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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빛나는화살은 틀링기트족의 전사를 바라보았다. 틀링기트족의 전사도 빛나는화살을 바라보았다.
“건배!”
“건배!”
두 남자가 단숨에 술을 비웠다. 탄성을 흘리며 훈제 연어를 한 점씩 집어먹었다.
“맛있지?”
“맛있다!”
훈제 연어를 안주삼아 럼주를 마시는 두 사람 주변에는 이미 널브러진 남자들로 가득했다.
‘이 맛에 술을 못 끊지.’
겨울은 춥다. 그런데 독한 럼주를 마시니 속이 후끈해졌다. 여기에 짭짤한 간이 스며든 훈제 연어를 먹으니 감칠맛이 솟아난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빛나는화살은 술병을 바라보았다. 술은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다. 신이 내린 성수라고 말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신국은 럼주를 엄청나게 생산했다.
‘남쪽의 사탕수수로 만든다고 했었지.’
아이누 땅에서만 나는 것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빛나는화살이 만났던 상인이 다른 이야기도 해주었다.
더 많은 종류의 술을 마시고 싶다면 더 다양한 종류의 식재료가 필요하다고. 그래야 연구해서 만들어볼 수 있을 거라고.
탐험대를 열심히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났을 뿐이었다.
럼주를 마신 틀링기트족의 전사는 연신 술을 마시며 훈제 연어를 먹었다. 즐거운 것이었다.
틀링기트족과의 사이는 이것으로 많이 개선되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이들이었으나 몇 번 거래를 한 뒤에는 사이가 괜찮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전사들과 교류하며 말을 배우고 있었다.
서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니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틀링기트족이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아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다.
‘참 많이 싸우기도 했는데.’
틀링기트족을 만나기 전까지 탐험대는 종종 싸움을 해야만 했다. 원주민들 중에는 탐험대가 가진 물건을 탐내 공격한 이들도 있었다. 이런 이들과 싸우다보면 어느새 부족 전체와 싸우기도 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부족의 구성원 하나와 싸우면 전체가 달려드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은 상관없었다. 부족의 구성원이 잘못을 저질렀어도 외부인과 싸움이 붙으면 무조건 부족의 편을 드는 것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한 번 싸우게 되면 끝을 본다.
탐험대는 월등한 무기로 학살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사로잡아 노예로 만든다.
자비를 베풀겠다고 내버려둬야 나중에 또 덤빌 뿐이니까. 아예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그래야 뒤탈이 없고 주변의 다른 부족들이 우습게보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새로운 부족과의 만남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거 더!”
“더?”
“더!”
빛나는화살은 웃으면서 술을 따라주었다. 탐험대가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술이었다. 추운 곳에서 고생한다고 탐험대에게는 술이 무한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시자!”
“마시자!”
오늘도 빛나는화살은 취했다. 그리고 전사와의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틀링기트족은 새로운 거래로 얻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밀가루와 쌀이었다. 처음 밀가루와 쌀을 접한 틀링기트족의 족장은 매우 흥분했다.
“이런 맛은 처음이다.”
“정말 대단하다. 그 부족은 어디서 이걸 구했다고 하나?”
“먼 곳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얼음으로 뒤덮인 땅을 지나 바다를 건너서 왔다고 합니다.”
“대단하다.”
엄청나게 먼 곳에서 온 엄청나게 큰 부족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밀가루로 만든 만두를 먹어본 족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밥을 먹었을 땐 그저 황홀한 표정이었다.
“이런 음식들 얼마나 더 가지고 있다고 했지?”
“매해 가져올 수는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닷가에 땅을 달라고 합니다. 자기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하네요.”
빛나는화살과 술을 마셨던 전사는 어렵사리 얻은 정보를 풀었다. 말이 잘 안 통하니 손짓 발짓해가면서 겨우 알아낸 것이었다. 여러 번 찾아가고 물건을 교환하고 술자리를 가지며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던 것이었다.
“바다에서 나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요.”
틀링기트족의 족장이 의아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의 식문화에서는 바다에서 나는 것만을 먹는 것은 가난하다는 의미였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전쟁이나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바다에서 나는 음식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해산물이 몸을 약하게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걸 마셔보시죠.”
족장은 전사가 주는 술을 마시고는 깜짝 놀랐다.
“이건?”
“멀고 먼 남쪽에서 나는 것으로 만든 거라고 합니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죠.”
“이런 대단한 것을!”
럼주는 구경도 못해본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족장 또한 의아해졌다. 굉장히 부유한 자들이나 마실 법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산물을 잔뜩 가져가려는 존재들이라니.
틀링기트족의 기준에서는 뭔가 엄청나게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해산물만 잔뜩 가져가려는 행동은 가난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술도 있으니 그렇게 가난하다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알 수 없군! 알 수 없어!”
“먼 곳에서 왔으니까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겠지요.”
“그래, 참으로 신기한 사람들이야.”
“그들이 타고 온 배는 엄청나게 컸습니다. 곰 따윈 상대도 안 됩니다.”
“그렇게 컸나?”
술판이 벌어지고 정보를 주고받는 자리가 이어졌다. 전사는 자기가 본 것을 마구 떠들었다. 부족 최고의 지위를 가진 족장과 존경해 마지않는 주술사까지 귀 기울여 들어주니 신이 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데려온 하얀 짐승은 늑대들을 거느렸습니다.”
하얀 짐승, 김백구의 후손인 풍산개를 의미했다.
“오오오오오!”
주술사가 감탄했다. 하얀 짐승이란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신령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와 함께하는 이들이라니!”
“그렇죠? 하여간 대단한 사람들이죠.”
“아버지!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저도요!”
족장의 자식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탐험대를 만나고 싶다고 나섰다. 족장은 아들들에게 경쟁을 해서 이긴 쪽이 다녀오라고 말하고는 술에 빠져들었다.
알딸딸하게 취해서 부인의 옆에 누우니 부인이 왜 그렇게도 예뻐 보이던지.......
이날 밤, 오랜만에 족장은 부인을 실컷 안아주었다.
교류는 원활했다. 족장의 아들들은 크게 만족했다. 갤리온에 타보고는 신기해했다. 자신들은 만들지 못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거대한 집!”
“아마도 바다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바닷가 음식을 잘 찾나봅니다.”
“그래도 강하니까 이런 술도 마구 마시는 거겠지.”
강한 자들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어딜 가나 진리였다. 틀링기트족은 그렇게 생각했고 탐험대가 강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더구나 보여준 쇠뇌와 화승총은 감탄을 안겨주었다.
“불 뿜는 막대 엄청났다. 꽝! 하니까 팍! 새가 떨어졌다.”
“사슴도 꽝! 하고 잡았다.”
족장 아들과 전사가 어린 아이들에게 신나서 떠들었다. 아이들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상상하며 탐험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그들과는 친하게 지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건 그들이 입던 옷이죠. 친구라고 줬습니다.”
아이누가 입던 전통 복장은 틀링기트족의 것과 약간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감정적으로 좀 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좋다. 그들과 우호를 다진다.”
틀링기트족은 탐험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탐험대가 정착한 바닷가는 영역으로 인정 받았다.
아메리카에서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면 우랄 산맥과 오비강 사이는 그야말로 투쟁의 땅이었다.
“놈들의 뒤를 쫓지 마라! 함정일 거다!”
“돌아와!”
이정의 명령에 부하들과 튀어나가던 원균이 결국 되돌아왔다. 예르마크의 코사크는 교활했다. 치고 빠지는 일에 능숙했다.
허나, 예르마크와 싸우는 이정의 부대도 금방 적응하며 적의 전술을 습득했다. 두 집단은 싸우면서 서로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서로의 장점을 배우며 자신의 단점을 깨닫고 고쳐나갔다.
그렇게 한 겨울의 술래잡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하얀 벌판에 피를 뿌리는 잔혹한 술래잡기였다.
요새로 돌아온 이정은 이를 갈았다.
‘또 죽었다.’
서로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코사크도 이제는 경계심이 강해져서 예전처럼 매복에 걸리지 않았다.
큰 피해를 입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극심한 경계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는 정찰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규모 전투만이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정찰병이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상이 생긴 것으로 간주하고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서로 견제만 하다가 끝나는 일이 상당했다.
정면으로 붙기에는 서로 꺼려지는 것이었다. 상대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조건 돌격을 외칠 순 없었다.
만만치 않은 적이니 닥치고 돌격은 매우 위험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새로운 무기는?”
이정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계속 부하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피해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고동락하던 이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상황이 싫었다.
부대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
새로 만들어진 무기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가루라고 불리는 고춧가루가 든 자루였다. 황제인 신유성이 좋아하는 가루지만 고춧가루의 위력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눈에 들어가면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저 그런 고춧가루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매운 고추로 만든 가루였다.
말라카에서 직접 공수해온 악마의 열매로 만든 것이라며 다들 두려워하는 가루였다. 그래서 이름도 악마의 가루탄이었다.
무기의 특성상 바람 방향을 잘 읽고 써야만 하지만 제대로 한 방 터트리면 적을 무력화시키기는 충분했다.
3일 수, 가루탄을 소지한 정찰병들이 움직였다. 그러다 적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적 또한 정찰병을 발견했다.
야생에서 만난 짐승들처럼 양쪽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적은 하나다!’
정찰병은 쇠뇌를 겨누었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 아니었다. 복수심 때문이었다.
정찰병으로 움직이던 병사들은 전우애가 남달랐다. 항상 같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굴을 몰랐어도 정찰병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나자마자 금방 친해질 정도로 유대감이 있는 집단이었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함께 죽음에 대항했기에 싸운 유대감은 어느 때보다 강했다. 그리고 동료를 계속 잃었을 때 느끼는 분노는 상당했다.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길 잠들 때마다 빌 정도였다. 그러나 작전에 나서는 순간이 되면 공포보다 분노가 샘솟았다.
또 동료를 죽인 적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분노를 일으켰다. 적이 이번에는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살심이 절로 치솟으며 감각이 예민해졌다.
“히야아아아아아아!”
적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쇠뇌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팍! 쇠뇌가 꽂힌 곳은 나무였다.
땅을 굴렀던 적은 바로 몸을 일으켜 달려들었다. 적은 창과 검으로만 무장하고 있었다. 원래는 총이 있었으나 정찰병에게 화승총은 거의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재장전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화승에 불을 붙여놓고 움직이다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면 총을 쏘게 된다. 그러면 위치를 적에게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만다.
또한 총을 빼앗기면 무기가 그만큼 줄어드니 정찰병에게 화승총은 쥐어지지 않았다. 대신 창과 검 정도가 주어졌다.
격돌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정찰병은 쇠뇌를 내던졌다. 재장전 시간 안에 적이 도착할 테니까. 그래서 꺼낸 것은 가루탄이었다.
‘바람 좋고.’
마침 바람도 적을 향하고 있었다. 있는 힘껏 자루를 던졌다. 야구공 크기의 자루는 멋지게 허공을 날았다. 뭐가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적은 검으로 그것을 쳐냈다.
그러자 자루가 힘없이 터지며 고춧가루가 흩날렸다.
“커헉!”
눈이 화끈해지며 고통이 치밀었다. 적은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뒹굴면서 무기를 휘둘렀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 발버둥 치는 것이었다.
정찰병은 여유롭게 쇠뇌를 재장전하고 쏘아서 죽였다.
그리고 바로 자리를 이탈해 다른 적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숲에선 비슷한 전투가 여러 번 벌어졌다. 고춧가루탄의 위력 덕분에 정찰병들은 크게 승리했다. 그리고 정찰의 승리로 적의 규모를 어느 정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보를 얻은 이정은 부대를 계속 움직여 코사크의 거점을 찾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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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