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신의 유희-133화 (133/271)

0133 / 0271 ----------------------------------------------

인재들

이지번의 요청은 파문을 일으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인 신유성이 직접 노비로 만들었다. 즉, 지금의 요청은 했던 말을 다시 거두어달란 소리나 마찬가지.

군주의 말 한 마디는 법이나 마찬가지인 세상이었다.

즉, 했던 말을 번복하는 것은 자신이 틀렸었다는 것을 인정하란 소리가 된다. 그렇기에 많은 군주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뜻을 바꾸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틀렸음을 인정하고 사과하게 되면 그것만으로 권위가 상한다고 생각했다. 결정을 자주 번복하게 되면 말의 무게가 줄어들어 힘을 잃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무엇인가를 결정할 땐 신중하게 말해야 했다. 그리고 번복하기 위해선 꼼수를 써야만 했다.

왕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거나 착각이란 식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지번은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황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신권을 통한 도전이라고 해석하고 탄압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유를 들어봐야겠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찌 되었든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신유성이었다.

“시간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지금 교육으로 많은 인재들을 육성하고 있으나 향후 10년 정도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거두시어 크게 쓴다면 기다리실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지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요약하자면 집현전에 노비로 가둔 양반들을 복권시켜준다면 10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인재 부족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은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좋은 이야기네.’

신유성은 이지번의 생각에 공감했다. 허나 틀렸다고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복권은 어렵다.”

“알겠습니다.”

이지번은 아쉬웠다. 노비가 된 이들 중에는 풀어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풀어줬으면 하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명종을 모신 조정 대신이라 하여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노비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학문을 익힌 많은 이들이 절망 속에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복권시켜준 자들이 배신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어찌 할 생각이었나?”

“배신 할 것 같은 이들까지 복권시켜 주시길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이지번의 입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사람은 바로 이황이었다.

“그는 제자가 많지 않나? 복권시키면 골치 아파질 텐데?”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노비로 남게 될지언정 신의를 저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분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겠지.”

이지번과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는 신유성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복권은 안 된다. 내 입으로 내가 내렸던 결정이 잘못되었었다고 말할 순 없다.”

이지번은 신유성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황제가 안 한다고 하면 안 하는 거다. 인재가 부족하기에 요청했던 것뿐이지 목숨을 걸고 사림을 위해 뭔가 하고자 하는 생각은 이지번에게는 없었다.

이지번에게 중요한 것은 몇 가지 없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유성이 보여줄 세상이 올바른 세상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시 등용하는 것은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냥은 안 된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그대가 요청한 것이니 그대의 신용을 걸어야지. 면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조건을 말하겠다. 영주직을 걸어라. 만약 한 명이라도 배신한다면 그대의 영주직을 회수하겠다.”

한 마디로 한반도 영주에서 물러나란 소리였다.

지금까지 이지번의 뜻대로 한반도를 이끌어 왔었다. 헌데 갑자기 이 힘을 놓으라고 하니 이지번은 살짝 머뭇거렸다.

‘내가 어찌 이런 욕심을.’

자리에 연연했다는 사실에 이지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약 한 명이라도 폐하를 배신하는 날에는 소신의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럼 면천을 시켜주는 조건을 말해주지. 그들은 죄인이라 그냥 풀어줄 순 없다. 만약 그들을 풀어준다면 다른 죄인들이 억울해하겠지. 그러니 그들의 가족 중 한 명이 날 위해 백의종군하면 된다. 그리고 죄인의 신분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풀려난 모든 이들이 날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해야 할 것이다.”

서약을 했다고 해서 배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약한 사실을 널리 알리면 이를 어기려는 행동을 할 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어떤 형식이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말을 뒤집는 사람이란 것이 알려지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성리학을 공부한 양반들에겐 치명타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명분이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얘길 해도 그들이 하겠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날 섬기기 싫다고 하면 다 헛일일 텐데?”

“설득해보겠습니다.”

이지번은 신유성의 조건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분을 떠올렸다.

“적당한 이유는....... 그래. 그대가 자리를 걸고 요청했다고 하도록.”

한 마디로 이지번이 애원해서 신유성이 마지못해 기회를 준 것으로 하라는 뜻이었다.

신유성의 이야기를 듣고 이지번은 물러났다.

‘이제야 일 좀 편하게 할 수 있겠군.’

하지만 이지번은 의도와 달리 실패했다. 설득하고자 했던 이황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황이 불응하자 이지번이 복권시키고자 했던 이들이 전부 거절했다. 의리 때문이 아닌가 싶어 물었으나 이것에도 이황은 고개를 저었다.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지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신유성이 해낸 일들을 이황도 모두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유성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도 예측이 되지 않았다. 예측이 안 되니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어도 결국 같은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전 노비입니다. 시키는 일만 할 뿐이지요.”

시키는 일만 하는 것과 알아서 일을 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들은 절대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는 곧 책임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실패의 위험이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손해다.

하지만 성공하면? 노예가 성공해도 공은 주인의 것일 뿐.

성공해봐야 부스러기나 좀 먹고 마는 수준이고 실패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니 노예는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편하다.

성공과 실패는 상관없다. 노예는 그저 시키는 일만 해서 삶을 연장하면 될 뿐. 그 이상은 자신과 상관없으니 굳이 혁신적인 새로운 일을 시도할 이유는 별로 없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니까 오히려 손해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알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도전한다. 결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이황은 자신은 노비니 시키는 일만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시키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같은 길을 간다고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신유성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은 어쩌실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하시지요.”

이지번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이지번의 뜻에 응한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이지번이 원하는 사람들은 이황을 중심으로 이미 뭉친 상태였다.

설득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나 이황은 요지부동. 결국 이지번은 한숨을 내쉬며 신유성에게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10년을 내가 손해를 보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야. 내가 몰랐을 땐 손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단축시킬 방법을 안 이상 이 기회를 보낸다면 나의 손해다. 난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 게 되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10년을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10년을 단축시킬 기회를 잃는 것이었다.

기회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매기는 법.

신유성이 10년을 손해 봤다고 하면 10년을 손해 본 것이 된다. 누군가 기회를 놓쳐 100년을 앞서갈 기회를 잃었다고 한다면? 100년을 손해 본 것이 된다.

기회에 매겨지는 가치란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었다.

“내가 얘기해보지.”

결국 신유성은 이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왜 제안을 거절하는 거지?”

“폐하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을 알려주면 응할 건가?”

“그건 아닙니다.”

생각을 듣고 거기에 공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가슴에 품은 뜻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 함께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가슴에 품은 뜻을 말하지 않으면 함께 할 사람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런가?”

신유성의 화를 내지 않으니 이황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보통 황제였다면.......’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며 불쾌한 표정을 지을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유성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뭐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도 좋다.”

신유성의 생각을 알아볼 기회가 주어지자 이황은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하일통.”

즉답이었다. 이황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들으니 조금 황당한 느낌이었다.

“이미 천하를 얻지 않았습니까?”

“설마 명나라를 천하라고 하는 건가?”

“아닙니까?”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신국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일통이다.”

신유성은 말 그대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정복하겠다는 것이었다.

‘허황된 꿈이다.’

미쳤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미쳤다고 할 수가 없었다.

역관의 자식으로 시작해 일본을 토벌하고 조선을 뒤집고 명나라를 꿀꺽했다. 그러고도 현재 나이는 21살.

성장 기세는 정말 천하를 다 집어삼킬 정도로 강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업무는 엄청났다. 여러 나라의 말을 배워야 했으며 이를 가지고 사전을 비롯해 교육용 책까지 만들어야 했다. 의서들을 비롯해 많은 것은 번역해야만 했다.

세상의 지식을 모두 빨아들이려는지 계속해서 타국의 책을 들여왔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 그런 것은 없다. 단지 내가 이루고자 할 뿐이다.”

“폐하를 위해 피를 흘릴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중간에 길이 다르다 싶으면 갈라질 것이다.”

배신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이황은 신유성이 더욱 두려웠다. 명종에게 치욕을 주어 자살하게 만든 것이 떠올랐다.

신유성은 선동에 능했다. 사람들의 욕망을 휘두르는 데 능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황은 표정을 굳혔다. 마음 또한 표정을 따라 단단하게 굳었다. 찌르고 들어올 빈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

허나, 신유성의 혓바닥은 결국 빈틈을 만들고야 말았다.

“나는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신도 아니고 고귀한 혈통도 아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이황은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

“아, 내가 신의 뜻을, 하늘의 뜻을 이어받았는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잘 되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일 수도 있다.”

이황도 신유성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을 몇 번 접해봐서 알고 있었다. 신유성은 지금 부정하고 있지만 신유성이 신이라고 믿는 이들이 흔들리는 일 따위는 없었다.

믿고 싶은 마음이 모든 것을 왜곡하게 만드니까.

“역관의 자식이었다. 절대 고귀하다곤 할 수 없지. 허나, 명의 태조는 나보다 더 심했다. 거지였지 않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황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황제가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깎아먹는 말을 하니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어쨌거나 나는 신국을 세웠다.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대단한 일이지. 허나, 나의 자식도 과연 나처럼 대단할까? 그건 모를 일이다. 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을 보라. 그는 명나라를 세우는 위대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어땠나?”

이황은 가정제를 떠올렸다. 불로장생에 광적인 집착을 보인 미친 황제. 만약 가정제가 평범한 황제였다면 명나라가 무너질 일은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적당히 할 일만 해줘도 명나라는 잘 굴러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로장생에 미쳤다. 더구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간신을 썼다. 그 결과 명나라는 약해졌고 신유성은 약해진 틈을 파고 들어가 꿀꺽했다.

“피에 의한 권력의 승계는 옳지 못하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

이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황제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건가? 설마 신권을 더 강화시키겠다고?’

미친 짓이었다.

지금 황권을 약화 시키고 신권을 강화시킨다면 신국은 대번에 분열하게 되어 있었다.

영주를 주어 자치권을 준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권위가, 중앙의 권위가 약해지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있었다. 무너진 몽골 제국이 여럿으로 갈라진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을 하기에 세상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결국 황권을 약화시키지 않겠다는 소리.

‘나를 놀리는 건가?’

“그대는 보고 싶지 않나? 백성들이 자신의 손으로 나라를 이끌 사람을 뽑는 세상을?”

신유성의 유혹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