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4 / 0271 ----------------------------------------------
인재들
대면 이후 신유성은 이황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처소로 돌아온 이황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정말 알 수 없는 분이시네.”
이것이 신유성에 대한 이황의 평가였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미치광이’였다. 허나 황제를 미치광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알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황의 표정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냥 이대로 계속 지내는 편이 낫겠군요.”
“아니, 그건 잘 모르겠네.”
거절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미치광이 황제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힘든 일인가? 그런데 이황은 미련을 접지 못했다.
신유성이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백성이 뽑는다고?’
말도 되지 않았다고 이황은 생각했다.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소인배들이 모여 지도자를 뽑는다면 나올 사람은 딱 하나였다.
‘그래, 그 분이 뽑히겠지.’
욕망을 휘두르는 황제, 신유성 말고 뽑힐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황은 딱 잘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더 들어보고 싶었다.
다음 날, 이황은 신유성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이 어찌 변해야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이루어집니까?”
질문을 받은 신유성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렸구나!’
허황된 소리라 여겼다면 더 물어볼 것도 없다. 하지만 궁금해 한다는 것은 흥미를 끌었다는 것. 결국 가슴 속에 숨은 욕망이 미끼를 슬쩍 물었다는 소리라고 신유성은 이해했다.
“사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를 뽑아야 할 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 먹고 살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나? 그러니 우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말.
‘말은 쉽지.’
이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결국 예외로 치겠군요.”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거야 날 돕는 신하들 하기 나름이지. 내가 왜 영주를 두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했는지 안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으음.......”
이 부분에서 이황은 반론을 펴지 못했다. 영주들이 영지민을 더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보면 결국 영지민들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많다. 나도 다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이지. 허나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면 된다. 아무도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다.”
만약 다른 사람이 신유성이 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면 대번에 역모혐의로 잡혔을 것이다.
“우선 내가 찾아낸 문제는 바로 학문이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성에 대한 탐구도 좋지만 만물의 이치를 더욱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를 이용해 사람에게 좋은 것들을 찾아낼 것이 아닌가?”
신유성은 증기기관을 예로 들었다.
인력의 필요성을 줄이는 기계.
이것만으로도 생산성을 상당히 올라간다.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된다. 그럼 자유롭게 된 이들에게 또 다른 일을 시킨다. 이것이 신유성의 생각이었다.
“일을 만드는 것이 결국 군주의 덕목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난 내 재산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를 정복하고 지하자원을 독점한다면 돈이 부족할 수가 없다.
이황은 금방 신유성의 속셈을 눈치 챘다.
‘영원히 망하지 않는 황실을 만들 속셈인가?’
하지만 상속 전쟁은 결국 분열을 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허나, 이황은 황실이 망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신유성이 말한 것이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
“언젠가 때가 된다면 황실은 뒤로 물러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조정에서 직접 이끌어가게 되는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예언을 하는 것처럼 말하니 이황의 마음은 마구 흔들렸다.
‘과연 될까?’
의혹이 있다. 그런데 그 의혹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될 거라고 속삭이는 감정이 있다.
욕망.
신유성이 말한 대로 이뤄진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만든 욕망이었다.
황제인 신유성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정말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능한 왕이 아닌 유능한 신하들이 이끌어가는 나라. 혈통이 아닌 가진 능력이 출중한 이들이 이끌어가는 나라를 보고 싶었다.
“그럼 나머지는 내일 얘기하도록 하지.”
신유성은 갈등하는 이황을 돌려보냈다.
‘이제 좀 있으면 넘어오겠군.’
신유성은 이황을 보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민주주의를 실현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은 없었다.
‘민주주의는 매력적이지.’
다만 민주주의마저 하나의 도구로 사용할 뿐이었다.
‘한 300년 있으면 되려나? 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빨라도 100년은 지나야 제대로 굴러갈 것 같은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 안에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매체들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신유성의 생각이었다.
신문만 가지고는 어려웠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이러한 것들이 꼭 필요했다.
‘뭐 지금 당장이라도 텔레비전을 개발해낸다면 민주주의 못 해줄 것도 없지.’
텔레비전 시청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를 당장 시행하는 것은 어려워도 입헌군주제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어차피 지하자원은 내 소유니까.’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에너지 자원 소모는 더 늘어난다.
지하자원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 경제를 지배하게 된다고 신유성은 믿고 있었다.
민주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지번도 이황을 설득하는 자리에서 듣고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신유성이 직접 한 말이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지함과 이산해도 이야기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을 알 수 없군요.”
“우리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분이시다.”
신유성이 황제로서 자만에 빠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보고 싶긴 하네요.”
“그럼 더 열심히 해야지.”
“폐하라면 아마 쉬엄쉬엄하라고 하실 걸요. 너무 무리하면 병난다고.”
“그건 그렇구나. 쉴 땐 쉬어야지.”
이지함은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하면 사람이 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은 이지함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이제는 이것에 대한 자료까지 만드는 중이었다.
한편, 이황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사람들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보통 초대 황제쯤 되면 자신의 권력 강화에 더 힘을 쓴다. 토사구팽을 하는 것은 물론 후계 구도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 정적이 될 만한 이들까지 제거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권력자들의 행보였다.
그런데 신유성은 그런 것을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싸운 이들에게 상을 내리며 더욱 격려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요.”
“어쩌면 그런 오만함이 성장의 원동력일지도 모릅니다.”
도전을 받아들이는 자는 더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쉴 수 없다. 이러한 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적을 없애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 덤빌 생각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허나, 신유성은 전부 다 받아줄 기세였다.
‘그러니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고 한 것이겠지.’
명종을 모셨던 신하들. 신유성이 직접 노비로 만들었다. 원한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황제. 원한이 있긴 하지만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했다.
거대한 명나라를 단숨에 꿀꺽한 남자였다.
보통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자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고 여길 일을 신유성은 해냈다. 그러고도 모자라 더 많은 땅을 정복하겠다고 하고 있다. 세상을 일통하겠다며 적이었던 이들까지 부리려고 한다.
패기.
그야말로 패기로 똘똘 뭉친 인간으로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음.”
이황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망설인다는 것 자체가 생각이 있다는 소리니까.
그만큼 신유성이 준 기회는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일가친척들을 모두 노비에서 풀려나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 해보고 싶습니다.”
권철이 나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류중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은 싫습니다.”
“원한을 품었다면 차라리 그냥 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인물의 말에 류중영은 인상을 구겼다.
벌써부터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무섭군.’
이런 상황마저도 신유성이 의도하고 벌인 일이라면 정녕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두렵다고 내뺄 생각은 없었다.
“다들 각자 알아서 하시게. 나한테 일일이 허락 받을 필요 없네.”
이황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지번이 원하는 이들은 모두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의종군을 위해 남자를 내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백의종군을 위해 가는 곳이 밝혀지자 또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몽골 초원으로 원정을 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그냥 조용히 경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가게 된다니 나이든 이들은 걱정부터 앞섰다.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
권철은 막내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네가 전쟁에 나가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아버지. 집안에는 아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막내죠. 제가 가는 게 맞습니다.”
권율이 나이든 아버지 대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어허.”
“아버지. 소자를 보내주십시오. 그들의 허와 실을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철 또한 신유성에게 원한이 좀 있었다. 허나 원한이 있다고 뭔가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서툰 짓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조용히 살면 되는 것이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지.”
권철은 권율의 제안을 묵살했다.
밤이 되자 권율은 친구인 류성룡을 만났다. 나이는 어리지만 비슷한 또래이기에 노비 생활을 하면서 권율은 류성룡과 친하게 지냈었다.
“형님, 정말 가실 겁니까?”
“어찌 나이 드신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겠냐? 내가 가야지.”
“하지만 명을 거역하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이해해주실 것이다.”
권율이 근처의 병사에게 입대 의사를 전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언제든 지원자는 말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류성룡은 류중영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류중영 또한 나이가 많았다. 전쟁터에서 싸우지 못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집안을 다시 세우려면 자신보다는 류중영이 더 필요하다고 류성룡은 생각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너도냐?”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다 죽는다?”
“죽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권율은 피식 웃어주었다.
“그래,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백의종군을 하겠다고 선수를 쳐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권철과 류중영은 철회해달라고 했지만 권율과 류성룡의 의사가 확고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다음 날, 이황은 다시 신유성과 마주하게 되었다.
“참으로 무서우신 분이시군요.”
이황은 신유성의 의도를 다 꿰뚫어보았다. 신유성이 해온 일들, 만든 법들.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계산을 해보니 의도가 보였다. 이황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더더욱 바른 길로 인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신유성의 말대로 민주주의 사회가 온다고 해도 신유성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어떤 황실보다 더 끈끈하게 이어지는 황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금력을 지배하는 황실.
사람들이 욕망을 따라, 돈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고 돈을 지배하겠다는 속셈을 읽은 것이었다.
“별 거 아니지.”
신유성은 웃었다. 사실 신유성이 진정한 천재라서 이런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부 미래의 기억 덕분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 나온 민주주의와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역사 속에서 증명되며 살아남은 지식들이었다. 신유성은 이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보기에는 그저 천재처럼 보일 뿐이었다.
“폐하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대에게 막힐 정도였다면 황제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신국의 백성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쓸모없는 돌멩이와 다를 것 없다.”
“저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돌멩이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이황은 결국 받아들였고 신유성은 웃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