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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승전보.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신유성은 순수하게 기뻐하질 못했다.
“이런 일이.......”
아그라의 전투. 그것은 전투라고 불리기 힘든 일이었다. 참사라고 불러야 옳았다.
‘대체 무슨 짓을?’
마약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신유성도 알고 있었다. 수많은 약쟁이들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다르다. 약에 한 번 중독되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다.
약을 얻기 위해서라면 범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며 심할 경우 살인에도 무감각해진다. 이러한 마약으로 사람을 중독 시킨 뒤 세뇌시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먹을 것을 보여주며 종소리를 들려주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는 개처럼, 인간도 길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아그라의 참사와 같은 규모는 믿기 힘들었다.
‘미쳤네.’
신유성은 자신도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바르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승리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의지가 아그라의 참사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좀 더 확실히 해야겠어.’
이제는 반드시 죽여야만 할 적이었다. 어디로 도망친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생각이었다. 무굴제국을 멸망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굴제국의 황제를 죽이는 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영주로 삼겠다. 이미 영주인 자에게는 또 하나의 영지를 줄 것이다. 전군에 알려라!”
‘확실히 죽여야 해. 몰아쳐야 해!’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바르가 한 짓을 보며 신유성은 마음을 바꾸었다.
무려 10만을 마약을 이용해 광전사로 만든 악바르였다. 시간을 더 준다면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다.
“산맥을 넘어 티베트와 오이라트에 전하라. 원정 참여를 허락한다.”
명령을 내린 신유성은 다시 보고서를 읽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좋지 않은 소식은 겹쳐서 왔다. 아그라의 전투 소식 이후 남사고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운도 없지.’
남사고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착실하게 아메리카 진출의 교두보를 세우며 신유성을 도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는 뛰어난 신하였다.”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워하자 신하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장례는 이미 치러졌을 것이고.”
뭔가 해주고 싶었으나 해줄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남은 가족들을 더욱 보살피는 정도.
“그의 기록물들을 정리해 책으로 만들라.”
이름이라도 영원히 남게 해주는 것. 신유성이 생각해낸 보상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주, 쉴레이만 1세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후계자인 셀림 2세를 생각해 무굴제국을 원조하며 신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우호를 다지려 하긴 했지만 그의 정복욕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만큼은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정복욕은 아니었다. 유럽, 종교적 라이벌들과의 전쟁은 치러야만 하는 것. 쉴레이만 1세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눌러버릴 생각이었다. 후계자인 셀림 2세가 든든했다면 걱정할 것이 없었으나 쉴레이만 1세는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물론 셀림 2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한다.’
계속해서 도전해오는 가톨릭 세력을 찍어놔야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가톨릭 세력이 아닐지도 몰랐다.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까지 손에 넣은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가문. 쉬지 않고 오스만 제국에 이빨을 드러내는 오랜 앙숙.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오래된 숙원이었다.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대업이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헝가리로 진격했다. 물론 목표는 단순히 헝가리가 아니었다.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리 잡은 오스트리아의 심장 비엔나였다.
“진정한 로마의 황제가 누군지 보여주겠다!”
쉴레이만 1세의 호기에 신하들은 저마다 눈을 빛냈다.
‘아직도 정정하시다!’
나이가 많아 걱정이지만 쉴레이만 1세는 힘없는 노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다들 안심했다.
“가짜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의 발 아래 고개를 숙이게 될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지만 오스만 제국이 꿀꺽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라 자칭하기도 했다.
이 또한 가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죽어라 치고받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자! 승리를 향해!”
“우와아아아아아!”
전투를 앞둔 쉴레이만 1세의 연설에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시게트바르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1566년 8월.
니콜라 수빅 즈린스키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놈들.’
뜨거운 태양이 시게트바르성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계절, 즈린스키 백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막을 수 있을까?’
성을 포위한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지켜낸다!’
즈린스키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병사들은 답하라! 이교도에게 성을 내주고 지옥에 갈 것이냐?”
“아닙니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그러면 천국에 들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신부가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다며 종교 재판에 회부될 할 말이었으나 지금은 전투 직전, 즈린스키 백작의 말에 토를 달 사람은 방어군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쉴레이만 1세의 군대는 약 15만. 반면 시게트바르성 수비군은 약 2300명.
식은땀이 안 흐르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포위한 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즈린스키 백작은 물론 병사들도 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해줘야 하는 상황.
“쏴!”
수비군은 맹렬하게 싸웠다.
“우와아아아아아!”
달려드는 오스만 제국 병사들의 함성은 수비군의 심장을 맹렬하게 뛰게 했다. 겁이 났다.
“빨리 빨리 움직여!”
“쏴! 그냥 쏴!”
“화약을 아래로 던져!”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즈린스키 백작의 수비군은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맹렬히 싸웠다.
하루만에 무너질 것 같은 성이었으나 하루를 버텼다.
그 다음 날도 버텼다. 그리고 또 하루를 더 버텼다. 그렇게 계속 하루를 연장할 때마다 수비군은 조금씩 죽어나갔다.
“모두 지쳤나? 하지만 보라! 우리가 죽인 적들의 시체를!”
즈린스키 백작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신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여기서 포기할 것인가? 이교도에게 영혼을 맡길 것인가!”
“아닙니다!”
“하늘에 영광을!”
수비군은 모두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다.
“하늘에 영광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도 수비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게 독려하는 즈린스키 백작이었다.
“아직도 함락시키지 못하다니.”
쉴레이만 1세는 어이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군에 비하면 정말 한 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병력 밖에 없는 성이었다. 험지에 세워진 성이라 어려움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애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대체 왜 함락 시키지 못하는 건가?”
시간이 지나며 피해가 누적되었다. 시게트바르성 수비군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오스만 제국군이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갈 길이 멀어.”
다음 날, 오스만 제국군은 그야말로 성벽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징글맞은 성벽아! 무너져라!”
하지만 성벽은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또 다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하늘에 영광을!”
“죽어!”
수비군은 그야말로 광전사들이었다. 즈린스키 백작은 그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백작을 중심으로 뭉친 수비군은 꾸역꾸역 밀려드는 오스만 제국군을 막아냈다.
날이 갈수록 쉴레이만 1세의 얼굴은 붉어졌다.
“허허. 허허허허.”
부하들의 무능을 탓하기도 어려웠다. 자신이 직접 지켜보는 전투니까.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니까.
이젠 인정해야 했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군.’
오스만 제국군이 약한 게 아니라 수비군이 뛰어난 것이었다. 특히 방어를 책임지는 즈린스키 백작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복 권유를 하도록.”
쉴레이만 1세는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딱히 즈린스키 백작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이 있다면 내분을 일으킬 테니까. 조금이라도 수비군을 흔드는 효과 또한 노린 한 수였다.
수비군은 압도적으로 숫자가 적은 상황. 항복하면 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퍼지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었다.
허나, 즈린스키 백작은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의 수비가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크으으으으으!”
병력의 피해가 계속 늘어나자 쉴레이만 1세는 혈압이 치솟았다.
1566년 9월 4일 밤.
쉴레이만 1세는 식사를 하다말고 성질을 부렸다. 공성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저것들이 뭐라고! 어째서!”
명백하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게트바르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군의 피해는 계속 늘어났다.
하루가 지나고 또 피해 상황을 보고 받은 쉴레이만 1세는 여전히 화를 냈다.
“큭!”
계속 화를 내며 방방 뛰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왔다.
“으으으으.”
뒷목을 부여잡은 쉴레이만 1세는 자리에 누웠다.
“괜찮으십니까?”
“으음. 됐다. 피곤하니 물러가라.”
부하들을 모두 돌려보낸 쉴레이만 1세는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1566년 9월 5일.
쉴레이만 1세가 일어나지 않자 부하들은 그대로 공성에 돌입했다. 술탄이 지시를 안 해도 싸울 재량은 파샤들에게 있었다. 어차피 쉴레이만 1세가 내렸던 명령을 이행하는 것 뿐.
쉴레이만 1세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를 깨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든 술탄을 흔들어 깨운다는 발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위대한 술탄의 수면을 방해할 정도로 간 큰 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면 시간이 길어지고 오후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자 시종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
그제야 술탄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 저, 저, 저, 저.”
시종은 당황해서 뛰쳐나갔다.
“뭐냐?”
“수, 술탄께서!”
“뭐?”
뭔가 일이 있음을 짐작한 예니체리 하나가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쉴레이만 1세의 상황을 살피려다가 이상을 발견했다.
‘숨 쉬지 않는다!’
그제야 쉴레이만 1세가 죽은 것을 확인한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저 성 때문이다.”
쉴레이만 1세가 죽었으나 오스만 제국군은 그냥 물러가지 않았다. 후퇴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시게트바르성 전투는 쉴레이만 1세의 전투.
“위대한 술탄이 가시는 길이다. 승리를 안겨드리자.”
“예!”
기묘한 광기가 오스만 제국군을 휩쓸었다.
“쏴라! 무너질 때까지 쏴!”
“성벽을 아예 가루로 만들어라! 계속 쏴!”
“대포 교환이다!”
성벽을 향해 포탄을 쏟아 부었다. 8월부터 계속 포탄에 두들겨 맞던 성벽은 결국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벽이 아니라 돌무더기 같은 상황이었다.
즈린스키 백작은 드디어 끝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마지막이구나.’
크게 숨을 들이쉰 즈린스키 백작은 수비군을 마주하며 외쳤다.
“불타는 이곳에서 나가 우리의 적과 싸우자! 죽는 자는 신과 함께 하게 될 것이며 죽지 않는 자의 이름은 명예로워질 것이다! 내가 먼저 가겠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너희들도 한다! 하느님이 증인이시다! 나는 너희들을 떠나지 않는다! 나의 형제들아! 기사들이여!”
무너진 성벽. 열려버린 길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오스만 제국군을 보며 즈린스키 백작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돌격!”
9월 7일. 시게트바르성은 함락되었다.
수비군 피해: 약 2300명 사망. 오스만 제국군 피해: 쉴레이만 1세 사망, 파샤 3명 사망, 예니체리 7000명 사망, 병사 약 2800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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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