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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177화 (17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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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위협

이정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부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포병들은 포병들끼리 어울렸고 새로 온 공병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

혼자 밥을 먹는다고 쓸쓸하거나 할 건 없었다.

식사로 나온 것은 카레였다.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라 최근에는 자주 만들어지고 있었다. 향신료가 비싸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출혈이라 생각되지만 군에서는 병사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에서 고생하는데 먹는 것까지 거지같으면 싸울 맛이 안 날 거라는 지휘관의 신념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사기 관리 차원에서라도 돈이 좀 들어도 맛있는 음식을 줘야만 했다.

덕분에 밥은 참 맛있었다. 단지 아쉬운 거라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있다가 몰래 만두 좀 만들어달라고 할까?’

부하도 없고 할 일도 그리 많지 않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먹는데 신경 쓰게 되었고 취사병들과 가까워졌다.

‘마살라와 고기를 넣어 만든 만두는 어떤 맛일까? 궁금하네.’

머릿속은 온통 먹는 것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앉는 두 사람 때문에 새로운 만두를 상상하는 일을 멈춰야만 했다.

“안녕하십니까? 공병대 소속 권율입니다.”

“같은 소속 유성룡입니다.”

“아, 그런가? 이정이다. 지금 소속은 없다.”

계급장을 보는 순간 하급자라는 것이 보였다.

“소속이 없으시다고요?”

“부대 교체할 때 안 돌아가고 남기로 해서 그렇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식사 속에 잡담이 이어졌다. 이정은 갑자기 끼어든 두 사람을 밀어내거나 하진 않았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얘기 상대가 생기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

“그쪽도 많이 힘들었겠군. 추운 날씨에 공사하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들도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맙군. 그런데 자네들은 언제 돌아가나?”

“저희는 돌아가기 어려울 겁니다. 백의종군하는 중이라.”

“아.......”

백의종군. 이정도 소문은 들어봤다. 조선의 사대부였던 자들 중 이지번 덕분에 노비에서 풀려날 기회를 얻은 사람들 이야기였다.

이들은 일반 병사들과는 조금 다른 대접을 받았다. 신유성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군대를 떠날 수 없는 몸이었다.

“너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은 다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유성룡은 웃으며 어색해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렇지. 다 같은 것이지. 그나저나 이따가 내가 취사병하고 만날 건데 같이 가지 않겠나?”

“취사병과 잘 알고 지내시는 겁니까?”

“그렇지. 내 만두를 대접하지.”

나중에 세 사람은 몰래 취사병을 만나 만두를 얻어먹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는 새롭게 사람을 사귀는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나가오 가케토라는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잠결에 싸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적입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검을 잡았다. 갑옷을 입을 틈은 없었다.

“막아라!”

가케토라의 친위대가 암살자들을 막고 있었다. 무려 10명에 달하는 암살자들의 위세는 무시무시했다.

병사들도 썰려나가는 중이었다. 암살자들의 상태도 그리 좋다고만 할 순 없었으나 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쇠뇌를 써라!”

가케토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혼전 중에 쇠뇌를 쓰라는 것은 아군이 맞아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이 때문에 다른 병사들은 쇠뇌가 있어도 쓰지 못하고 망설이던 중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제대로 지휘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한몫했다.

쇠뇌를 든 병사들은 입술을 깨물곤 방아쇠를 당겼다.

횃불 아래 모습을 드러낸 암살자들의 몸에 화살이 박혔다. 하지만 친위대의 몸에도 박혔다.

“커헉!”

진압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라!”

사태는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몇몇 병사들은 가케토라의 결정에 두렵다는 듯 몸을 떨었다.

“저 분 밑에 있으면 목숨이 내 것 같지 않아.”

“방금 명령 때문에 그런 거냐?”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가케토라님의 결정이 옳았지. 생각해봐라. 그 상황에서 암살자들만 공격하겠다고 시간 끌었다가는 더 많이 다쳤을 거다.”

암살자들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부상을 입어도 아랑곳 않고 독하게 싸우던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

“그런가? 그래도.......”

옳은 결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부하들의 목숨을 위한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네 마음은 아는데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함부로 떠벌리지 마라. 큰일난다.”

병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도 가케토라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암습을 당한 것은 가케토라만이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가케토라와 다른 점이라면 이에야스의 부대에는 피해가 전무했다는 점이었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핫토리 한조가 이끄는 친위대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암살자가 나타날 것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놈들에 대해 알아낸 게 좀 있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폐하를 습격했던 자와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

“마치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상처를 입어도 보통 사람과는 반응이 달랐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에야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렇지 않아도 분노를 풀 곳이 없어 답답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신유성을 습격했던 암살자와 같은 부류가 나타났다.

“놈들이 한 단체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이에야스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철저하게 조사해서 찾아내라. 놈들의 소굴을 찾아내면 영주가 되도록 해주겠다.”

영주로 밀어준다는 소리에 이에야스의 부하들은 전부 눈을 빛냈다.

신페이의 상황도 이에야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후지바야시 켄의 경우에는 난감한 결과가 나왔다.

“피해는?”

“함장들의 사망만 20명입니다.”

“크군.”

후지바야시 켄의 경우에는 직접 암습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휘하 함대의 함장들이 습격 받았다.

함장 20명이 죽었다. 뼈아픈 손실이었다. 함장들 외에 사망자들까지 합하면 숫자는 훨씬 더 많이 늘어났다.

20척의 함선이 뭄바이에 그대로 발이 묶였다고 봐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 놈들이 온다면 피해가 커진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함대의 사기였다.

무시무시한 암살자들의 등장에 함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어렵습니다.”

“힘들겠지만 앞으로 함장들은 모두 배에서 지내도록 한다. 그리고 부두의 경계를 강화하라.”

일단 급한 대로 조치를 취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선장을 잃은 배들의 활용 문제가 도마위에 올랐다.

“임시지만 함장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이순신에게 뜻밖의 명령이 떨어졌다. 사략 해적으로 배를 타는 것이 아니라 군선을 움직이는 함장직을 맡으라는 것.

권유도 아니고 명령이었다.

“그러면 제 부하들과 배는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선장을 뽑아야 할 겁니다. 물론 해군에서 지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함장이 필요합니다.”

“저도 선장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잠시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순신은 최대한 거절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거절할만한 명분이 없었다. 해군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이순신 본인이 강력하게 거절한다면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해군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적당한 명분을 찾으려 했는데 명분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해병도 아니고 함장이었다. 아무리 임시라지만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략 해적의 선장으로 있을 때에는 적당히 실수를 하더라도 무마가 가능했다. 모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군함의 함장은 무게감이 달랐다.

실수한다면 부하들을 통솔하기가 어려웠다.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간 것이 아닌 낙하산이란 것도 문제였다.

“해군에 사람이 없는 겁니까? 저 말고도 능력 있는 분들이 계실 텐데.”

“자격 있는 사람이 모자랍니다. 이번 습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많습니다.”

“으음.”

결국 이순신은 임시 함장이 되기로 했다. 해군의 어려운 상황을 그냥 못 본 척 넘어갈 순 없었다.

“오늘부터 내가 이 배의 함장이다.”

이순신과 대면한 군함의 해병들은 새로운 함장을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사략 해적의 선장을 임시로 불러왔다는 사실은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신뢰가 가질 않았다. 계급도 애매했다. 이순신은 공식적으로 계급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해병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순신이라고 좋아서 해군의 함장이 된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저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온 명령일 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해군 총사령관인 켄이 명령을 통해 숙지 시켰기 때문에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 마음에 들지 않고 불안해도 이순신을 무시할 순 없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이제 함장은 이순신이었다.

“저는 항해사 보조로 있었습니다.”

“갑판장 보조였습니다.”

이순신이 맡은 배는 그래도 항해사와 갑판장의 보조들이 살아 있었다.

‘다행이군.’

다른 배에는 보조들도 죽었다고 들었다. 아사신들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마음에 들건 안 들건 협력해야만 했다. 전쟁 중에 아군을 시기하며 반목하는 것은 자살행위니까.

신국의 입장에서 아사신들의 습격은 막대한 피해를 입힌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사신의 입장에선 모조리 임무 실패였다. 습격을 받은 신국의 군대는 더욱 맹렬하게 무굴제국군을 몰아쳤다. 아울러 경계도 더욱 심해졌다.

무굴제국군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자 신유성은 결국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페구로 옮기겠다.”

“하오나, 페구는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계속 말라카의 영주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

암살 사건 이후 말라카의 영주는 매일 같이 살이 빠지고 있었다. 피둥피둥 살이 쪄서 턱선이 두 개였던 영주였다. 그런데 지금은 턱선이 하나로 줄어들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옮기려는 진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벗어나고 싶다.’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다. 암살의 위협은 여전하지만 신유성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황제가 되지도 않았다.

물론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신하들이 더욱 과보호하려 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니 결국 명분을 찾아서 이를 이용하게 되었다.

‘나도 살아야지.’

결국 신하들은 신유성을 막지 못했다.

“페구를 조속히 정상화하여 새로이 백성이 된 이들이 누구의 백성인지 알릴 생각이다.”

직접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는 뜻을 꺾을 순 없었다.

아무리 보호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신유성은 황제였다. 황제가 황제로서 일을 하겠다는 것을 막는 것은 불충이었다.

말라카를 떠나는 것이 결정되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동하기 전에 페구에 신유성의 거처를 다시 한 번 살피고 경호를 위한 점검에 들어간 것이었다. 아울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페구의 방어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중이었다.

신하들이 일을 하는 동안 신유성은 말라카의 영주와 마주했다.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수고라니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건 내 성의니 받아두도록.”

신유성은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돈은 아니었다. 돈은 나중에 계좌로 넣어주면 그만이었다. 건넨 것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는 말라카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그림 실력은 둘째 치고 황제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희소가치를 따지자면 엄청난 것. 최근 들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신유성이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훗날 말라카의 영주는 자신이 그림을 받게 된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달았다. 황제가 된 이후로 신유성이 누군가에게 그림을 그려준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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