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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147화 (14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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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과 방어

시비르.

오비강을 따라 나무로 만들어진 요새가 여기 저기 세워지고 있었다.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다. 야디가르 칸을 따르다 결국 사로잡혀 노예가 된 자들이었다.

“빨리 움직여!”

쿠춤을 따르던 이들은 노예들을 재촉했다. 때는 가을, 겨울이 오면 강이 얼어붙기 때문에 요새는 빨리 완성되어야만 했다.

강이 얼어붙으면 도강이 쉬워진다. 그렇게 되면 언제 어디로 모스크바 차르국의 기병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오비강 건너편에서는 치열한 추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흩어진다! 집결지에서 다시 보자!”

이정의 외침에 부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하들이 떠나는 것을 보며 이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이정의 부대는 정찰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기습을 당했다. 피해를 입자마자 이정은 후퇴를 명령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적의 규모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 섣부른 교전은 필패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 내린 판단이었다.

판단은 부대를 살렸다.

재빠른 판단 덕분에 소수만이 희생되었다. 시체를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부대 병력은 온전히 후퇴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정의 표정은 어두웠다.

‘젠장.’

죽은 부하들은 놔두고 도망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것. 지금까지 패배는 없었기에 처음 패배해 후퇴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대체 저 놈들은 뭘까?’

다시 슬쩍 뒤를 보며 맹렬히 쫓아오는 기병을 보았다.

훗날 기습을 한 자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예르마크의 코사크 병사들이라는 것을.

요새로 돌아온 이정은 바로 보고를 올린 뒤 부하들을 살폈다.

“정찰은 누가 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모두 한 명에게 쏠렸다. 이정은 시선이 집중된 이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왜 발견하지 못했지?”

“죄송합니다.”

“죽은 다음에도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보자.”

이정은 사정없이 짓밟았다. 얻어맞는 것은 원균이었다.

‘빌어먹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휘두른다? 하극상으로 목이 잘릴 것이다.

이정이 원균의 목을 벤다고 해도 부당하다고 말할 병사는 없었다. 함께 했던 기병들은 동료 의식이 투철했다. 그런데 원균의 정찰 실패로 결국 매복을 당했다.

원균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맞았다.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리며 계속 잘못했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깔끔하게 끝내주겠다. 죽고 싶으면 또 대충 해라.”

이정이 돌아서자 원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부하가 정찰을 소홀히 해 결국 병력의 일부를 잃었다. 이정은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벌을 받기를 청하는 보고서를 척계광에게 보냈다. 그리고 부하들을 불러 상의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놈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약탈을 통한 전력 분산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분명 저들은 어딘가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예상되는 지점은?”

지도를 펼쳤다. 제대로 작성된 지도가 아니라 정확히는 알기 힘들었다. 이정의 임무는 정찰과 약탈 그리고 지도 작성이었는데 모두 완수하지 못했다.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몇 번 더 정찰을 해봐야 예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 부근이 가장 수상합니다.”

부하들의 의견을 들으며 이정은 생각을 정리했다.

‘놈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추격했던 자들을 떠올리며 이정은 이를 갈았다.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알았다. 오늘은 이만 해산한다. 내일은 푹 쉰다. 모레 다시 움직인다.”

이정은 벌을 받는 날까지 정찰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하하하, 수고들 했다!”

예르마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코사크 병사들을 이끌고 이정을 기습했던 것은 바로 예르마크의 부하들이었다.

이반 4세가 카잔을 정복하고 더욱 동진하려는 이유, 그것은 바로 모피에 있었다.

모피는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는 품목이었다. 모피를 팔아 부를 축적한 이반 4세는 더욱 욕심이 났다. 그래서 모피를 칸국을 비롯한 타타르인들에게서 사들이는 것보다 땅을 차지해서 더욱 많은 이득을 챙길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카잔 칸국의 정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모피를 더 많이 얻게 되니 모스크바의 귀족들은 더욱 더 동쪽으로 가길 원했다. 카잔 칸국 이후에는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을 꿀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먹으려고 한 밥상을 가로챈 존재가 있었다.

바로 신국이었다.

유능한 장군인 알렉산드로도 물리친 강력한 적. 이 때문에 이반 4세는 원래 보냈던 지원에 예르마크까지 더해서 보냈다.

예르마크는 원래 리보니아 전쟁에서 코사크 병력을 지휘하며 약탈을 주로 했었다. 해적처럼 약탈을 많이 했으나 모스크바에서는 뛰어난 전사라는 명성을 얻었고 또한 전쟁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결국 차르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비르 전선에 투입된 예르마크의 역할은 바로 견제와 약탈이었다.

다시 한 번 요새를 지어 적의 허를 찌르는 동안 예르마크가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우랄 산맥을 넘어 오비강 주변을 터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 이정의 부대를 만난 것이었다.

“오늘은 푹 쉬고 모레 다시 털러 간다!”

“우와아아아아!”

“마셔라!”

코사크 부대는 신나게 먹고 마시며 승리를 즐겼다.

‘모레’가 되었다. 작전에 나서는 이정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폐하의 군대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다.”

출격을 앞둔 이정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선 우리가 승리에 취해 있어선 안 된다!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는 불충을 저질러선 안 된다!”

이것은 경고였다. 그 동안 쉬운 승리 덕분에 원정대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기습으로 인한 피해였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허나! 승리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그러니 임무를 소홀히 하지 마라!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다!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라!”

연설이 끝나자 부대는 출격을 위해 말에 올랐다. 이정은 말에 올라 홀로 남은 원균을 바라보았다.

원균은 너무 심하게 얻어맞은 상태라 함께 갈 수 없는 상태였다.

“가자!”

이정이 떠나고 홀로 남은 원균은 투덜거리면서 도로 자리에 가서 누웠다.

다시 강을 건넌 이정의 부대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예전에 움직였던 경로로 다시 움직였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정찰을 하기 위해 움직이던 이들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며 움직이는 모든 것을 경계했다.

그렇게 움직이던 이정의 부대는 갑자기 정지했다. 정찰을 위해 앞서가던 병사들이 무엇인가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적입니다. 수는 약 4백입니다.”

“활을 준비한다.”

이정의 부대는 모두 조선 출신이었다. 그리고 명궁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냥꾼에서부터 양반까지.

원정군에 입대하기도 전에 활을 다뤄본 경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번에는 이정의 부대가 매복했다.

적의 움직임을 보고 예상 경로에서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한 번의 승리로 자신감이 넘치는지, 아니면 한 번 당했던 곳이라 적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적의 정찰은 느슨했다.

그 결과 이정의 부대는 발각당하지 않았다.

이정은 말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도 팽팽했다.

신호는 따로 없었다.

적당한 순간에 이정이 손을 놓자 화살이 날아갔다.

“컥!”

적의 단말마가 신호였다.

화살이 연달아 날아가 적의 몸에 꽂혔다.

“적이다!”

“도망쳐!”

화살이 연속으로 날아오는 상황에서 적을 발견하고 돌격해 무산 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매복에 걸린 상황.

예르마크의 코사크 병사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추격한다!”

이정은 적의 뒤를 쫓았다. 뒤를 이어 부대는 열심히 달렸다. 죽은 전우의 복수를 할 시간이었다.

이정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숙련된 기마궁수들이나 할 수 있는 묘기.

흔들리는 말위에서 발사된 화살은 대기를 찢으며 날아가 적의 등에 박혔다.

“커헉!”

충격에 적이 쓰러지자 다시 고삐를 잡고 방향을 바꾸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달리는 것은 말에게 맡기고 활을 쏘는 것이었다.

이정과 같은 궁술을 가진 이들은 추격을 하면서 적을 잡았다. 이들의 무서운 궁술에 도망치는 코사크 병사들은 치를 떨었다.

“뭐라고? 당했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궁술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악마의 재림입니다.”

“으음!”

악마의 재림이란 말에 예르마크는 신음을 흘렸다. 동방 기마군단의 전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놈들은 절대 악마의 재림이 아니다.”

신음을 흘리다 정신을 차린 예르마크는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우린 이미 놈들을 한 번 격퇴시켰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놈들은 악마가 아니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잠시 말을 끊고 무기를 뽑은 예르마크는 근처에 있던 창대를 향해 휘둘렀다. 창대는 뚝 부려졌다.

“우리가 악마를 퇴치할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다! 신의 뜻이 우리와 함께 한다! 겁낼 것 없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부하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예르마크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위험할 뻔했다.’

약탈을 주로 해오던 병력이기 때문에 사기가 저하되면 전투를 하기보다는 후퇴를 선호하게 된다. 철저하게 자신보다 약한 적을 유린하는 것이 바로 사기를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리보니아 전쟁에서도 전장의 흐름을 살피며 약탈에 주력한 이유이기도 했다.

적 부대를 철저하게 쫓아낸 이정은 사로잡은 자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승리에 기뻐할 틈이 없다. 이놈들을 심문한다. 말이 통하는 자를 빨리 구해와라.”

“네!”

“전리품은 사망한 병사들에게 우선 배분하도록 하겠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 일이지만 병사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죽은 부하들을 먼저 챙겨주는 이정을 더욱 신뢰했다.

전쟁터에서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럴 때 죽었다고 자신의 몫을 주지 않는다면? 가족에게 돌아갈 것이 없다.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자기 목숨을 더 챙길 위험이 높아진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꼼꼼하게 챙겨주면 죽음을 조금은 덜 두려워하게 된다.

적어도 자신이 죽더라도 배당을 떼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든든해진다.

손해를 덜 본다고 생각하면 신뢰가 가는 것이다.

“좋다! 휴식이다! 오늘은 마음껏 쉬어라! 술을 마셔도 좋다!”

“우와아아아!”

기습으로 우울했던 부대는 다시금 밝아졌다. 죽은 동료의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부하들이 해산하자 이정은 따뜻한 물에 몸을 씻었다. 목욕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뜨거운 물을 끓여 천을 적셔 몸을 닦는 수준이었다.

몸을 깨끗이 닦아낸 뒤에는 바로 막사로 향했다. 짐을 뒤지니 병이 하나 나왔다.

마개를 열고 한 모금 마시자 화끈한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후우.”

바로 사탕수수로 만든 럼이었다. 유구를 비롯해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곳에서 생산되는 술로 뱃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술이었다.

이정은 곧 밖으로 나와 노래를 흥얼거렸다. 흥이 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부하들이 신나게 떠들며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함께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들이었다.

오랫동안 함께해서 이제는 형제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원균이 떠올랐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뺀질거리며 욕심 많은 성격의 원균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마구 패버렸던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균도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였던 것은 사실.

이정은 술병을 들고 원균의 막사를 찾아갔다.

“많이 아프냐?”

“아닙니다.”

이정은 크게 위로하거나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함께 묵묵히 술을 마시고는 한 마디 던졌다.

“죽지 마라.”

원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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