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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몰락
세상의 중심이 바뀌었다. 한양의 사람들은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궁이 있는 방향으로 한 번 절을 하는 노인부터 경건한 마음으로 납품을 하는 상인들까지.
황제, 신유성이 기거하는 곳이야말로 세상의 중심.
명나라가 아닌 신유성이 세운 신국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신유성은 자금성이 아닌 한양을 신국의 중심으로 선언했다.
한양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황홀한 소식이었다.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신유성을 향했던 일말의 불안감마저 사라졌다.
명나라를,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신유성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이제 없었다.
백성들은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양의 땅값은 이제 부르는 게 값이었다. 황금보다 더 귀한 땅에 살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의 칭송 속에서도 아침은 찾아온다.
슬그머니 눈을 뜬 주녹정은 옆에 누운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신들린 노질로 대낮부터 시작해 밤까지 자신을 쾌락 속에 울부짖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혼절을 하고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다시 항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쾌락의 항해에 매진하던 황제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쩜 이리 멋지실까?’
주녹정의 눈에 보이는 신유성은 아침 햇살보다 더 눈부셨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눈부셨다.
‘어머니. 이 분이 제 지아비입니다.’
죽은 모친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가정제도.
‘복수는 곧 해드릴게요.’
신유성은 명나라를 정복했다. 주녹정이 원하던 일을 드디어 해낸 것이었다. 명을 쳐부수는 것은 주녹정의 소망이었다. 그것을 신유성이 꿀꺽했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가정제는 폐위 된 뒤 유폐되었다.
이제는 복수의 열매를 맛 볼 시간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즐겁게 해드릴까?’
하지만 이제 막 돌아온 신유성을 재촉해 다시 자금성으로 가자고 할 순 없었다. 며칠은 쉬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생각한다.
소원을 들어준 천자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 지.
신유성이 눈을 떴을 때였다. 이미 옷을 입은 주녹정은 신유성의 시중을 직접 들며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극도의 공경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젠 명나라 공주라는 자부심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신유성을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해주고자 하는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간단하게 먹고 싶다.”
“준비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어딘가 한이 뭉쳐 있던 표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봄날의 햇살처럼 확 풀어졌다.
‘복수 때문인가?’
주녹정이 원하던 것을 떠올린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가서 보고 싶을 텐데.’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보채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 좋게 보였다. 조종하려 들지 않는 모습은 마음에 쏙 들었다.
“자금성에 가보고 싶지 않나?”
갑작스러운 질문. 주녹정은 멈칫했다.
“원한다면 가도 된다.”
“혼자는 싫습니다.”
“그럼 같이 가도록 하지. 좀 쉬었다가.”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원하는 부분을 긁어주는 말이었다. 가슴은 더욱 세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고 안기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할 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살짝 밖으로 나간 주녹정은 주문을 재촉했다. 주방에서는 황제에게 바칠 요리를 만들기 위한 전쟁이 터졌다.
며칠 휴식을 취하며 여자들을 한 번씩 안아준 신유성은 이지번을 찾았다. 다시 만난 이지번은 극도의 공경을 보였다. 예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일은 어떤가?”
“문제없습니다.”
문제? 있을 리가 없었다. 한반도에 관한 내정의 전권은 이지번에게 주어졌다. 신유성에게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거 다행이군. 앞으로 배가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학교를 더욱 많이 지어야 할 것이고.”
“명심하겠습니다.”
이지번 또한 원하는 일이었다. 특히 교육에 관한 것은 신유성이 시키지 않아도 예산을 배정해 육성하는 중이었다.
“참, 그리고 쾌속선을 만드는 것을 장려하라.”
“알겠습니다.”
쾌속선의 필요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이지번이었다. 중원 또한 이제 신국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었다. 연락이 두절되는 것이 곧 지역의 고립으로 이어진다.
고립은 필연적으로 독립을 부르게 된다.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교통수단은 물론 연락 수단의 발전은 필수였다. 과거 조선이었을 경우에는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만 이젠 큰 문제였다. 광활한 영토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연락은 필수였다.
하지만 아무리 연락을 주고받아도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봉건제와 같이 영주를 두고 그 위에 믿을 만한 사람들을 총영주로 앉힌 것이었다.
“그럼 일단 이 정도로 하고 조만간 다시 자금성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혹시 자금성으로 천도하시는 겁니까?”
“천도는 없다. 아니. 한다면 북경에서 한양으로 해야지. 그냥 잠시 나들이라도 할 셈이다. 내 것이 되었으니 한 번 둘러봐야지.”
“준비하겠습니다.”
“호위는 북해도에 맡긴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신페이는 크게 기뻐하며 5만의 정예를 이끌고 나타났다. 허나 신유성은 너무 많이 끌고 왔다고 타박하며 2만만 데려가기로 했다.
다시 시작된 여행은 길었다. 신유성은 바다를 통하지 않고 육로로 움직였다. 황제가 되자 배를 타는 일에 많은 이들이 더 많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애라도 낳아야지 안 되겠군.’
배를 타면 금방 갈 곳을 한참 돌아서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허나 꼭 지겹지만은 않았다. 신유성은 마차 밖 풍경을 보며 여인들과 어우러지는 운우지락을 즐겼다.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온다고 해서 흉을 보는 이들은 없었다. 마차 주변을 호위하던 여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얼른 아이가 생기길 염원할 뿐이었다.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도착하자 여행은 잠시 끝났다. 이이는 자금성 앞에서 신유성을 맞이했다.
“별 일은 없었겠지?”
“문제없습니다.”
이이는 정말 바빴다. 하지만 바쁘면서도 행복했다. 총영주로서 각 영지의 내정에 관여할 순 없지만 신유성이 대신 맡긴 천진과 그 외 영지를 관리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했던 것을 실현해볼 큰 기회가 주어졌으니 매일이 행복했다. 그리고 현재 행복을 안겨준 장본인이 나타났다.
“잘 됐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황공합니다.”
신유성은 마차의 문을 닫았다. 잠시 뒤, 마차는 천천히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자금성 안의 깊고 깊은 곳에서 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멈추질 않았다.
“아으으으으. 약을. 약을 가져오라.”
남자의 정체는 가정제였다. 머리를 쥐고 비틀거리던 가정제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정제에게 약을 주던 도사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그리고 가정제에게는 약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정제는 만성두통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했다.
“약을 가져오라 했다! 다들 어디 있느냐!”
고통으로 인해 이성이 사라졌다.
“죽여 버리겠다! 네 놈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분노를 쏟아냈다. 그런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가정제는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마구 할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환관들이 가정제의 손과 다리를 묶었다.
“네 놈들! 약을 가져오란 말을 못 들었나?”
환관들은 답하지 않았다. 원래 가정제를 모시던 환관들은 모두 처형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현재 자금성에 남은 이들은 모두 지위가 낮았던 환관들뿐이었다. 어딘가에 파벌에 속하지 못하고 묵묵히 할 일만 하던 이들은 정상 참작해 이이가 살려둔 것이었다.
성을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환관들은 떠나지 않았다. 남자 구실도 못하는 몸으로 성을 떠나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러니 언젠가 신유성이 다시 찾을 때를 기다리며 이렇게 자금성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환관들에게 주어진 업무 중 하나가 바로 가정제나 융경제를 모시는 것이었다. 유폐를 시켜놨지만 그렇다고 시중 들 사람 하나 붙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나 일본과 달리 명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은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황실의 피가 주녹정은 물론 청교공주에게도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존중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으아아아! 놔라! 이놈들! 이거 풀어라!”
가정제는 연신 발광했다. 그러나 젊은 환관들을 이겨낼 힘은 없었다.
‘후훗. 인과응보지.’
멀리서 가정제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던 주녹정은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비록 친 아버지라고 하지만 아버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가족을 보는 것이 아닌 물건을 보는 눈빛인 까닭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다.
‘좀 더 괴로워야 해.’
한 동안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던 주녹정은 가정제 앞에 나섰다.
“누구냐!”
“절 몰라보시는 겁니까?”
“누구냐고 물었다!”
이제는 소녀가 아닌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 주녹정을 못 알아보는 가정제였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남자의 여자입니다.”
“네 년! 네 년을 죽이겠다!”
가정제는 목을 조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근처에 있던 환관들에게 막혔다.
“호호호! 어머니를 죽이고 나까지 죽이겠다고요?”
갑자기 치솟는 분노에 이성이 날아가버렸다.
음습하고 진한 복수심에 불이 붙었다.
“명은 이제 끝장났죠. 다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약에 취해 나라를 돌보지 않은 탓이죠. 그리고 당신이 적대하던 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았죠.”
“으아아아아!”
“그거 알아요? 당신 딸이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몸도 마음도 전부 그분의 것이 되었답니다.”
“무슨!”
“제가 바로 당신의 딸이었죠. 그리고 그분이 모든 것을 차지해서 행복합니다. 당신만 없으면 더 행복해질 것 같군요. 실컷 괴로워하세요. 평생 그렇게 초라하게 살다 죽으세요. 이제는 사라진 명이란 나라처럼. 저는 그분의 곁에서 새로운 세상을 볼 겁니다.”
그제야 가정제는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보냈던 공주, 주녹정이었다.
“야, 약을 다오. 내가 니 애비다.”
“흥! 이래서 약쟁이란.”
분노해야 할 순간에 가정제는 약을 요구했다. 자신의 딸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들어줄 것이란 얄팍한 생각이었다.
약물중독자가 된 가정제는 자부심은 어느새 날려버리고 약을 갈구했다. 약을 먹으면 편해질 것 같아서였다. 딸이 왔으니 약을 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다.
허나, 주녹정은 그 기대를 짓밟았다.
“그 빌어먹을 약은 두 번 다시 구경도 못할 줄 아세요.”
이제는 볼 일이 없었다. 말로 더 상처를 주려고 시도해봤지만 그래봐야 자신만 구차해지는 느낌에 식어버렸다.
‘이제 필요 없어.’
처참하게 몰락한 가정제의 밑바닥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더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주녹정이 돌아가자 가정제는 다시 발작했다. 저주를 퍼부었다. 입에 담기 두려운 이야기를 계속 퍼부었다. 허나, 귀담아 듣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소문이 퍼졌다.
가정제는 정말 미친 황제였다고. 폐위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약을 다오........”
가정제는 며칠 간 더 발광을 하다 힘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밥을 먹기 싫다고 해도 환관들은 억지로 입에 넣었다. 발광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강제로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로인해 금단 증세는 더더욱 심해졌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제발 약을 다오.”
가정제는 환각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멀쩡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걷고 싶구나.”
산책을 하겠다는 것까지 막을 수 없던 환관들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가정제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황제가 되는 겁니까?”
가정제가 보고 있는 것은 과거였다. 과거의 기억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 나타났으나 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이제 이곳을 오르면 되는 겁니까?”
가정제의 눈은 용상을 보고 있었다.
연못 위의 정자에 앉아 가정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명했다.
“물러가라. 홀로 있고 싶구나.”
미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환관들은 잠시 물러나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갑자기 눈을 뜬 가정제는 걷기 시작했다. 허나 방향은 길이 아닌 연못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환관들이 막으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물에 빠진 가정제는 그대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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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