 한 번 가보고 싶군요.”
남사고의 여행 이야기를 들은 이지함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나진에서 시작한 일들도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지함이 떠난다면 뒤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그쪽 의서들이다. 남만인들의 것도 있으니까 봐라.”
의서라는 말에 이지함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이후, 이지함은 누가 챙기지 않으면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의서에 매달렸다.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 말을 배우기까지 했다. 동남아의 의학과 아랍 상인들이 전해준 의학 그리고 포루투갈인들의 의학까지 전부 겹쳐 있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의학 정보에 이지함의 머리는 엄청나게 돌아갔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학습 능력을 끌어올려 주었다.
더구나 이지함은 단순한 의원이 아니었다. 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 의원이었다.
나진의 사람들은 이지함의 명령에 번역작업에 착수해야만 했다. 힘이 없었을 때라면 손수 했겠지만 지금의 이지함은 힘이 있었다. 그러니 의서의 내용을 더 빨리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에 신유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이지함은 읽느라 마중도 잊고 있었으나 신유성의 추종자들이 끌어냈다.
“오셨습니까?”
“보아하니 책을 읽던 모양이군.”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이지함이었다.
“감사합니다.”
“별 말을.”
신유성은 이지함에게 먼저 가서 일보라고 했다. 그러자 쏜살 같이 돌아가는 이지함이었다.
“상공!”
집으로 돌아가니 주녹정이 눈물을 흘리며 안겨들었다. 정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에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그리운 님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굴러 떨어지는 눈물.
님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에 바쁘다.
이어진 입맞춤에 눈물은 더욱 거세게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밀어내기에는 가슴에 품은 그리움이 너무 많았다.
찰싹 붙은 두 사람은 호흡이 곤란해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신유성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츠를 비롯한 여인들이 모두 대기하고 있었다.
‘아.’
모두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울먹이기도 했다. 신유성이 없는 동안 제발 잘못되는 일이 없길 빌고 또 빌며 참아 왔던 것이었다.
손을 뻗으니 순서대로 다가왔다.
나츠, 레이, 사르나이, 체첵, 매화 그리고 화진.
이번에는 예외 없이 모두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제야 얼굴이 모두 펴졌다.
‘꽃밭이구나.’
여인들의 웃음에 둘러싸이니 꽃밭이라 할 만 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신유성은 주녹정부터 안아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이 돼서도 신유성은 처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허나, 그 어느 누구도 신유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누구든 신유성의 아이를 갖길 바라며 최대한 시중을 들 뿐이었다.
“하응!”
처음에는 한 명씩 안았었으나 사르나이와 체첵은 동시에 안겨들었다.
나진에서의 생활에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으나 정서적으로는 부족했다.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부족이 다르지만 그래도 여진족.
다른 이들보다 말이 더 잘 통하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리고 이것은 잠자리에서도 나타났다.
둘은 대담한 자세로 음욕을 자극했다.
정복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그런 자세들이었다.
풍만한 엉덩이를 본 신유성은 한 마리 종마가 되었다.
허리를 연신 흔들며 쾌락에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지치면 음식을 좀 먹고 잠을 잤다. 중간에는 보약까지 들어왔다.
그렇게 알몸으로 뒹구는 동안, 신유성의 품에 안기지 못한 두 여자가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결국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뭣이? 그게 정말인가?”
돌아온 이후 국정은 살피지도 않고 계속 쾌락에 빠져 있었는데 깜짝 놀랄 보고가 올라왔다.
“사실입니다. 확인된 바에 의하면 곧 군을 움직일 거라고 합니다.”
“이것 참.”
조선이 마침내 칼을 빼어든 것이었다.
정보를 수집하던 상인들은 물자의 집중에 의문을 느꼈고 곧 전쟁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닌자들은 전력을 다해 뒤를 캐고 다녔다. 그리고 성과가 있었다.
조선의 윤원형이 건주여진의 니칸와일란에게 동맹을 요청한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신유성은 조용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쟁이다!”
한 마디에 아직 이름도 정하지 못한 신유성의 왕국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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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