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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과 방어
미래의 기억. 그것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정신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미치겠네.’
현실과 기억 사이에서 신유성은 고통에 시달렸다. 더 나은 세상이 있었다.
강렬한 기억은 계속해서 떠올랐다.
황제가 되었지만 미래의 평범한 시민이 즐겼던 것들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야구도 못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상대해주질 않았다. 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었다.
황실의 금군으로 만든 야구단은 계속해서 승리했다. 패배는 없었다. 이제는 자기들끼리 전문적으로 야구를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신유성은 없었다.
야구에 끼워주질 않았다.
연습하는 데 몇 번 뛰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았다.
금군은 신유성에게 무조건 져주었다.
신유성이 뒤로 공을 던져도 배트를 휘두를 정도였다. 성질나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더니 배트로 막아내기도 했다.
자신이 훼방꾼이 된 느낌에 신유성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당구를 치기도 했지만 당구는 금방 질려버렸다. 내기를 하면 무조건 져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최근에는 패배한 적이 없었다.
신분 하나로 다 먹고 들어가니 경쟁이란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기행을 벌였다. 과학을 조금이라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미래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래서 전자기기들이 마구 늘어나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어느 세월에.’
허나, 신유성은 회의를 느꼈다. 결국 다시 시들해졌다.
“이것을 만들어라.”
이번에 만들라고 시킨 것은 스케이트보드였다.
나무로 바퀴를 만들어 판자 밑에 달았다. 그리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위한 스케이트보드장을 만들었다.
만들어지기는 뚝딱 만들어졌다.
간편한 복장을 한 신유성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였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집중할 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허어.”
임거정이 볼 때 신유성이 하는 놀이는 뭔가 대단한 면이 있었다. 야구도 그렇고 지금 하고 있는 것도 그랬다.
“폐하의 생각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시는군요.”
호위들은 연신 신유성을 칭찬했다. 하지만 임거정은 금방 신유성의 고독을 읽어냈다.
‘외로우신 거구나.’
불현듯 신유성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중용한 신유성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이시라면.......’
임거정은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폐하께서 외로워하신다고?”
“그저 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보였습니다.”
“으음.”
이에야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신유성이 외로움을 탄다고 하니 믿기지 않기도 했다. 기억 속의 신유성은 언제나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기행이 늘어나신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왜 그러신다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하고 싶으신 것을 못하셔서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야구를 못하게 된 것부터 전쟁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까지 설명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독수공방도 하고 있었다.
“여인을 안으시면 되실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최근 들어 주녹정이 여기 저기 편지를 보내 미녀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이에야스는 몰래 사략 해적을 보내 이국의 미녀를 구하라고 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미녀를 구해온다고 신유성이 안을지는 미지수였다.
“뭔가 방법이 없으십니까? 이곳을 지은 이유도 폐하를 모시기 위함 아니었습니까?”
“방법을 생각해보겠네.”
임거정이 돌아가자 이에야스는 사람들을 잔뜩 불렀다. 그리고 신유성의 관심을 끌만한 것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며칠 후, 신유성은 한 장의 초대장을 받았다. 이에야스로부터 온 것으로 회관에 한 번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한 번 가봐야겠다.”
“준비하겠습니다.”
암살 사건 이후로 관계가 살짝 소홀해진 감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에야스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생긴 뒤 너무 가까이 하면 주변에서 엉뚱한 생각을 품을까 싶어 거리를 둔 것이었다.
허나,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신유성은 다시 이에야스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회관은 일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텅 비었다. 금군이 회관을 둘러싸고는 먼저 조사에 들어갔다. 화약이 폭발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화약이 숨겨져 있지 않나 먼저 조사하는 것이었다.
금군은 개를 이끌고 화약이 있는지 조사하고 다녔다.
화약이 설치되지 않고 암살을 위한 장치가 없다고 확인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신유성은 입장할 수 있었다.
황제가 한 번 움직이면 이렇게 번거로워지니 신유성은 외부로 돌아다니는 것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이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건 그렇고 즐겁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기대하겠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회관의 복도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동양화만이 아니었다. 여러 지역의 예술품들을 모아 진열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가 뒤섞여 혼잡한 느낌도 있었으나 이색적인 맛도 있었다.
신유성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미 다 본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이 열리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안쪽에는 무대가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큼지막한 탁자가 있었다.
자신을 위한 자리임을 직감한 신유성은 서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에야스는 감히 동석을 하지 못하고 곁에 서 있었다.
“앉아라.”
“하지만.......”
“앉아. 설마 명을 거역할 셈이냐?”
“앉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이니 앉는다.
“그래 오늘은 뭘로 날 즐겁게 할 셈이지?”
“남만인들의 요리를 조금 만들어봤습니다.”
“그래? 웬만해선 날 만족시키기 힘들 텐데.”
이에야스는 웃으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차례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처음에 나온 것은 해산물 스프였다. 걸쭉한 느낌은 느끼해 보였으나 신유성은 거침없었다.
“음, 나쁘지 않아.”
이미 먹어본 것을 약간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궁에서 살면서 누구보다 요리에 민감한 신유성은 다양한 것들을 먹어왔다. 황궁 주방은 신국 최고의 숙수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요리를 총망라하여 연구를 거듭해 최고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냈다.
이런 이들이 만든 요리를 매일 같이 먹어본 신유성을 요리로 만족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두 번째 요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고기 파이였다. 그냥 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파이의 반죽 부분은 바삭하게 익혀져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여기에 양념된 고기를 함께 떠서 먹으니 맛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리도 신유성은 이미 먹어 보았다.
맛은 있으나 크게 흥미롭진 않은 식사.
침묵 속에 요리를 묵묵히 음미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요리가 나올 때, 변화가 생겼다.
은은한 음악이 흘렀다. 어딘지 모르게 끈적끈적한 느낌이 드는 음률이었다. 이어서 무대 위로 누군가 올라왔다.
“음?”
여인이었다. 망사를 한 여인은 배꼽을 드러낸 복장이었다.
‘이건?’
이어서 음악이 점점 격렬해졌다. 그러나 끈적끈적한 느낌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음률에 맞춰 여인은 허리를 흔들었다. 배꼽이 흔들렸다. 골반이 흔들리며 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슴을 가린 천이 아니었다면 꼭지가 신나게 춤을 추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시선을 빼앗겼던 신유성은 피식 웃으며 세 번째 요리를 먹었다.
세 번째 요리는 대단할 것은 없었다. 간단한 안주였으니까. 대신 함께 나온 술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나쁘지 않네.”
벨리 댄스를 보면서 신유성은 웃었다. 이어서 춤을 추는 여자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오랫동안 독수공방했던 신유성에게는 꽤 자극적이었다. 불끈 힘이 치솟았다.
허나, 신유성은 여자들의 춤을 보며 묵묵히 요리만 즐겼다.
신유성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에야스는 신호를 보내 여자들을 물렸다.
“여인에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저들 중 마음에 드는 아이 한 명을 들이셔도 될 텐데요.”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구나.”
“알겠습니다.”
다시 신호를 보내자 잔잔한 음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이 나왔다. 하지만 전혀 유혹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저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졌을 뿐.
신유성은 요리를 계속 먹으며 이에야스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그런데 군대는 좀 키웠느냐?”
“처리할 자가 있으십니까?”
순간 이에야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건 아니고 슬슬 산동이 어찌 되었나 해서 말이다. 슬슬 추가 원정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야. 무리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안정이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이에야스는 더욱 빨리 산동을 안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는 안정이 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약간 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는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 중원의 주인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력을 많이 빼내면 불만을 품은 세력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질 수 있었다. 과격한 자들을 이미 한 차례 숙청해 잠잠해졌다고 하지만 불만이란 잡초와 같은 것.
한 번 뽑았다고 또 자라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황후가 준비한 것이냐?”
뜬금없는 질문에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역시 그렇군.”
표정에서 이미 답을 읽은 신유성은 피식 웃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다 날 생각해서 그런다는 것을 안다. 내가 미안하지.”
“아닙니다.”
“당구나 한 번 치자.”
신유성은 이에야스와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최선을 다했다. 그제야 신유성은 활짝 웃었다.
“역시 넌 내 마음을 아는구나. 오래 살아라.”
그냥 져주는 사람과 게임을 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신분으로 깔아뭉개서 자신의 위치를 자꾸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신유성이었다.
신국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알기에 신유성은 놀이에서까지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동등하게 즐길 사람이 필요했다.
가볍게 경쟁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몰라주고 다들 접대하듯이 져주기만 하니 즐거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그랬다. 그래서 그냥 멀리했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런 이들과 달리 열심히 상대하려고 노력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오랜 만에 즐겁게 논 기분에 신유성은 흐뭇해졌다. 가족을 비롯해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마저 없었다면 아마 진즉에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다음에 또 하자.”
“네.”
회관을 방문한 대가로 신유성은 은 1관을 주고 돌아갔다. 회관을 전세 내서 사용한 이용요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에야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대신 다음 날, 황실 숙수가 비전의 요리법을 하나 전수해주고 돌아갔다.
이것으로 이에야스는 금을 벌어들였다.
시비르 칸국.
전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야디가르 칸은 이미 영향력을 잃었다. 시비르 칸국에 모스크바 차르국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쿠춤은 신국의 기병과 함께 싸우며 차르국의 군대를 물리쳤다.
“저들이 요새를 만들기 전에 부셔야 한다.”
이정은 부하들을 이끌고 돌격했다.
명령이 떨어졌으니 완수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흩어진 대형으로 돌격하니 차르국의 포격으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스트렐치의 사격은 꽤 치명적이었다.
“컥!”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니 총에 맞고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단 한 차례의 사격만을 허락했을 뿐이었다.
기병의 무서운 점은 빠르게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것.
제대로 진지 공사를 하지 못한 차르국의 병사들은 저항을 해보았지만 스트렐치의 사격 한 차례가 끝이었다.
차르국의 병사들은 맹렬히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기병이 진지에 난입한 뒤에는 학살이 이어졌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부상을 입고 쓰러진 이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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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