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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전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새벽에 나가 고기를 잡아온 어부는 기분이 좋았다. 만선이었으니까.
잡아온 생선들을 팔고 남은 것들은 구워졌다. 싱싱한 생선들이 익어가며 풍기는 냄새에 침이 고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금방 구운 생선을 뜯노라니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자신의 것 같았다. 만족스러웠다.
“응?”
허나,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정도면 상당히 큰 것일 텐데.’
바다 밑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정체불명의 존재들. 어부는 직감적으로 ‘배’를 떠올렸다.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이 타는 배가 나타날 때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온 건가?’
소문은 들었다. 남쪽에 만들어진 요새가 무너졌다는 것을. 이 문제로 요즘 부족의 족장과 전사들이 뜨겁게 설전을 벌이는 중이기도 했다.
어부는 달렸다.
선단의 정체는 바로 해군과 사략 해적이었다. 빠른 승리를 위해 해군과 해적이 공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어촌 앞에서 정박한 군함들이 불을 뿜었다. 포격이었다. 목표는 해변가. 적을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모래사장은 물론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집들과 그 뒤에 있는 나무들까지 모두 포격의 대상이 되었다.
안전한 상륙을 위해서 해변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상륙 개시!”
사략 해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이순신은 작은 배에 올라타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이순신을 따라 배에 탄 싱할라족의 젊은 전사들이었다.
배가 뭍에 닿았지만 모두 경계를 할뿐 안으로 치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병력이 모이기 전에 따로 행동하는 것은 각개격파 당하는 지름길.
신국의 병력은 빠르게 상륙한 뒤 전열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에 합류한 이순신은 임거정을 찾았다.
“지휘를 부탁합니다.”
아직은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이 없는 이순신은 임거정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로 했다.
임거정은 능숙했다. 신유성에게 붙잡힌 뒤, 큐슈 정벌에서 백의종군하며 습득한 통솔 능력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진형을 짜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적과 조우했다.
“1열 방패벽! 2열 쇠뇌!”
명령이 들리자 용병들은 명령대로 움직였다. 생각 없는 기계처럼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커헉!”
견제하는 용병들 뒤에서 쇠뇌를 쏜 용병은 다시 재장전에 들어갔다. 그 동안 1열의 병력은 방패로 벽을 만들고 버틸 뿐이었다. 상대를 죽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1열의 임무는 오직 벽을 쌓아 공격을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타밀족 병사들에게는 방패벽을 뚫을 능력이 없었다. 사람이 여럿 달려들어서 부딪혀도 밀리지 않는 방패벽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을 무릎 쓰고 다수가 벽에 몸을 밀착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방패벽을 뚫기 어렵지만 여럿이 힘을 합하면 한 곳을 무너트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작전이기도 했다. 맨 앞에 서게 되는 이들은 공격에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방패 틈새로 검이 나오면 그냥 찔릴 수밖에 없는 위험에 노출된다.
화살을 쏴도 방패를 뚫는 것은 어려웠다.
대포라도 있었으면 쉽게 깨버릴 수 있겠으나 현재 공격당하는 타밀족에게는 대포가 없었다.
“열고 쏴!”
적의 무장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국은 방패벽을 이용한 전술을 이용했다.
이순신은 진형의 가운데에 서서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았다.
‘적에게 화약 무기가 있으면 쓰지 못할 전술.’
신국이라면? 척탄병 혼자서 방패진을 무력화 시킬 수도 있었다. 폭탄 하나만 안쪽으로 쑤셔 넣어도 그대로 와해된다.
전장을 살피며 이순신은 빠르게 전투의 모든 것을 흡수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현장의 경험이 어우러지며 한 명의 지휘관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타밀족은 아군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자 결국 퇴각했다. 이들의 뒤를 쫓은 것은 싱할라족 전사들이었다.
전의를 잃은 타밀족은 싱할라족 전사들에게는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 정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그늘 아래 앉아 전투 현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시체가 피를 흘리며 드러누워 있었다. 전투의 광기를 내뿜던 이들의 몸은 차갑게 식었다. 시체들 사이로 전리품을 수거하기 위해 움직이는 용병들도 있었다.
쓸 만한 것은 모두 벗겨졌다.
알 수 없는 착잡함이 이순신의 가슴을 적셨다.
‘이럴 때가 아니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님을 떠올린 이순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전투는 끝났지만 지휘관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리품을 정리하고 용병들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아울러 해군과의 작전회의에도 참가해야만 했다.
‘우선 회의부터.’
회의는 간단했다. 섬 사정에 대해서는 싱할라족이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는 방향으로 전투를 수행할 뿐이었다.
목표가 지정되면 가서 타격한다.
아주 간단했다. 물론 과정이나 그 외에 것들이 전부 간단한 것은 아니다.
적을 찾아내고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에 대처해야만 하니까.
“하루 쉬고 다시 이동한다.”
작전은 타밀족을 해안에서 완전히 떨어트려 놓는 것이었다. 반면 싱할라족은 육지에서 혼란에 빠진 적들을 하나씩 처리한다는 작전이었다.
해군의 입장에서는 섬 깊숙이 들어가서 수행하는 작전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이순신은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한 잔 하지?”
“네.”
목을 타고 넘어간 술에 열기가 확 치밀었다.
“오늘은 푹 쉬게나.”
임거정이 자리를 뜬 뒤 홀로 남게 된 이순신은 눈을 감았다. 몽롱한 느낌에 긴장이 살짝 풀렸다. 그리고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허억!”
깜빡 잠이 들었던 이순신은 금방 일어났다. 주변을 확인해보니 아무도 없었다.
‘꿈이었구나.’
전투를 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적의 칼에 배를 찔린 꿈이었다. 너무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일에 몰두하라고 했었지.’
죄책감, 전투에 대한 공포 등 감정이 폭주할 수 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강렬한 기억 때문에 괴로울 수 있으니 문제가 심해질 것 같으면 바로 보고를 하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휘관 본인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정신 상태도 살펴야만 했다.
병력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선 필수였다.
자칫 잘못하면 문제 병사가 부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병사들은 제대로 싸우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혹은 엉망진창으로 싸우다가 죽는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포에 계속 노출되다가 어느 순간 사람이 완전히 변하기도 하니까.
이순신은 배운 내용을 떠올린 뒤, 나뭇조각을 하나 들고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비우고 오직 하나만 생각하며 조각을 했다. 딱히 무엇을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안 주무십니까?”
용병 하나가 불침번을 끝내고 지나가다가 물었다.
“오늘은 좀.”
“그럼 먼저 쉬겠습니다.”
용병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이순신의 손은 계속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은 작은 배였다.
휴식이 끝난 뒤, 신국 해군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호주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말라카에 있기에 탐험대의 보고는 더욱 빠르게 신유성에게 전해졌다. 긴 항해 끝에 호주를 확인하기 위해 돌던 탐험대가 드디어 보고를 올렸다.
‘젠장.’
즐거운 소식이긴 하지만 순수하게 즐길 순 없는 상황이었다.
호주와 아메리카에 투입할 전력으로 무굴제국과 따웅우 왕국의 잔존세력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유타야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정말 큰 섬이군요.”
“대륙이라고 해도 될 크기지.”
“그렇습니다.”
보고를 함께 받은 이들은 저마다 감탄했다. 엄청난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엉덩이가 들썩였다. 허나, 전력을 뒤로 빼서 개척을 할 순 없었다.
신유성의 친정에 따라 나선 이상 무굴제국과의 전쟁이 우선이었다.
“전쟁 상황은?”
“큰 변화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신국의 병사들은 잘 버텨주고 있었다. 월등한 무기와 보급을 가지고도 휩쓸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무장이 빈약한 것도 아니었고 무굴제국의 병사들이 약졸인 것도 아니었다.
신국의, 신유성의 능력이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유성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다행이라면 무굴제국의 전력도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인도 남부는 아직 무굴제국의 손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한 번만 제대로 패배시키면 된다. 약해졌다는 사실이 퍼지기만 한다면 놈들의 적이 더 늘어난다.’
인도 남부의 사람들과 따로 손을 잡고 작전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손을 내밀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요구할 테니까.
끌려가는 것이 싫은 신유성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융합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반기를 들 기회가 생긴다면 오히려 악바르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하려고 할 터.
‘한 번만 제대로 뭉개주면 돼.’
신유성은 되도록 많은 폭탄을 만들게 했다. 1년간 쓸 화약을 단 한 번의 전투에 모두 사용할 생각이었다.
또한 쓸 만 한 패는 더 있었다.
‘오이라트! 그리고 티베트!’
이 두 세력은 무굴제국과 제법 가까웠다. 문제는 이들과 연락이 쉽지 않다는 것. 한 번 명령을 내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굴 제국이 중간이 끼어 있기 때문에 전령을 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금 멀리 돌아서 명령이 가게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동남아시아 지역은 아직 제대로 역참이 들어서 있지 않기 때문에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할까? 말까?’
신유성은 고민에 빠졌다.
후지바야시 켄은 특명을 받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굴제국을 털라는 것이었다. 단, 털면서 인도 남부의 세력들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
이 때문에 사략 해적들에게 공문을 보내야만 했다.
만약 지시를 어긴 사실이 드러나면 반역죄로 다스린다는 경고를 곁들여서 보냈다.
“지금부터 전 함대는 적의 해안을 공략한다. 바다로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바다로 나오면 귀찮아진다. 후방으로 적이 침투하기라도 하면 혼란스러워진다. 보급이 털리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폐하 앞에서 실수하는 짓은 용납하지 않겠다.”
켄이 검을 뽑아들자 함대의 선장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때에도 엄격했지만 지금은 살기까지 내뿜고 있었다.
‘죽는다! 실수하면 죽는다!’
그야말로 사신 같은 기세였다.
한편, 전방에서 라지푸트족과 싸우게 된 나가오 가케토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놈들을 보았나?”
광전사처럼 싸우는 자들이 기어코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내가 바로 비사문천의 환생이다!”
지휘를 해야할 지휘관이었지만 가케토라는 전장에 뛰어들었다. 앞을 가로막는 적을 마구 베었다.
“크헉!”
눈 깜빡 하는 사이에 휘둘러지는 검에 적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쓰러지는 적을 발로 걷어차자 뒤쪽에서 앞으로 나오려던 라지푸트족의 전사가 멈췄다. 그 사이 또 검이 휘둘러지고 무기를 잡은 손이 땅에 떨어졌다.
피가 튀었다.
가케토라는 피를 뒤집어 쓴 상태에서 계속해서 전진했다. 가케토라의 부하들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라지푸트족의 전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는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놈을 죽여라!”
가케토라도 잘 싸웠지만 라지푸트족의 전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점점 전진이 힘들어지더니 어느 순간 가케토라의 걸음은 멈추게 되었다.
‘이놈들이 감히!’
가케토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앞길이 막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나는 비사문천의 환생이다!’
비사문천은 일본에서는 전쟁의 신이었다.
전쟁의 신이 전진을 못하고 멈춘다는 것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이노오오오오옴!”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들에 대한 분노가 가케토라를 움직였다. 자신을 광신하는 광신도의 전투는 더욱 살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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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자고 나서 쓰겠습니다.
되돌리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아무래도 한 동안 이런 상태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