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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정찰은 이정을 비롯한 오비강 근처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척계광의 연락을 받은 쿠춤 또한 적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놈들이 요새를 세운 뒤에는 끝이다!’
모스크바 차르국이 어떻게 카잔 칸국을 무너뜨렸는지 상세히 알게 된 쿠춤은 적의 공병을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렵사리 얻게 된 영지를 한 번의 실수로 빼앗길 순 없었다. 죽어도 차르국에 넘기기는 싫었다.
쿠춤을 따르는 타타르족은 맹렬한 추위 속에서도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품에는 독한 럼주를 품고 혹독한 눈바람이 부는 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다 너무 추워 몸이 얼어버릴 것 같으면 고춧가루를 쓰는 자들도 나왔다. 술을 다 마신 상태에서 몸이 얼 것 같을 때는 결국 고춧가루를 썼다.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몸에서 열이 나니까.
아주 조금만 찍어서 맛을 보았다.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수색한 결과 적의 움직임을 드디어 포착했다.
그리고 한 차례 전투에서 쿠춤은 적을 몰살 시킬 수 있었으나 쿠춤의 부대 또한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쿠춤은 바로 척계광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척계광은 고민하다가 결국 남은 병력을 시비르로 투입했다.
‘어쩔 수 없다.’
남은 병력은 그야말로 최후를 의식해 남겨놓은 예비대였다. 웬만해선 아껴두고 싶지만 상황은 그리 여의치 않았다.
예비대는 서둘러 시비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편, 노가이 칸국으로 쳐들어간 카크 나자르는 자신의 위엄을 잔뜩 과시하는 중이었다.
“하하하! 수고했다!”
노가이 칸국에 세워진 신국의 요새. 나무로 지어졌으나 기병 정도는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상당히 큰 요새 안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막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부대는 엄청난 수의 포로를 잡아왔다. 끌고 온 말을 비롯한 전리품도 상당했다.
요새 한쪽에 있던 전쟁상인들이 얼른 나와 셈을 하며 가격을 치렀다. 전표는 한쪽에 있는 은행 직원에게 주면 입금이 완료된다. 현금을 원할 경우에는 바로 현금으로 환전해 줄 정도로 요새에는 돈이 흘러넘쳤다.
카크 나자르는 전리품을 팔고 얻은 돈을 조금만 챙기고 부하들에게 뿌렸다. 이것은 당연한 분배였다.
돈이 생긴 부하들은 여자를 품기 위해 움직이기도 하고 상인들이 파는 술을 마시러 움직이기도 했다.
요새에는 럼주가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여기 저기 럼주병을 들고 나팔을 부는 이들이 속출했다.
카크 나자르도 돈을 챙긴 뒤 럼주를 한 병 사서 들이켰다.
“크아! 좋군!”
“정말 좋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요새는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요번에 막내 사위가 용맹을 보였으니 그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요새는 각 지역마다 하나씩 세워졌다. 그러면 카크 나자르의 군대가 주변을 돌면서 걸리는 부족을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요새는 그 지역의 영주가 될 이에게 넘겨지는 것이었다.
노가이 칸국으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영지를 나눠갖게 되는 것이었다. 척계광과 척계광의 원정대는 이에 아무런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다. 카크 나자르가 전리품을 팔면 그 액수만큼 척계광에게 입금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척계광은 이를 또 나눠서 배당으로 나눠주었다.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 공병에게도 차곡차곡 돈이 쌓이니 불평은 없었다. 척계광은 영지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직 영광의 주인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또한 세상은 넓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었다.
“신국은 정말 대단해. 돈이 계속 쏟아져 나오다니. 그야말로 황금의 나라 같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주님의 땅에 들어선 상인들이 파는 물건은 굉장히 인기가 좋습니다.”
“우리도 잘 살아보자.”
카크 나자르의 말에 부하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앓던 이 같던 노가이 칸국을 아주 찍어 누르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카자흐 남쪽의 상황은 노가이 칸국과 비슷했다. 샤 칸은 무하마드 칸에게 쫓겨 지리멸렬하는 중이었다.
모굴리스탄은 부하라 칸국으로 쳐들어가 신나게 약탈하며 전리품을 챙겼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변의 다른 칸국에도 알려졌다. 그리고 이들은 공포에 떨었다.
‘저들이 우리를 노린다면?’
그냥 도망치면 땅을 내주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유목 민족이라도 영역은 필요했다. 영역이 없어지면 사냥할 땅이 없어진다. 그때부턴 남의 영역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
계속 도망쳐봐야 결국에는 강국과 마주하게 될 뿐이었다.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할까?’
하지만 도움을 요청했다가 도움이 늦으면 끝이었다. 제대로 저항해보기도 전에 박살나는 수가 있었다.
이에 남은 칸국들 중, 오스만 제국과 먼 곳에 있는 이들은 신국에 복속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항복하면 받아주는 것은 과거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신국이 무너지면 그때 다시 권력을 되찾으면 된다.
이것이 복속을 신청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적어도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신국 밑에서 다시 힘을 키울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한양.
신유성은 미뤄왔던 일을 하나 하기로 했다.
“북쪽에 내 땅이라고 비석이라도 세워야겠다.”
“하시려고요?”
“그래, 탐험대와 용병 적당히 섞어서.”
비싼 원정대를 꾸릴 필요까지도 없었다. 북쪽을 탐색하며 비석을 세우고 행여나 세력을 만나면 설득하거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영역 안에 있는 이들 중에 힘이 없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흡수당하게 되어 있었다.
나이든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젊은이들은 더 뛰어난 문화생활에 이끌리기 마련이었다. 젊을수록 호기심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번 관계가 형성되면 그 다음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적대적으로만 나오지 않으면 얼마든지 살게 내버려둘 생각이 있는 신유성이었다.
아이누가 변한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이번에는 한반도에서 사람을 보내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좀 보라고 그래.”
“알겠습니다.”
이지번도 반대하지만은 않았다.
“그럼 또 할 말은?”
“후궁을 더 들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직 필요 없다.”
신유성은 딱 잘라 말했다. 이지번은 걱정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신유성을 보았다.
‘또 기행을 벌이시려는 것일까?’
불안했다.
이번에도 신유성의 여자들이 몽땅 임신했다. 씨 없는 남자가 아니란 것이 확인되어서 이지번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임신을 시키니 그야말로 나라의 경사였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지금이 최고의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행여나 대가 끊길까 싶어 이지번은 노심초사했다. 최근 들어 가장 관심 가는 것은 신유성이 되도록 많은 자식을 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챙기는 문제는 이지함과 이산해가 알아서 하고 있었다.
중원의 총영주인 이이도 있었고 일본의 총영주로 있는 조식의 제자, 정인홍도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아울러 최근에는 권철과 류중영을 비롯한 집현전에 노비로 있던 양반들도 대거 합류했다. 이제는 인재가 모자라 일을 못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지번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최대한 많이 신유성에게 접근해 설득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딱히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유성의 형인 신주성이 그린 수많은 춘화를 슬쩍 보여주며 혹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엉덩이와 가슴이 크고 허리가 잘록한 여자들을 골랐다.
여자와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자에 관심이 있는 것과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지번은 신유성의 생각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대체 어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사실 깊은 뜻 따윈 없었다.
그냥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한다.
권력자가 되어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리는 중이었다.
신유성은 공조로 향했다. 그러자 공조의 관리들이 절을 하며 맞이했다. 장인에서 관리가 된 이들이 상당히 많았고 이들에게 신유성은 그야말로 신과 같았다.
절하는 자세에서 신을 영접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일어나라.”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공손히 일어나는 관리들.
“오늘은 무엇을 만들었는가?”
부인들이 임신하니 신유성은 다시 공조에 들락거렸다. 의술에 조예가 있어 의조에 들려도 되지만 의조보다는 공조에 더 들락거렸다. 이쪽이 좀 더 즐겁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철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보시죠.”
“새로운 철?”
새롭게 만들어진 철로 만들어진 검은 기존의 검보다 더욱 단단했다.
“이거 괜찮군.”
신유성은 철을 만든 자료를 살펴보았다. 불순물을 더 많이 걸러내고 만든 철은 좀 더 뛰어났다.
“특허로 바로 올리도록.”
다른 상은 필요 없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철이 생산되어 판매되면 일정 금액이 특허 소유자에게 돌아가게 되어있었다. 공조에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혜택을 베푼 것 자체가 바로 성은이었다. 그러니 장인들은 신유성에게 뭔가 더 바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장인들의 권리를 지켜주기만 하면 그게 바로 최고의 은혜이며 구원이었다.
신유성은 공조를 둘러보다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개인 작업실이라 해도 신유성이 직접 물건을 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장인들이 신유성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작업실에 들어간 신유성은 다시 장인들을 움직여 물건을 만들게 했다.
이번에 만든 것은 간단했다.
원심분리기였다.
그렇게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단지 우유를 넣고 돌리기 위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기계를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버터를 대량으로 얻기 위해서였다.
부품은 이미 다 모였다. 조립과 실험이 남았을 뿐.
부품 중 일부는 유리로, 일부는 사기로 만들어져있었다. 안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기위해 유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조립한 원심분리기에 우유를 넣고 돌렸다. 원심분리기는 정말 사람이 돌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맹렬한 속도로 돌았다.
“오오오오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리가 시작 되었다.
작업을 모두 끝내자 버터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을 본 공조의 장인들은 눈을 반짝였다.
“빵을 가져오라.”
신유성은 금방 구운 빵에다 버터를 살짝 발라먹어보고 싶어졌다. 미래의 기억 속, 미국에서는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허나, 이 시대에서는 정말 버터 구하기도 힘들었다. 좀 더 대량의 버터가 구하고 싶어서 원심분리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금방 만들어진 버터는 매우 부드러웠다. 그래서 이를 떠서 반을 가른 빵에다 바르고 먹으려는 찰나였다.
“폐하아아아아아!”
한 궁녀가 우렁찬 외침과 함께 달려와 팔을 잡았다.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궁녀는 빵을 빼앗아 반으로 뚝 자르더니 먼저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어? 어?”
“맛있느냐?”
끄덕끄덕.
그제야 신유성은 남은 반을 입에 넣었다.
“고맙구나. 언제나.”
졸지에 궁녀와 빵을 반씩 나눠먹었다. 사실 가장 많이 밥을 같이 먹는 존재라면 바로 이 궁녀였다.
신유성이 뭘 먹을 때마다 같이 먹어야만 했다. 물론 독을 탔다면 먼저 죽는 것은 궁녀다. 그러니 신유성은 궁녀의 행동에도 모질게 대할 순 없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여자니까.
“더 먹고 싶으면 더 먹어도 된다. 나눠먹도록 하라. 그리고 이 기계의 용도를 알았으면 얼른 가서 공장이나 하나 만들어라.”
그리 큰 공장을 만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버터를 만드는 사람이 이제 고생을 좀 덜하게 된다는 것뿐.
허나, 편리한 원심분리기의 개발에 증기기관에 대한 연구는 더욱 불이 붙었다.
더 뛰어나고 강한 증기기관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했다. 가끔 그것을 상상하는 장인들의 장인혼은 불타올랐다.
버터를 바른 빵을 먹으니 미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강해졌다.
‘매일 아침마다 버터로 구운 빵도 먹고 아니, 버터를 넣어서 만든 부드러운 빵을 더 많이 만들어 먹을 수 있겠네.’
이것저것 만들 수 있는 것은 많았다. 그러면서 신유성은 그리움에 가슴이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쉽게 생각하던 드라이브는 즐기기도 힘들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승마와 차를 타고 달리는 드라이브는 승차감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다음에는 뭘 만들어볼까?’
그리움이 치솟을 때 신유성은 다시 움직였다. 그리움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감상에 젖어있으면 더 고통스러울 뿐.
“빵을 만들겠다!”
이번에는 주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량으로 버터를 만들고는 반죽을 만들었다. 버터가 들어간 밀가루 반죽을 굽자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냥 밀가루로 만든 빵을 만들 때와는 살짝 다른 느낌.
빵이 다구워지자 프라이팬에 버터와 다진 마늘 소금을 넣고는 달구었다. 그리고는 빵을 썰어 투척. 빵은 금방 바삭하게 익기 시작했다.
“음, 마늘빵.”
대충 만든 마늘빵. 마늘의 향과 짭짤함 그리고 빵의 바삭함이 돋보였다. 신유성은 입에 넣으려했다. 그러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녀가 또 막았다.
신유성은 기다렸다가 남은 빵을 먹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