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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137화 (13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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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들

취사병 생활은 길지 않았다. 신병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이들 중에도 말을 타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리고 훈련을 받으며 낙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기병으로서 낙오했던 이들은 그 누구보다 혹독하게 굴려졌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은 주제를 모르고 나댄 놈들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니들의 주제를 내가 몸에 새겨주겠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한다. 일은 잘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똥지게를 지고 똥을 푸러 다니기도 한다. 온갖 더러운 일에 굴려진다. 그러다 또 다른 낙오자가 밑에 들어오면 벗어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면 몸을 박박 씻게 된다. 온갖 더러운 일을 했으니 땀을 빼며 달리고 몸을 씻는 일을 엄청나게 반복한다. 그런 뒤에야 군영에 있는 의무병의 진찰을 받고 취사병이나 다른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아, 정말 좋군요.”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에겐 지옥 같은 취사병 생활이지만 진짜 밑바닥에서 구르던 기병 낙오자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그렇게 힘들었나?”

“말도 마십시오. 어찌나 굴려대던지. 그냥 딱 죽고 싶더라고요. 어휴.”

이황은 곁에서 웃으면서 일하는 청년을 보았다. 청년은 출신은 보잘 것 없었다. 능력도 대단치 않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원정군에 들어온 건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거야 폐하를 위해 싸우는 거니까요. 그리고 폐하의 원정군에 지원한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더라고요. 우리 동네에도 아는 아저씨가 있는데 전쟁 갔다 오더니 지주가 됐지 뭡니까? 정말 부러워요. 폐하의 원정군에 들어가면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도 주고 배당도 주고. 막 주시지 않습니까? 정말 행복한 일이죠.”

“그것도 다 살아 있을 때 얘기 아닌가?”

“에이, 예전에는 전쟁에 끌려가도 아무 것도 받지 못했는데요 뭘. 그거에 비하면 폐하는 정말 자비가 넘치시는 정의롭고 위대하신 분이시죠. 그냥 성군이십니다. 예. 히히히.”

청년은 신이 나서 무를 썰고 있었다.

이황은 그런 청년을 보다 다시 무를 썰기 시작했다.

‘민심이 폐하를 택한 것인가? 아니면 돈으로 민심을 산 것인가?’

이황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신유성은 그다지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자비? 자비도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나 베풀 사람이었다. 남을 이용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을 베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유성을 찬양했다.

신유성이 하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많은 이들을 접하며 이황의 사고방식은 조금씩 변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쩌면 신유성의 방식이 좀 더 사람들을 빠르게 변화 시킬 수도 있겠다고 공감하는 것 뿐.

‘이익을 들고 흔들면 사람들은 따라온다.’

그 동안에는 금기시하던 일이었다. 재물을 탐하는 마음을 멀리해야 하여 오직 청렴을 추구하던 신념에 반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황은 다른 생각을 했다.

‘청렴한 사람이 성공하고 부덕한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선비의 눈빛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호는 목을 길게 빼고는 길목을 살폈다.

‘오실 때가 됐는데?’

기다리다 지친 한호는 손에 든 나뭇가지를 움직였다. 글씨를 쓰기 좋게 만들어둔 땅에 나뭇가지가 닿았다. 순간, 땅은 종이가 되고 나뭇가지는 붓이 되었다.

‘슥’하고 손이 움직일 때마다 글씨가 완성되어 갔다.

유려한 서체가 돋보이는 글씨들이었다. 글자들은 단숨에 완성되었다. 멋진 글씨였으나 한호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글씨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옆에 놓은 빗자루로 땅을 쓸어 다시 글씨를 쓰기 좋은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오신다!’

멀리서 한 사람을 대동하고 움직이는 이황이 보였다. 땅을 다시 한 번 살피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자 냉큼 빗자루를 던졌다.

이어서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점점 마음을 비웠다. 잡념을 떨쳐냈다. 이윽고 발소리를 의식하는 마음마저 떨쳐낸 한호는 눈을 부릅떴다. 마음  속에는 오직 쓰고자 하는 글자만을 떠올렸다.

마음이 가는 곳에 손이 갔다.

나뭇가지는 손의 연장선에 있을 뿐!

몸이 나뭇가지고 나뭇가지가 곧 몸!

전신을 이용해 글을 썼다. 기세가 살아있다. 용솟음치는 힘이 손을 통해 나뭇가지를 타고 땅에 내리꽂혔다.

번개와 같은 번뜩임!

“허어.......”

지나가던 이황과 허엽은 걸음을 멈추고 한호가 쓰는 글을 바라보았다. 한호가 쓰는 것은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 딱히 감탄할 내용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황과 허엽은 감탄했다. 내용이 아닌 글자 그 자체를 보고.

“명필이구나!”

이황의 감탄에 허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가?”

“한호라고 합니다.”

“그래, 내게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가?”

이황은 한호의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자신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때를 맞춰 글씨를 썼다. 명필임을 보이며 시선을 끈 것에 의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냥 글씨 연습을 하고 싶었다면 좀 더 조용한 곳에서 하는 편이 방해도 받지 않고 더 편했다.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제자가 되어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

“죄인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다만 학식이 높은 분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게 배운다면 폐하의 눈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네. 그래도 좋은가?”

한호는 약간 주저했다. 신유성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짝 두려웠다. 그러나 명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입대했다.

‘이미 알고 있었지 않나! 우둔하긴!’

한호는 자신을 질책하며 크게 외쳤다.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출세의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제자가 되길 원하는 한호의 대답에 이황의 마음이 움직였다.

“배우겠다는 사람을 막는 것도 도리는 아니겠지.”

그렇게 한호는 이황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황이 한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군영에서 사건이 터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왜 쌀이 모자란 건가?”

비리 사건이었다. 쌀이 모자랐다.

처음에는 병사들이 그냥 밥을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병사들이 밥이 조금 부족하다는 식으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조사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쌀 창고의 쌀이 부족했다.

“어떤 놈이 폐하의 쌀을 훔친 것이냐!”

군영의 책임자는 노발대발했다.

군영에서 사용되는 모든 것은 신유성이 직접 돈을 들여 지급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입는 군복부터 입에 들어가는 음식 전부 신유성이 돈을 냈다.

그러니 누군가 쌀을 훔쳤다면 신유성의 것을 훔친 것이었다.

범인은 얼마 안 가 잡혔다.

상인 하나와 식자재 구입을 담당하는 놈이 짜고서 쌀을 빼돌린 것이었다.

대량의 쌀을 소모하는 군영이기에 아주 조금만 슬쩍 했다면 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씩 빼먹고 숫자만 맞췄다면 그야말로 완전 범죄가 될 수도 있었다.

허나, 구매 담당자가 갑자기 대량으로 해먹고 도망치려 했다. 그래서 들통이 난 것이었다.

한 탕 크게 해서 다른 나라로 도망치려던 범인은 잡혔다. 죽지는 못했다. 고문 끝에 모든 것을 토설하고 숨긴 재산을 몽땅 몰수당한 뒤 탄광에 보내졌을 뿐.

“상인의 재산은 모두 몰수한다. 그리고 그 가족은 탄광으로 보낸다. 아울러 담당했던 놈을 잡아라.”

이어서 식자재 구매 담당을 하던 이들은 전부 똥통을 치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비리에 적극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어 처벌은 면했지만 그렇다고 군영 책임자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책임자는 누구로 하실 겁니까?”

“누구로 하긴. 적당한 사람들 있지 않나? 그들로 하지.”

새로운 구매 책임자로 올라선 것은 이황이었다.

“얼마나 청렴한지 보자고. 보면 폐하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알 수 있겠지.”

군영 책임자는 이황과 그를 따르는 이들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더욱 강화했다.

지옥 같은 취사병 생활에서 갑자기 식자재 구매 담당이 된 이황의 생활은 편안해졌다. 일반 평민이었다면 숫자 맞추느라 머리가 빠개지는 두통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머리 쓰는 것이 일상이었던 이황과 선비들에게는 너무나 편한 일이었다.

전임자들이 하루 종일 해야 할 일을 이황이 하면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진이나 걸리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고 물건을 확인하느라 걸리는 시간일 뿐이었다. 장부를 정리하는 일은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지방관으로 일했던 경험은 군영에서도 유효했다. 더구나 이황의 곁에 있는 이들도 하나같이 머리가 좋은 사람들 뿐이었다. 계산 따위로 허우적거릴 인사들이 아니었다.

“여기가 극락인가 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쌀을 씻느라 손이 퉁퉁 부었었다. 수만이 넘는 병사들이 먹을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어야 했다. 그것도 대충 씻으면 안 된다. 행여나 밥이 잘못 되어 병사들이 아픈 일이 벌어지면 취사병 전체가 벌을 받게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취사병에게는 전쟁이었다.

밥만 지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야채를 다듬고 절여야 했다. 고기를 삶아야 했다. 허나 가장 힘든 일은 바로 설거지.

그릇을 깨끗이 씻어놔야 했다. 요리 했던 도구들도 마찬가지.

힘겹던 취사병 생활에 비하면 선비들에게 관리직은 그야말로 꿀맛 같은 보직이었다. 각자 지닌 능력에 따라 지내기 편한 곳은 다른 것이었다.

“병서를 좀 더 읽어보는 게 좋겠구나. 훈련하는 것도 좀 보고.”

이황은 시간이 많이 남는다고 헛되이 보내려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명상을 하거나 학문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시 더 위로 올라가 무엇인가 바꿀 힘을 얻기를 갈망했다. 그러기 위해선 공을 세워 신유성의 신뢰를 얻어야만 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황 본인이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러나 이황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황의 움직임에 따르는 이들도 같이 움직였다. 이황의 생각을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이 죽는다면 그 뜻은 제자들이 이어받는다.

이황을 스승으로 모시는 이들은 이황의 뜻에 공감했다. 마음속으로 품은 욕망의 형태는 제각각 조금씩 다르다 할지라도 이황이 살아있는 지금은 모두 똑같이 행동했다.

군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 아닌 후방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병법을 비롯해 원정군의 전략에 대해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석봉아. 이것도 네가 정리해라.”

그리고 석봉이란 호로 불리는 한호는 기록을 담당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한호가 이황의 제자들 중 가장 글씨를 잘 쓰기 때문이었다.

같은 보고라도 더 멋진 글씨로 보고를 하면 더욱 돋보이는 법.

무엇보다 모든 서류를 직접 정리하며 배우게 되는 것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한호는 군대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원균은 짜증이 났다.

‘젠장! 이번에도 또!’

최고의 성적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뭐야?’

이정을 바라보던 원균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원균이 단연코 앞서는 성적을 보였다. 원준량이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원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무관이 되겠다고 결심해 각종 무술을 익히며 기마술도 당연히 익혔다.

반면 이정은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서툴러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정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제는 원균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기마술과 궁술 모두 이정이 더 높은 성적을 보였다. 유일하게 유리한 것이라면 바로 근접 무기술 정도.

갑옷을 입고 죽도를 들고 하는 대련에서는 원균이 조금 앞섰다. 허나, 그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군영에서는 근접 무기술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다.

오히려 궁술과 사격에 더 치중했다.

사격은 화승총을 이용한 사격이었다.

‘화승총을 들고 뭘 어쩌라고.’

기병이 화승총을 사용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한 발 쏘고 나면 재장전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사격에 대한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그 다음이 바로 척탄.

기마 척탄병이 가장 들어가기 힘든 병과였다. 하지만 들어가기 힘든 만큼 가장 위험하기도 했다.

기마 척탄병은 병력이 밀집된 곳으로 달려가 폭탄을 던지는 게 일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목숨을 내던지는 병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언제나 우대 받았다. 군율이 조금 느슨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훈련만 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 술을 마시고 여자를 안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병들은 기마 척탄병이 되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기마궁사가 되고자 했다. 원균도 마찬가지. 그런데 기마궁사 성적은 이정이 원균을 앞섰다.

‘이대로라면 조장 자리가 위험한데.’

원균은 초조했다. 성공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살짝 시비를 걸어보기도 하고 돈으로 회유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어쩔 수 없나.’

결국 원균은 포기했다. 질투가 나긴 했지만 자신보다 연장자였으니까. 실력도 더 나았으니까.

‘밑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낫겠다.’

결국 원균은 이정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 밑에 있으면 공을 세우기 좋으니까. 그리고 뛰어난 사람 밑에 뛰어난 부하들이 많으면 공을 세울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원균은 자신과 함께 하는 호위들과 함께 이정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정은 별 다른 말없이 이를 받아주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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