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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101화 (10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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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이지함이 바빠지자 이지함이 하던 일은 박지화와 허준이 하게 되었다.

“새로운 처방은 다 기록했느냐?”

“예.”

신국이 세워진 이후 박지화와 허준의 신분은 급상승했다. 서자라고 해서 차별 받는 그런 것은 없었다. 신유성은 의료를 담당하는 혜민서를 ‘의조’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신국의 행정 기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란이 많았으나 신유성은 임시 부서를 만들어 운영하게 했다. 그리고 상황을 봐가면서 더욱 크게 확대해 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민서는 처음부터 의조가 되었다.

그만큼 신유성이 의학에 쏟는 관심이 지대했다.

의조의 판서는 당연히 이지함이었다. 박지화는 바로 밑인 참판이었다. 그리고 허준도 벼슬을 했다. 수많은 실력 있는 의원들은 실력이 확인되는 대로 벼슬을 내려 의조에 속하게 한 것이었다.

의조가 세워지자 신유성에 대한 의원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던 조선보다 신국이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그럼 가서 남만 의서를 번역하도록 해라.”

의조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의학에 관련된 서적을 만드는 일. 외국의 것을 번역하는 것은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약초를 비롯해 생물들에 대한 것들도 책으로 남겨야 했다.

할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허나, 박지화나 허준은 이런 것에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의술을 더욱 발전시켜 후대에 전하는 것이 의조의 직무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의생에 지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의원의 밑에서 의학을 배우는 의생에 대한 대우는 상당했다. 뽑히기만 하면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녹봉이 주어졌다.

아무나 뽑지 않았으나 뽑히면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서자도, 백정도, 노비도.

누구든 뛰어난 머리와 의학적 지식이 충분하면 의생으로 뽑혔다. 이 때문에 한양을 중심으로 점점 글을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의서들은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쓴 것들이 많았다.

간단하게 만들어진 의학 사전에는 한글과 한자가 같이 표기 되어 있었다. 여기에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한글만 알아도 읽을 수 있었다.

수많은 약초꾼들은 자신도 의생이 되겠다며 의학 사전을 구입하기도 했다.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길을 찾게 되자 무섭게 질주했다.

신국을 방문했던 밀사들은 돌아가 벌어지고 있는 일을 소상히 알렸다. 수십 명의 영주들이 일제히 신국에 예속되기를 청했다는 소식은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쇼군은 없었다고?”

“그렇습니다. 쇼군의 밀사는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확인해라. 그리고 전쟁을 준비한다.”

“네?”

“교토로 올라갈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누구보다 빠르게 기회를 포착했다. 신국에 예속되길 청하지 않았다면 적. 적을 치는 것은 공적. 노부나가는 공을 세워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로 한 것이었다.

신유성에게 굽히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비참할 뿐이었다. 그러니 굽힐 땐 굽히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카가 가문하고는 아무런 교류가 없다는 것을 알자 노부나가는 교토로 진격했다.

허가는 당연히 받았다. 예전 같으면 남의 영지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신유성에게 교토 공략을 신청한 노부나가에게 허락이 떨어지니 중간에 있는 영주들은 노부나가가 지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이후 교토는 손쉽게 노부나가의 손에 떨어졌다. 아시카가 가문에는 지원이 없었다. 주변 영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교토는 그저 큰 도시에 불과했다.

더구나 노부나가의 부대에는 다수의 철포병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아시카가 가문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덴노를 사로잡아 한양으로 보냈다.

‘진짜 빠르군.’

노부나가의 부대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진격해 폭풍처럼 교토를 휩쓸었다.

허가를 내려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숨에 끝내버린 것이었다.

‘전쟁은 진짜 잘 한단 말이야.’

판세를 읽는 눈도 상당했다. 그래서 신유성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가 예속을 청한 덕분에 큰 피해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자존심 때문에 굽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으나 이는 신유성의 오판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켰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중요한데.’

일본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도약의 기회.

‘지진과 해일로 재난이 멈추지 않는 곳이지만 버릴 순 없다.’

일단 해양 자원, 생선을 구하기에는 최적화된 곳이었다. 현재 기후 악화로 인해 기근이 일어나고 있으니 생선을 저장 식품으로 만들어 보급해야했다.

일본은 그러기에 가장 좋은 곳 중 하나였다.

신유성이 괜히 어선으로 쓸 캐러벨을 대량으로 만들라고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전쟁으로 인해 육성된 무사와 군대.’

전쟁으로 돌아가던 사회가 갑자기 평화를 맞이하게 되면 타격을 입는 것은 바로 군대와 군수물자 공급자들이었다. 이들은 갑자기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영주에게는 부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해산시킨다.

병사의 경우에는 다시 농부나 어부로 돌아가면 되지만 무사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싸울 일이 없어진 무사들 중에 봉토를 받은 이들은 그래도 살만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영주의 입장에서는 이들도 먹여 살려야 하는 짐이 된다.

호위를 위한 무사는 필요하겠지만 예전처럼 전투를 위해 무사를 다수 구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뭔 짓을 할 지 모른다.’

문제는 무사들이 쉽게 검을 놓지 않을 것이란 것. 무사라는 자존심은 상당히 높다. 상인을 아랫사람으로 보는 계급이기도 하다. 그런데 갑자기 상인이나 농부라 되라고 하면 될까?

모여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겠다며 불만으로 가득한 이들을 선동해 하나로 모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나라를 관리하려면 먼저 쓸모없어진 군대를 살펴야만 했다.

‘어디로 보낼까?’

일본만 생각한다면 골치 아플 문제. 하지만 신유성은 아직 군대를 쓸 곳이 많았다.

‘노부나가와 함께 어디로 보내야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신유성은 머릿속에 세계 지도를 떠올리며 고민에 빠졌다.

덴노가 한양에 도착했다. 신유성은 덴노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이 시대의 일본 상황 속에서 소위 황제라 불리는 덴노는 상징적인 인물, 허수아비에 가까웠다.

실권은 하나도 없고 그저 상징적으로 모셔야 할 존재 정도로만 치부되었다.

‘고려의 무신 정권 때보다 더 힘이 없네.’

덴노와 그의 가족들은 만사를 포기한 표정이었다.

“노비로 삼는다.”

예외는 없었다. 조선의 명종을 치욕을 주며 죽게 했으며 왕족을 전부 노비로 만든 신유성이었다. 그런데 불쌍하다고 덴노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줄 순 없었다.

하지만 심한 일은 시킬 생각은 없었다. 노비가 된 조선의 왕족도 그냥 자기들끼리 일하면서 먹고 살게 했을 뿐이었다. 덴노의 가족들도 똑같이 처리했다.

껄끄러운 일을 처리하자 남은 것은 노부나가와의 대면이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노부나가는 깍듯이 예의를 표했다. 한 때는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었으나 이제는 왕과 신하였다.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어린 시절처럼 지낼 순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소꿉친구였던 김종수와는 만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겼다.”

“졌습니다.”

더 말은 필요 없었다.

“교토는 잘 받겠다. 승자의 전리품으로 내가 갖도록 하지.”

날로 먹는 것이었으나 노부나가는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그대를 얻었으니 그 정도면 됐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노부나가는 피식 웃고는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성의 인정은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단숨에 전 일본을 아래에 둔 왕이 바로 신유성이었다. 덴노처럼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힘을 가지고 군림하는 군주였다.

“영광입니다.”

“그래서 해줄 일이 있다.”

노부나가는 대답 대신 조용히 뒷말을 기다렸다. 묵묵한 모습은 강철 같아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새로 만들어지는 군단의 대장이 되어주어야겠다.”

“새로운 군단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주들에게 더 이상 병사는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 공을 세울 기회를 잃은 무사들은 방황할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무사가 필요하다. 병사들도 필요하다. 그래서 모병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은 병사와 무사들을 그대가 책임지고 이끌어줘야 할 것이다.”

“그럴만한 적이 있습니까?”

“남만.”

순간 노부나가의 눈이 번뜩였다.

남만인들은 아주 먼 곳에서 왔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언제나 생각했다. 일본을 빨리 정리하고 그들과 자웅을 겨룰 날을 상상했었다.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혁신을 하며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신국의 등장으로 모두 물거품이 된 줄 알았던 꿈이 갑자기 현실로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난 약한 군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는 소신의 목으로 속죄하겠습니다.”

“아, 그건 됐어. 그대가 죽으면 누가 또 나하고 내기를 하겠나?”

노부나가는 미소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노부나가에게 새로 창설될 군단을 맡긴 신유성은 바로 신문을 만들어 일본 전역에 뿌리게 했다. 새로운 해외원정 군단의 지원자 모집 광고를 실은 신문이었다.

“이번에는 어딜 치시려는 겁니까?”

“남만인들의 거점을 박살낼 것이다. 그들이 내게 조공을 바칠 때까지.”

“꼭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강하다. 멀기 때문에 서로 대규모로 붙지는 못하지만 얼마 안가 바다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유리한 고지를 우리가 점해야만 한다.”

신유성이 방향을 정했으니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옛 조선이라면 전쟁을 모조건 반대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생산성이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일본에는 갑자기 평화가 찾아오며 실업자와 비슷한 상태가 된 무사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남명.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교토에 가서 총영주직을 맡아주어야겠다.”

신유성은 총영주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일본의 영주들이 대거 신유성에게 예속을 청했지만 모두 다 고분고분하게 지낸다는 보장은 절대 없었다. 어쩌면 사소한 것으로 반목하며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럴 때 중재할 존재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상거래가 자유로워지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진 영지민들이 돌아다니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었다.

“그러니 그대가 가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임기는 5년이다.”

조식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5년 후에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까?”

“그거야 영주들의 요구와 그대의 의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

옆에선 이이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신유성 대신 일본을 다스리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영주의 권한을 침범할 수는 없지만 문제가 생기면 끼어들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교토를 얻게 된 순간, 신유성은 교토를 총영주의 거점으로 삼기로 한 것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 조식은 감격해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이후 조식은 정인홍을 비롯한 제자들을 대거 이끌고 교토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일본의 영주들이 모두 한양에 모이는 날이 왔다. 영지에는 대리인만을 남겨둔 영주들은 흥분과 불안을 품고 배에 올랐다.

“여기서 그대를 볼 줄이야.”

“그러게 말이오.”

서로 적대적인 영주도 있었고 친한 영주들도 있었다. 또는 숙적인 경우도 있었다.

바로 지금 인사를 나눈 다케다 신겐과 나가오 가케토라처럼.

두 사람은 더 긴말은 하지 않고 떨어졌다. 그리고 신유성과의 대면을 기다렸다.

드넓은 대전, 신유성이 나타나자 모두 일어나 예를 보였다.

“오늘은 충신들을 맞이하는 날이라 참으로 기쁘다.”

인사를 마친 신유성은 차례차례 인사를 받으며 새로운 영주 직인을 내려주었다. 다케다 신겐을 마주했을 때는 깜짝 놀랐고 나가오 가케토라를 만났을 땐 아직 개명하지 않은 이름이라 누군지 모르고 지나쳤다.

그러다 ‘마츠다이라’라는 이름을 쓰는 영주를 마주하게 되었다.

“마츠다이라?”

“그렇습니다, 전하.”

익숙한 성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었지만 잊을 순 없었다. 순수하게 동생처럼 아끼던 다케치요가 떠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익숙한 얼굴?’

하지만 상대의 이름은 모토노부. 다케치요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감이 말하고 있었다.

‘왜 자꾸 다케치요가 생각나지?’

궁금한 것을 참을 필요가 없는 신유성은 결국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다케치요인가?”

“그렇습니다. 다케치요입니다.”

모토노부로 개명했던 다케치요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세월이 지나고 이름도 바꾸었지만 신유성이 자신을 알아본 것이 기뻤다.

“하하! 네가 정말 다케치요라고? 이름은 왜?”

“얘기하자면 긴 이야기입니다.”

“하하하! 그래. 나중에 얘기하자. 자 받아라.”

신유성은 즐겁게 웃으며 영주의 직인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른 영주들은 마츠다이라 모토노부가 신유성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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