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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탄 칸
다음 날, 타이란은 아침에 일어나며 몸이 무거운 것을 느꼈다.
‘나도 이제 슬슬 뒤로 물러날 때인가?’
아직은 권력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 타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얀! 부얀!”
“부르셨습니까?”
부얀은 타이란의 아들로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몸이 무겁구나.”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다. 할 말이 있으니 거기 앉아라.”
자리를 잡자 타이란의 말이 이어졌다.
“난 늙었다. 주군을 따라 천하 끝까지 가고 싶지만 전장에서 싸우긴 어려울 것 같다.”
부얀은 숨을 죽였다. 곧 이어질 말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네가 부족을 이끌어라. 난 주군을 따라 다니며 맛있는 거나 먹어야겠다.”
“세상의 맛있는 것을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그래야지.”
타이란과 부얀은 웃었다. 세상의 맛있는 것을 바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자 다짐이었다.
신유성은 항상 세상의 모든 것을 먹으려고 들었다. 고추만 해도 그랬다.
고추에 얽힌 이야기는 유명했다. 주녹정과 여자들이 너무 매워서 없애버릴까 고민까지 했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유성의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했다.
누군가는 신유성이 먹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까지 했다.
어찌 보면 정말 사소한 이유로 전쟁을 하고 다니는 것 같았으나 아무도 신유성을 비웃지는 않았다.
신유성의 행보로 인해 잘 먹고 잘 살게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오히려 신유성을 배부르게 먹여야 나라가 풍요로워진다고 믿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특히 상인들은 신유성의 행동을 적극 지지했다. 세상 여기저기서 가져올 게 많아질수록 상인들은 부유해지니까.
타인란도 어느새 신유성에게 물들어 새로운 것을 먹는 것을 즐겼다.
‘매운 양념이 참 맛있단 말이야.’
여진족이 사는 곳은 추웠다. 그렇기에 몸을 일시적이나마 따뜻하게 해주는 매운 음식은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 뒤를 맡기겠다.”
타이란은 모든 것은 벗어던졌다.
“그래? 어려운 일인데 고생했겠군.”
“전하와 함께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그럼 다행이고.”
신유성은 타이란의 결정을 존중했다. 사실 나쁠 것은 없었다. 타이란과 신유성이 가까이 지낸다면 여진족으로서는 더욱 가까워졌다고 느낄 테니까.
“그럼 식사를 하도록 하지.”
아침 식사로 나온 것은 군만두였다.
바삭하게 구워진 군만두 안에 숨 쉬는 고기와 육수는 부드럽게 혀를 타고 목으로 넘어갔다. 더 맛있는 것들을 먹어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으나 모두 군만두에 만족했다.
전쟁을 위해 나선 상황에서 군만두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였다.
아침을 다 먹은 신유성은 다시 일에 몰두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정보를 파악한 뒤에 생각에 빠졌다.
‘청교공주를 어찌 해야 하나?’
주녹정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신유성에게 보고 되었다.
척계광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직접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나 척계광은 달랐다. 신유성이 공을 들여서 신국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는다면 좋겠는데.’
하지만 신유성으로서도 척계광을 직접 도울 방법은 없었다. 기껏해야 암살 시도 정도가 당장 신유성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묘하게 겹쳤네.’
신유성은 얼마 전 내렸던 결정에 만족했다.
산해관에서 물러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척계광을 돕는 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조정이 산해관에 모았던 명군 일부를 다시 알탄 칸을 상대하기 위해 보냈다.
‘언제 독립하게 만들까?’
중요한 것은 바로 청교공주의 독립. 너무 빨리 하면 토벌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 늦으면 아예 자신만의 왕국을 자처할 수도 있었다.
척씨 왕조가 들어선다고 해도 흡수할 자신은 있었으나 척계광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광동성을 먹은 뒤에 하는 게 가장 좋겠군.’
이이로부터 계속해서 올라오는 보고는 광주를 넘어 광동성에서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느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지자가 마구 늘어난 것이었다. 지배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한족들이 겁을 먹고 다른 곳으로 가버려 생긴 일이었다.
행정의 공백을 신국에서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자 신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남쪽은 걱정할 것 없겠군.’
행정의 귀신 이이가 있었다. 그리고 전쟁 감각이 탁월한 노부나가가 있었으며 다케다 신겐과 나가오 가케토라가 보좌를 해주었다.
바다에서는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후지바야시 켄이 활약해주는 중이었고 수많은 영주들이 보낸 사략 해적들이 꾸준히 명나라를 약화시키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북방의 전력이 약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젠 여진을 모두 하나로 모은 상황. 어디론가 분출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는 힘은 사냥감을 원했다.
‘그나저나 항구를 하나 더 만드는 게 좋겠군.’
전력을 분석한 뒤에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던 신유성은 요동 반도의 끝을 주시했다.
요동 반도의 끝에 항구를 만든다면 산동 반도까지는 금방이었다. 아울러 산해관 뒤쪽까지 가는 것도 편해진다.
‘앞으로 한양과 이어질 해상 교역로에 필요하다.’
뛰어난 배가 있다면 바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작은 목선들은 징검다리처럼 머물 항구가 필요했다.
“이곳에 항구를 만들어야겠다.”
신유성의 명령은 곧 조선으로 전해졌다.
어두운 밤.
산해관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왔다.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이들은 조용히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낮에는 몸을 숨기고 밤에만 이동하는 지극히 은밀한 이동이었다. 이 움직임은 신국의 군대에도 잡히질 않았다.
“저기다.”
“확실히 목표가 있는 것이 맞나?”
“틀려도 해야만 한다. 어차피 우린 죽은 목숨.”
암살자들은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 암살에 성공해도 바로 자결하라는 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창 출신의 암살자들은 명령을 들어야만 했다.
명령을 어긴다면 지옥을 보게 될 테니까. 그만큼 동창은 지독한 집단이었다. 자비가 없었다.
“술 한 잔 하고 싶은 밤이네.”
“저 세상에 가서 실컷 마시자.”
암살자들은 잡담을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생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는 중이었다.
“가자.”
준비가 끝나자 냉혹한 암살자의 눈빛이 살아났다.
어둠 속에서의 움직임은 상당했다. 너무나 고요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나, 야행복을 입었다고 해도 횃불이 있는 곳으로 가면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빈틈을 찾아 숙영지를 빙 돌아보았다. 하지만 빈틈은 발견되지 않았다.
‘젠장. 빈틈이 없군.’
보초들의 상태도 무시 못했다. 보통 밤에 보초를 서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그래서 근처에 적이 없다고 생각되면 늘어지는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유성이 머무는 숙영지의 보초들은 상태가 달랐다.
어둠 속을 주시하면서 잡담도 하지 않았다. 딴 짓도 하지 않았고 졸지도 않았다. 보초를 서는 시간이 지극히 짧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병력이 모인 만큼 경계 임무를 여럿이 나누어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경계를 서는 이들은 신유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소홀히 하다가 걸리면 쫓겨나게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물론 이제 막 해서 여진을 이끌게 된 부얀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작은 목소리로 동료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동료는 강행할 것을 지시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 시도나 하고 죽자고. 네가 가장 강하니까 뒤에 서라. 길은 우리가 열겠다.”
이후 암살자들의 조용한 돌격이 시작되었다.
“엇? 적이다!”
불빛이 비치는 곳에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이들이 나타나자 보초는 바로 소릴 질렀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모였다.
“아악!”
허나 암살자들은 거침이 없었다. 지독한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은 빠르게 병사들을 베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신유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큰 게르였다.
허나 암살자들은 게르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벌레들이.”
나타난 것은 핫토리 한조였다. 뒤쪽에는 이에야스가 검을 뽑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직접 싸우려는 것을 겨우 막고 한조가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빨리 없애자.’
시간을 끌면 이에야스가 전투에 뛰어들 것만 같았다.
한조의 창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어둠을 꿰뚫은 창은 암살자의 몸에 구멍을 내주었다.
“커헉!”
한조의 창질 한 번에 암살자 하나가 숨을 거두었다. 포위된 상태에서 암살자들은 한조를 피할 수가 없었다.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버티고 선 한조를 죽여야만 했다.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갈 시간 여유 따윈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마지막으로 가장 실력이 좋은 암살자가 한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단검을 뿌렸으나 소용없었다.
간단하게 날아오는 단검을 튕겨낸 것이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암살자는 한조의 지척에 도달했다.
이어서 검이 휘둘러지려는 찰나. 한조는 창을 놓고 검을 뽑았다.
“컥!”
순식간이었다. 허리춤에서 뽑힌 검이 목을 베었다. 피가 뿜어지자 암살자는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주변을 수색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숙영지에서는 난리가 났다.
또 다시 명나라의 암살자가 왔다는 사실에 이에야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놈들을 죽일 수 없을까?”
“누굴 죽일까요?”
한조는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글거리는 이에야스의 눈빛은 반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가득했다.
“황제는 힘드니까 조정 인물들이 괜찮겠지.”
“그들도 힘듭니다.”
명나라 조정의 대신에게는 붙어있는 경호 인력도 상당했다. 조선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럼 그 자식들을 노릴까?”
“그것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뭔데?”
“이번 사건을 적어서 북경 거리에 뿌리는 것이 더 좋겠죠. 아마 황제에게 타격이 좀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하지만 적을 공격하는 일이라 이에야스가 독단적으로 할 순 없엇다. 신유성의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날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문제가 없다면 하게 해주십시오.”
이에야스는 간청했다. 결국 신유성을 허락을 내렸다. 딱히 큰 문제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벽보로 붙일 내용에도 문제는 없었다.
‘가정제에게서 민심이 멀어진다면 더 좋지.’
어쩌면 가정제를 몰아내고 다음 황제를 옹립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황제를 쫓아내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나라가 쪼개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가정제에게 붙어있는 간신들이 쉽게 당해줄 리가 없지.’
싸우게 되면 좋다. 싸우지 않아도 좋다.
싸우지 않고 계속 가정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되면 결국 간신인 엄숭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허락한다.”
허가가 떨어지자 한조는 부하들을 이끌고 북경에 잠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북경에서 벌어진 벽보 사건에 가정제는 크게 노했다.
그 결과 몇몇 황족들과 대신들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 중에는 서계도 있었다.
‘앞이 깜깜하구나.’
장거정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기울였다. 신국의 일만해도 골치가 아팠다. 알탄 칸의 일도 골치 아프긴 매한가지.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바로 내부의 적이었다.
황제인 가정제는 그야말로 충신들의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멋대로 하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내친다.
그냥 내치는 것도 아니고 옥살이를 시키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폭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따질 순 없었다. 황제에게 죄를 묻는 행위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오로지 찬탈자만이 할 수 있는 일.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면 가정제의 삽질을 그냥 감내해야만 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임인궁변 때 가정제가 죽었다면 많은 것이 달랐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정제는 죽지 않았고 나라는 계속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장거정은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어찌 해야 하나?’
서계가 옥에 갇히게 되자 장거정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장거정은 명나라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는 빈 술병이 계속 늘어났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