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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코사크가 공격해야 하는 장소는 정해졌다. 바로 이정이 있는 요새였다. 이정은 명령을 받고는 대비에 들어갔다.
“오늘 적이 쳐들어 올 것이다. 준비해라.”
“그걸 어떻게 압니까?”
“척 장군의 명령이다. 준비해라.”
이정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자리에 있는 척계광이었다. 원정군 총사령관이 내린 명령이니 들어야 했다. 그게 아무리 헛소리라고 해도 명령에 불복정한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뒤따르니까.
병사들은 서둘러 준비에 들어갔다. 포병들은 대포 점검에 들어갔고 기병들은 말을 준비하는 대신 사격을 위해 총을 점검했다. 이번 임무는 수비이기에 말을 타고 나갈 일이 없었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고 난 뒤, 이정은 기다렸다.
‘정말 오는 것일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정말 코사크가 꾸물거리며 조금씩 전진하는 게 보였으니까.
한편, 알렉산드로는 가족들을 맞이한 뒤에 바로 출격을 준비했다.
“총공격을 한다! 남고 싶은 자는 남아도 좋다!”
소문은 이미 군에도 퍼져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얼마 안 가서 실각하게 될 거라고 믿는 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거다.’
가족들까지 불러들인 게 무척이나 수상했으나 일을 벌이긴 어려웠다. 어찌 되었거나 알렉산드로는 아직까지는 장군이었다. 신뢰 받지 못하긴 했지만 여전히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명령을 내리면 따를 자들도 많았다. 그러니 괜히 분란에 앞장서는 도박을 할 이들은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알렉산드로의 가족들은 얼마 뒤에 진지에서 사라졌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이들은 알렉산드로에 대한 의심이 깊어졌다.
‘어쩌면 전향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이들이 알렉산드로를 쫓으려 했다.
알렉산드로는 가족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깊숙한 곳에 들어왔을 때였다.
일단의 병력이 갑자기 나타나 포위했다.
“싸우지 마라! 싸우지 마라!”
알렉산드로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척계광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항복의사를 철저히 했고 지금까지 모든 것을 착실히 이행한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전향을 시도하다 죽겠다.’
명예라도 지킬 수 있었다면 이렇게 전향을 시도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반 4세의 비난은 지나쳤고 알렉산드로는 이반 4세에게 목숨을 바쳐도 남겨질 명예가 없었다.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처형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반 4세는 알렉산드로의 인기를 없애려고 악소문을 많이 퍼트렸고 결국 차르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돈다는 것을 안 알렉산드로는 이반 4세를 믿을 수 없어졌다.
그래서 은밀히 전향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전장의 혼돈을 이용해서.
뒤늦게 알렉산드로를 쫓는 병력이 나섰으나 결국 쿠춤의 군대에 의해 박살이 났다. 쿠춤은 알렉산드로와 그의 가족들은 물론 뒤따르던 병력까지 몽땅 사로잡아 돌아왔다.
“큰 공을 세워주셨소.”
“하하!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쿠춤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 작전으로 얻게 될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드디어 카잔을!’
우랄 산맥 너머로 영역을 확대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일단 쉬도록 하시죠. 저는 할 일이 있어서.”
“그러십시오.”
척계광은 서둘러 알렉산드로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알렉산드로는 수척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신국에 몸을 던진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항복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척계광이 모스크바 차르국에 대해 공부한 만큼 알렉산드로도 신국에 대해 공부했다. 첩자를 보내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오직 이 하나만 보고 모험을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척계광이 일단 알렉산드로의 전향을 받아준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말뿐이라 꼭 지켜진다고 볼 순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르의 의지를 어느 정도 파악한 이상 죽음을 피해 움직일 뿐이었다.
‘적어도 약속을 지킬 것이다.’
어길 생각이었다면 포로로 잡지 않고 그냥 죽이면 될 일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척계광은 알렉산드로를 정중하게 대했다. 포로가 아닌 전향한 고위급 인사로서 예우를 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 알렉산드로는 일단 안심했다.
“반갑습니다.”
“우리말을 잘 하시는군요.”
“인사만 조금 할 뿐입니다.”
이어지는 대화에는 통역이 두 명이나 동원되었다.
척계광의 말을 카자흐 지역의 말로 통역할 사람과 카자흐 지역의 말을 러시아어로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대화는 오래 걸리고 불편했지만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통역들은 놀라운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어디 가서 떠벌리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온통 떠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술을 얻어먹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일부 작전은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았으니 군사적인 일을 맡길 순 없겠습니다.”
“어느 부분을 말하시는 겁니까?”
“코사크가 요새를 기습하는 시늉만 하다 돌아갔습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죠.”
알렉산드로는 화가 치밀었다. 코사크 때문에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를 아직은 완전히 신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이해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향 의지를 증명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죠.”
이어서 알렉산드로는 많은 군사 기밀을 털어놓았다. 이를 받아 적는 이들은 정말 깜짝 놀랄정보들이 가득했다.
‘만약 이게 다 사실이라면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모스크바 차르국의 군대 위치를 전부 다 알게 되었다. 요새의 현황도 대부분 파악되었다. 알렉산드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얻게 되는 정보로 모스크바 차르국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이 확인된다면 영주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단, 정보의 정확성에 따라 영지의 크기가 달라질 겁니다.”
척계광은 알렉산드로에게 영주의 자리를 약속했다. 원정에서는 척계광이 신유성을 대리하기 때문에 이 정도 포상은 문제없었다.
“알겠습니다.”
알렉산드로는 쉬지도 못하고 아들과 함께 정보를 털어놔야만 했다. 전향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전향한 상태에서는 꺼리낄 것이 전혀 없었다.
‘이반!’
정보를 털어놓는 알렉산드로는 이를 악물고는 하나라도 빠트린 것이 있나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을 버린 군주에게 복수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그 놈이?”
소식을 접한 이반 4세는 분노했다. 그래서 슈이스키 가문을 아예 멸절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슈이스키 가문은 이미 사라졌다. 알렉산드로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를 밀고했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반 4세는 잔혹한 군주. 그가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으니 밀고를 하는 것에도 망설였다. 괜히 불똥이 밀고한 사람에게도 튈 수 있었으니까.
결국 알렉산드로의 말을 따라 함께 전향해버렸다. 슈이스키 가문은 모스크바를 완전히 등진 것이었다.
잔혹한 폭군을 두려워 한 자들은 결국 배신한 것이었다. 총애라도 받고 있었다면 모를까 총애도 아니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더더욱 폭군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슈이스키 가문이 집단으로 사라지자 이반 4세는 이를 악물고는 숙청에 들어갔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가문 하나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영향력이 별로 없던 가문이었으나 그래도 가문 하나를 완전히 날린 것은 효과가 있었다. 엉뚱한 마음을 품었던 이들은 몸을 사리게 되었다.
알렉산드로가 신국에서 성공한다면 이반 4세를 버릴 의지는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모든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이반 4세를 버릴 순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이반 4세도 알고 있었다.
‘이 놈들!’
어차피 이반 4세는 신하들을 믿지 않았다. 사랑하던 첫 번째 부인, 아나스타샤의 죽음도 결국 누군가의 음모라고 의심하고 있는 이반 4세였다.
‘난 절대 허수아비가 되지 않는다.’
이반 4세는 각 가문의 남자들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모스크바로 보내게 했다. 지금까지 데리고 있던 볼모도 모자라 더욱 요구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 일로 민감한 시기였기에 각 가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반 4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했다.
예르마크는 난감해졌다. 보급이 완전히 끊긴 것이었다. 우랄 산맥을 넘어왔는데 보급이 끊기니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대로는 못 버팁니다.”
“후퇴다.”
결국 코사크는 후퇴해야만 했다. 하지만 후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급이 끊긴 이유 자체가 알렉산드로의 배신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차르국의 병력 배치를 훤히 꿰뚫어보는 상황에서 병력을 눈치 채지 못하게 움직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땅은 넓었다. 이동하기 편한 길은 한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모든 곳을 지키는 것은 어려웠다. 지휘관이 잠시 부재인 틈을 타 척계광은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명령을 받은 쿠춤은 과감하게 찌르고 들어가 적의 요지를 파괴하며 전진했다. 보급은 적지에서 했다. 그렇게 움직이며 병력이 집결한 곳만 피해서 보급대를 습격했다.
보급이 끊기니 전선의 대군들은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코사크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정의 부대에 습격을 당했다.
맹렬한 추적에 나선 이정의 부대는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히 추적했다.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코사크는 화약이 떨어졌다. 화약이 떨어지는 총은 쓰지 못하는 짐이 되어 결국 버리고 도망쳤다. 몸을 가볍게 하고 이동 속도를 높인 뒤에야 이정의 부대를 뿌리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랄 산맥 안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정은 예르마크를 놓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의 배신으로 모스크바 차르국은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전선에 투입되었던 대군은 결국 포로가 되었다. 집요하게 보급만을 노린 신국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화약도 떨어지고 식량까지 부족해진 대군의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탈영병이 늘어났으며 내부 분열도 일어났다. 전향자도 꾸준히 생겼다.
그렇게 차르국은 패배했다. 어이없는 패배였다.
허나, 차르국이 멸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각지의 보야르들에게 병력을 차출한 이반 4세는 새로이 전선을 짜도록 했다. 이번에는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한 전선이기에 보야르들의 부담은 적었다. 지키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었으니까.
아들들이 이미 차르의 수중에 있으니 안 들어줄 순 없는 일이었다.
결국 척계광의 전진은 멈추었다. 알렉산드로가 알려준 군의 정보가 이제는 다 바뀌어 더 쓰기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영지를 드리지요.”
알렉산드로는 원래 주둔했던 지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굉장한 크기의 땅으로 앞으로 중요한 거점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영지로 받은 땅은 옛 슈이스키 가문이 가진 땅을 훨씬 상회했다.
“감사합니다.”
배신자라고 하지만 홀대할 이유는 없었다. 척계광은 신국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세력들은 신국에 복속을 신청할 정도였다. 그러니 배신자를 따뜻하게 대접해주면 더 많은 배신자들이 신국으로 전향하게 되어있었다.
‘이간책으로는 딱 좋지.’
신유성은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았다. 그것을 과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폭군인 이반 4세보다 신유성에게 충성하려고 줄을 대려는 자들이 생길 수 있었다.
‘첩자를 좀 더 키울 수도 있겠어.’
무엇보다 이번에 사로잡은 포로들이 상당히 많았다. 전향자들도 있었다. 북해도에서 온 요원들은 이미 전선에서 잡은 포로들의 분류를 요청했다.
적대적인 자와 아무 생각 없는 자.
가족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일일이 한 명씩 면접을 하면서 격리해놓고 사람들을 살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신유성에게 충성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충성하는 이들 중에서 뛰어난 이들을 훈련시켜 첩자로 쓸 생각인 것이었다. 원래라면 북해도에서 직접 요원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다르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심했다. 그러니 현지인을 어떻게 해서든 요원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고맙다. 알렉산드로.’
알렉산드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모스크바 차르국을 물리칠 순 없었다. 덕분에 척계광은 빠르게 큰 업적을 이뤄냈다.
‘추가 파병은 더 늦게 해주셔도 됩니다. 폐하.’
아직은 자신만의 힘으로 원정을 끝내고 싶은 척계광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거의 지날 무렵의 일이었다.
모스크바 차르국을 물리친 것으로도 모자라 노가이 칸국도 결국 멸망했다. 카크 나자르와 그의 부하들은 거침없이 진격해 모두 정리해버렸다. 패배한 이들 일부가 또 다시 서쪽으로 도망치긴 했다. 이들을 잡고자 했으나 더 이상 멀리 가도 된다는 척계광의 명령이 없기에 노가이 칸국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모굴리스탄은 부하라 칸국을 꿀꺽했고 무하마드 칸은 자신의 형인 샤 칸을 사로잡았다. 이후 인근의 칸국들은 서둘러 신국에 복속해 원정대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허나,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북으로는 모스크바 차르국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를 건너면 오스만 제국이, 남쪽으로는 무굴 제국이 포진한 상태였다.
척계광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원정군을 더욱 모집하며 수비를 강화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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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