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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169화 (16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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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전

전투의 승리는 이미 정해진 것. 허나, 생존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싸움 가능한 전사들이 대부분 죽자 타밀족은 항복했다.

아직 타밀족은 많이 남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더 이상 싸운다면 죽음 밖에 없었다.

싱할라족은 더 죽이지 않았다. 신국군도 더 이상 죽이지 않았다.

시체가 즐비한 땅에서 흐느낌이 이어졌다. 제대로 장례도 치러줄 수 없는 살아남은 타밀족이 겨우 해줄 수 있는 추모였다.

‘끝났다.’

이순신은 등을 돌렸다. 승리했으나 순수하게 기뻐하기는 힘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피가 흘렀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자신이 죽였던 이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시체의 눈은 공허했다. 절망과 살의와 광기는 어느 덧 사라졌다.

기억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순신은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감상에 젖는 순간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로잡힌 이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싱할라족은 필요 없다며 모두 신국에 팔아넘겼다. 싱할라족이 원한 것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도구들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바로 식칼이었다.

스테인리스강 식칼은 녹슬지 않고 단단했다. 사용하기도 무척이나 편했다. 싱할라족 가정에서는 신국 식칼이 없으면 가난한 집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가정을 돌보는 여인들은 모두 신국 식칼을 갖길 원했다.

반면 남자들은 신국 강철로 만든 무기들을 원했다.

“무기하면 역시 신국이 최고 같습니다.”

“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만들어낸 건지.”

신국의 강철로 만든 무기는 더 단단했다. 그래서 전투에서 상대의 무기를 깨버리기도 했다. 그저 경이로운 일일뿐이었다.

“그런데 무기만 달라고 하긴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텐데.”

“너무 조급해 할 것 없다. 신국의 은행을 이용하면 되니까.”

실론섬은 타밀족이 쓰러진 뒤 결국 싱할라족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신국과 손을 잡았던 부족의 족장은 대족장에 이어 결국 왕이 되었다.

싱할라의 왕에게 신국에서는 은행 구좌를 터주었다. 적혀있는 액수만큼 언제든 거래 할 수 있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사이가 틀어지면 나중에 돈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은행 구좌에 들어있는 돈은 오직 왕이 꺼내 쓸 수 있었다.

이것이 싱할라 왕이 구좌를 만들어 노예를 판 대금을 넣은 이유였다. 눈치 빠른 자들은 왕이 왜 그랬는지 다 알아차렸다. 그러나 대들지 않았다. 이제는 왕이었으니까. 잘못하면 죽으니까.

‘날 죽이면 돈이 다 날아가지. 이거 진짜 좋네.’

유언장을 미리 은해에 맡겨놓으면 죽은 뒤에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넘겨주는 서비스도 대행해주었다.

싱할라의 왕 입장에서 신국의 은행은 정말 요긴했다. 구좌만 꽉 잡고 있으면 밑의 전사들이 허튼 생각을 할 수 없으니까.

왕을 죽여도 돈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왕의 편에 서는 이들은 돈을 받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신국과 사이좋게 지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싱할라의 왕은 처음 했던 약속대로 신국의 전쟁을 돕기로 했다. 신국에서는 공짜로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돕는다면 보급은 물론 돈도 준다고 했으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던 것이었다.

허나 이때만 해도 싱할라의 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결정이 훗날 실론섬이 통째로 신국에 넘어가게 되는 시작이었음을.......

전투가 끝나고 자유가 주어졌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이끌고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는 전쟁상인들로 바글거렸다. 싱할라와의 동맹으로 항구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실론섬에는 수많은 신국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이기 때문에 보급선과 호위함이 매일 들락거릴 정도였다.

공병들이 뚝딱거리며 나무로 집을 지으면 금방 상인이 차지하고는 장사를 시작했다.

승리 이후 돈이 많이 생긴 싱할라족은 항구에 들려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식칼을 사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주점에서 신국의 요리와 술을 즐기기도 했다. 또한 싸게 파는 면포를 대량으로 사가기도 했다. 신국에서는 공장에서 면포를 찍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면포의 가격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대량으로 생산된 면포는 여기 저기 팔려나갔다. 원래는 신국에서의 수요만 해도 넘치지만 실론섬까지 가지고 온 이유는 바로 싱할라족에게 소비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이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싸게 팔아대니 안사는 게 손해로 여겨져서 필요가 없는데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쨌거나 싱할라족은 신국 상인들을 환영해주었다.

항구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당연히 병사들을 위해 유곽도 만들어졌다.

“자! 실컷 놀아라!”

“우와아아아아! 대장님 최곱니다!”

“약속을 지키는 남자!”

돈을 나눠받은 부하들은 유곽으로 돌진했다.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라고 돈을 넉넉히 쥐어주었다.

“자넨 안 가나?”

이순신이 등을 돌리자 임거정이 웃으며 다가왔다.

“전 됐습니다.”

“밤에 잠은 좀 자나?”

이순신은 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전투 이후 잠에서 깨는 일이 많아졌다. 꿈속에 죽은 자의 얼굴이 나타나면 깨는 것이었다. 귀신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기억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동안 기억을 정리하는 뇌의 영향으로 꿈이란 형태로 의식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도 몰라. 술을 마시고 아예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방법이 자주 쓰이는 데 이것도 완벽하지는 않거든. 한잔 할까?”

“그러죠.”

두 사람은 조용히 주점으로 향했다. 이후 이순신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말라카.

실론섬의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신유성은 고무되었다. 앞으로 싱할라족에게서 지원을 q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물건을 싸게 팔고 아울러 왕의 측근들에게도 돈 좀 찔러주고.”

신유성은 돈이 많았다. 혼자 놀고먹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그렇기에 돈을 많이 썼다. 그래도 별로 티도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뇌물로 찔러주는 것 정도는 신경 쓸 수준도 되지 않았다.

‘적당히 찔러주면 결국 분열하겠지. 그리고 섬의 젊은이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면 뭐.’

신국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게 된다면 불편한 게 없으니 안 된다.

오직 신국 사람만이 가진 특권, 혜택이 있어야 유혹이 가능했다.

“여기 공을 세운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논공행상을 하기 위한 일이라 신유성은 자세히 살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신하들이 알아서 정리하겠지만 지금은 친정을 하는 중이었다. 황제가 논공행상을 직접 하는 편이 군대의 사기에도 더 좋았다.

“어?”

명단을 살피던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이순신. 신유성이 기억하는 영웅의 이름이 보였다.

‘설마?’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원래부터 이순신을 찾으려 했었다면 못 찾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애써 이순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괜히 안 좋은 영향을 미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략 해적이라니.’

너무 안 어울렸다. 하지만 벌써 선장이라는 사실에 역시 이순신이란 생각을 하는 신유성이었다.

“어라?”

이순신 밑에는 임거정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대체 무슨 인연이야?’

신유성은 의아해졌다. 하지만 일부러 찾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난 참을 수 있다.’

포상을 정한 신유성은 침실로 향했다.

왠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깊은 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림자의 주인은 청소부였다. 허나, 어느 순간 그림자는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 청소부는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복수!’

청소부의 뇌리를 점령한 단어였다. 청소부의 정체는 아사신의 후예였다.

아사신의 시작은 핫산 사바흐였다. 핫산이 산성에서 집단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암살을 통해 압바스 왕조를 약화시키려 했다.

이후 아사신들은 암살의 대명사가 되었다. 심지어 아사신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숨기고 다른 종교를 믿는 척하기도 했다.

광신도이자 암살자인 아사신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멸망했다. 몽골에 의해.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흩어졌다. 청소부는 바로 이렇게 흩어진 자들 중 인도로 흘러들어온 이들의 후손이었다.

현재는 이스마일파에 속해 있으며 악바르의 명령을 듣고 있었다.

악바르의 명령이 있어서 암살에 나섰지만 신유성이 몽골 초원을 제패하고 계속 정복을 하고 있단 소리에 과거의 몽골이 떠올랐다.

이것이 청소부가 복수심을 품게 된 이유였다.

아사신의 멸망과 신유성은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마약쟁이 암살자들에게 논리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복종을 교육 받은 이들이었다.

신유성이 원수라고 위에서 말하면 암살자는 그냥 그렇다고 믿는다. 의문은 전혀 없었다.

청소부는 암살을 위해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얇은 천으로 만든 모기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달빛에 의지해 움직이기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암살자 훈련을 통과한 뒤에도 많은 이들을 암살했던 전적이 있는 청소부에게는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가는 청소부, 아사신의 손에는 독이 묻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허나 아사신은 목적을 이룰 순 없었다.

“폐하를 지켜라!”

갑작스러운 외침에 아사신은 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단검이 날아왔다. 어둠 속에서도 물체가 날아오며 내는 소리를 감지한 아사신은 이를 피했다. 그리고는 신유성의 침대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닌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둠과 분간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사신은 시간이 흐르면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다.

‘죽인다!’

명령을 받은 이상 목표를 죽여야만 했다.

그것이 아사신의 존재 이유였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던 신유성은 깨어났다. 이어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이어 피 끓는 소리가 들렸다.

‘뭐?’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기 위해 살피기보다 일단 피했다. 직감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신유성을 지키던 닌자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엄청난 놈이다.’

신유성은 검을 빼들고는 기다렸다. 주변의 닌자 수는 셋. 문을 열고 들어선 친위대 병사 다섯. 일부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침입자를 경계할 뿐이었다. 그때 아사신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닌자와 병사들의 검이 몸을 스쳤다. 분명 칼을 맞았으나 아사신은 멈추지 않고 신유성에게 달려들었다.

“몸으로 막아!”

막 문으로 들어선 병사가 싸우려던 닌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목숨을 버리더라도 잡고 늘어지란 것.

닌자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려 끌어안으려 했다. 허나 아사신의 단검이 더욱 빨랐다.

목을 베고 지나가자 닌자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순간 신유성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어둠 속에서 불똥이 튀었다. 신유성은 순간적으로 계속 검을 휘둘렸다. 처음으로 아사신이 밀리기 시작했다.

‘내가 싸운다.’

원래는 싸워선 안 된다. 황제니까. 하지만 싸우기 시작한 이상 등을 보일 순 없었다.

사납게 겁을 휘두르는 아사신의 단검은 모조리 가로막혔다. 여기에 신유성의 검이 오히려 아사신을 몸을 여기저기 벴다.

‘얕아!’

손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 구분이 가능했다. 핏줄이라도 걸려서 끊어진다면 대량출혈이라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살이 좀 베인 정도로는 금방 죽지 않는다.

더구나 마약을 해서 고통까지 죽여버린 아사신은 움직임에 별 문제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공포에 질릴 법한 상황이었다. 몸이 베여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 사납게 날뛰는 인간을 마주하는 것은 공포였다. 허나 신유성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이들을 직접 벤 경험이 있었다.

“커헉!”

아사신을 끝낸 것은 신유성이 아니었다. 잠시 붙들고 상대해주는 사이 친위대가 달려와 아사신의 뒤를 쳤다. 척추를 끊는 공격에 아사신은 결국 쓰러졌다.

신유성은 순식간에 친위대에 둘러싸여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말라카는 잠들지 못했다.

“어떻게 놈이 잠입했는지 알아내라. 알아내지 못하면 네 놈들의 목을 베겠다.”

경비를 책임지는 친위대 대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냥 다 죽일까?’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말라카의 영주가 배신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말라카의 영주도 무슬림이었고 악바르도 무슬림이었다.

둘이 내통을 했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말라카의 영주는 구속되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진 참아주십시오.”

“알겠네.”

말라카의 영주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

자고 일어났더니 체포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살짝 반항했지만 신유성을 습격한 자가 있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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