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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117화 (11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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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몰락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들인가?”

엄숭의 외침에 답하는 병사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역적으로 죽을 것이라며 대신들은 겁을 주었으나 누구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섰다.

“조용히 하시오. 죽여 버리기 전에.”

“뭐라고?”

“한 마디만 더 하면 목을 베겠소. 장군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오.”

병사 하나가 검을 뽑았다. 두 눈에는 살의로 가득했다. 제발 한 마디만 더 하라는 간절한 염원이 느껴지는 눈빛.

살의를 알아차린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되었든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간신들은 목숨이 두려워서 충신들은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말을 아꼈다.

척계광은 자금성을 완전히 점령하고 가정제의 폐위를 주장했다. 그리고 유왕 주재후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했다.

주재후는 바로 가정제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위로 있는 형들은 모두 죽은 상황.

황위를 잇는다면 주재후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이러한 결정에 금위군은 일단 척계광을 공격하려던 것을 포기했다. 황실의 환관들도, 그리고 하급 관리들도 모두 척계광의 행보를 주시하기로 했다.

“신국과의 전쟁은 무의미합니다.”

가정제를 폐위시킨 척계광은 자신의 뜻을 따르기로 한 대신들 몇 명만 데리고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신유성과의 화평을 주장했다.

가정제가 부마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가정제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은 하극상이었으나 칼자루는 척계광이 쥐고 있는 상황. 이미 척계광과 함께 하기로 한 이들은 이를 받아들여 화평을 위한 사신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각 군대에 싸우지 말 것을 종용했다. 아울러 산해관 밖으로 나갔던 명군에게 회군을 명했다.

“잘 해주고 있군.”

전쟁은 멈췄다. 천진에 점령했던 신국의 군대는 천진을 완전히 장악했다. 천진의 명군은 후퇴해 자금성으로 향했다. 또한 산해관 밖으로 나갔던 명군은 회군해야만 했다.

비록 척계광이 황제를 쥐고 흔드는 상황이라고 하나 황명은 황명. 따르지 않을 경우 역적으로 몰릴 수 있으니 결국 회군한 것이었다.

신유성은 바로 각 군에 진격 중지를 명했다.

전쟁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노부나가 군단에서는 아쉬워했으나 더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먹은 땅만 해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쩌시렵니까?”

“척계광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우린 북경으로 간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야 그대들이 같이 가면 될 것 아닌가?”

기오창가와 부얀은 환하게 웃었다.

척계광은 거침이 없었다. 자금성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도 물러나질 않았다. 가정제와 주재후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주재후의 즉위식을 약식으로 열어 황제로 옹립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따지는 이들은 없었다. 황위를 비워둘 수 없다는 데 따질 수 없는 일이었다.

주재후, 융경제는 황제가 되었으나 꼭두각시였다.

자금성은 여전히 척계광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도 척계광이었다. 융경제는 단지 이름만 빌려주는 허수아비.

‘빌어먹을.’

화가 치솟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환관 하나가 몰래 접근했다. 그리고 편지를 주고 갔다.

편지는 동창을 지휘하는 태감이 보낸 것이었다.

‘척계광을 죽인다고?’

암살을 해 융경제의 권위를 되찾겠다는 것. 그러니 그때까지 보중하란 이야기였다. 절대 다른 이들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말이었다.

융경제는 얼른 편지를 씹어 삼켰다. 불에 태워 재를 남기는 것조차 불안해서 그냥 삼켰다. 맛은 더럽게 없었으나 목숨이 걸린 일이라 못할 것도 없었다.

동창은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명나라의 권신들은 항상 동창을 경계했다. 환관 세력을 찍어 누르려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동창이 가진 권한 때문이었다.

황족이나 고위급 대신이 아닌 이상 아무나 잡아서 조사할 권리가 동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창의 의향에 따라 조정이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에게는 동창이 후한 말의 십상시에 비견될 정도의 세력으로 비쳐졌다.

환관이 정치에 끼어들면 나라가 망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환관과의 알력은 상당히 심했다. 하지만 황제의 최측근으로 항상 황제의 편을 드는 동창은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가정제를 폐위시킨 척계광은 동창의 입장에서 보면 하극상을 벌인 대역죄인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가정제를 지키지 못했지만 척계광을 죽인다면 융경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동창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어두운 밤.

척계광은 융경제의 침소 근처에 아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창. 언제 올 것이냐?’

이제는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척계광이 가정제를 폐위 시키고 융경제를 즉위시키며 막강한 권력을 쥐었다고는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척계광만 죽으면 모두 끝날 일.

이를 모르지 않기에 척계광은 얼른 신유성이 북경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신유성이 북경에 입성해야 대계가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장군. 차를 가져왔습니다.”

갈증을 느낀 척계광은 차를 마시려 했다. 원래는 술을 마시고 푹 자고 싶었으나 지금은 칼날 위에 선 상황.

조금만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니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척계광의 부하들도 모두 금주를 하고 있었다.

궁녀 하나가 들어와 차를 놓으면서 몸을 틀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유혹의 몸짓. 마치 자신을 취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허나, 척계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러가라.”

궁녀가 물러나자 차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은가 확인해보았다.

은침으로 확인한 뒤 부하가 살짝 맛을 본 뒤에 주자 그제야 차를 들었다. 황궁의 모든 것은 환관이 쥐고 있기 때문에 척계광은 극도로 조심했다. 심지어 부하들이 먹는 음식도 성밖에서 직접 구해다 먹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창을 경계했다.

“음.......”

차를 마시고 얼마 안 있자 졸음이 쏟아졌다.

‘왔는가?’

척계광은 탁자에 얼굴을 파묻었다.

척계광이 잠들었을 시각, 동창의 휘하에 있는 금의위가 움직였다. 고수들로 이뤄진 금의위는 손쉽게 척계광의 처소까지 침입했다. 일부는 융경제의 처소로 향했다.

‘오늘로 끝이다!’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간 금의위 무사들은 탁자 위에 잠든 인영을 난도질했다.

“끝났다.”

“성공을 알려라.”

금의위 중 하나가 호각을 불려했다. 허나,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컥!”

어둠 속에서 날아온 표창이 목에 박혔다.

이어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금의위는 대응했으나 상대를 잡지 못했다. 뭔가 번뜩였다 싶은 순간 목이 꿰뚫렸다.

금의위들은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남자의 정체는 척계광의 부하였다. 잠이 든 척계광은 이미 안전한 곳에 모셔놓고 환관 하나를 목 졸라 죽여 탁자 위에 놔둔 것이었다.

어둠 속이라 금의위들이 제대로 확인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또 다른 남자의 정체는 바로 핫토리 한조였다. 명령을 받고 유사시에 척계광을 지키기 위해 잠입해있던 것이었다.

다음 날, 척계광은 금의위의 배신을 이유로 동창의 권한을 황명으로 중지시켰다. 아울러 태감과 그 밑의 부하들을 잡아들여 참형에 처하고 재산은 몰수했다.

동창을 칠 명분은 간단했다. 척계광은 고위급 대신이었으니 동창이 함부로 할 순 없는 존재였다. 융경제는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기에 모든 것은 동창의 독단으로 한 것으로 판결났다. 그렇게 동창은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신유성은 육로가 아닌 해로로 움직였다. 육로로 움직이면 회군하는 명군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련에서 천진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대한 선단은 신유성이 탄 배를 호위하며 움직였다.

천진에서 내린 신유성은 유유히 북경으로 향했다. 주변에는 대군이 함께 움직였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더구나 척계광은 왕인 신유성을 막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신국과 명나라는 얼마 전까지 전쟁을 했었으나 융경제의 이름으로 척계광이 화평을 청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신유성은 오랑캐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가정제가 직접 부마로 삼았고 왕위까지 내려줬으니까.

오히려 갑자기 변덕을 부려 신유성을 죽이려 한 가정제가 미쳤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었다.

“이제는 끝이구나.”

멀리서 신유성이 북경에 들어서는 것을 보며 장거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유성이 끌고 온 북방 군단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이제는 척계광을 죽인다고 해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신유성이 끌고 온 북방 군단의 상당수가 기병인 탓이었다.

무려 2만에 달하는 정예 기병이었다.

별다른 전투도 없이 북경으로 입성하는 신유성이 어떻게 척계광을 구워삶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젠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서계가 옥에 갇히고 척계광이 자금성을 점령한 순간 장거정은 사직했다. 조정에 계속 이름을 올려두고 있으면 좋지 않게 연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신유성 암살에는 서계를 비롯한 이들도 뜻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장거정은 특별히 요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직해서 최대한 거리를 둔 것이었다.

하지만 사직을 했어도 앞날이 막막한 것은 여전했다.

권력의 중심부로 나아가던 장거정은 지독한 상실감을 맛보았다.

명나라의 명운이 다했다. 그나마 희망을 품고 있던 동창도 유명무실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지방군의 움직임이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자.’

위험을 함께하면 큰 자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장거정은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북경에서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자금성에 들어선 신유성은 거침이 없었다. 융경제는 양위를 강요받았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지요.”

신유성의 말에 융경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린 신유성이 자신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융경제는 막을 힘이 없었다.

‘썩을.’

욕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다. 허나 꾹 참았다.

‘살아있다면 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융경제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양위를 한다고 해도 목숨만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불만을 품은 이들이 다가오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융경제는 신유성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을 은밀히 모아 다시 복권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융경제는 꿈에도 몰랐다.

‘살아있는 미끼가 되어주시오.’

신유성은 융경제를 죽일 명분은 없었다. 가정제는 폐위시키고 가두는 것 이상을 할 순 없었다. 마구잡이로 죽이려고 하면 못 죽일 것은 없었으나 자칫하면 명나라 황실 전체를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주녹정과 결혼한 자신도 부정해야했다. 자기 부정에 빠질 순 없으니 결국 명나라 황실 전체를 죄인으로 만들어 노비로 삼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너무 심하게 굴면 청교공주와 척계광이 불안해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죽이지는 않고 양위를 받은 뒤에 유폐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폐 시킨 뒤에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신유성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라면 살아있는 명나라 황족이야말로 뭉치기 좋은 구심점이기 때문이었다.

신유성은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명은 여전히 신국이었다.

산해관을 넘었던 명군은 다시 산해관 안쪽으로 돌아왔을 때 이 소식을 접했다.

“미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신국을 치기 위해서 나갔는데 융경제가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회군 명령을 받고 돌아왔다. 워낙 대군이 움직인 상황이라 회군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국 돌아왔을 땐 일이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배를 타고 잽싸게 움직인 신유성이 북경으로 가서 황제의 자리를 양위 받은 것이었다.

“명에 따르시길 바랍니다.”

“못해! 못 따르겠다! 그딴 대역무도한 죄인을 황제로 모시라니! 난 그렇게 못한다!”

명군의 도독은 반발했다. 그러자 명령을 전달하러 온 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느냐! 저 놈을 잡아라!”

그 순간이었다.

총성이 울리더니 명군의 도독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장군!”

“모두 멈춰라!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은 역적으로 간주해 사살하겠다!”

명령을 전달하러 온 전령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자는 감히 황명을 무시한 역적이다! 누가 함께 죽겠느냐!”

역적이란 말에 많은 이들이 주춤했다. 하지만 도독의 심복들은 움직였다.

“웃기는 소리!”

심복들이 움직이자 다시 총성이 울렸다.

신유성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아직 뒷정리는 한참 남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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