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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시게트바르성을 함락시켰지만 오스만 제구국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까지 가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단 한 사람, 쉴레이만 1세의 죽음 때문에.
시게트바르성을 함락 시켜 쉴레이만 1세의 마지막 전투는 승리로 이끈 것, 그것이 이번 원정의 마지막 성과였다.
허나, 쉴레이만 1세의 죽음은 공표되지 않았다. 너무 빨리 공표되어 적이 알게 되면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모르니까. 그렇기에 최대한 숨기고는 조용히 후퇴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유럽의 세력들은 의아했지만 곧 이해했다.
“멍청한 오스만 놈들! 고작 그 성 하나 못 먹어서! 하하하하!”
오스트리아에 있던 막시밀리안 2세는 오스만 제국군의 후퇴를 고소해했다.
‘휘유, 진짜 위험했는데.’
지원군도 제 때 보내지 못했다. 만약 시게트바르성이 함락되었었다면 그 다음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헝가리에 이어 오스트리아까지 밀고 들어왔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꼴에 로마의 황제라고 떠들더니! 가짜라서 죽은 것 아니겠나? 응?”
“그렇습니다!”
패전보임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2세는 한껏 들떴다.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한다!”
“맞습니다!”
“시게트바르성의 기사들을 추모하라! 진정한 로마의 황제가 명한다!”
진정한 로마의 황제. 쉴레이만 1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거점으로 삼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서 로마의 황제를 자칭했다면 막시밀리안 2세는 교회에서 인정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한껏 들떠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눈 막시밀리안 2세는 방으로 돌아왔다.
“후우!”
홀로 남게 되자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진격해오던 쉴레이만 1세의 군대 때문에 똥줄 타던 것이 기억났다.
‘위험했다! 놈들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면 계속 쳐들어왔을 텐데!’
이 시점에서 쉴레이만 1세가 죽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얼마 안 되는 병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나니 더 이상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난 것으로만 여겼다.
‘그래 신의 가호가 나와 함께 하는 거야!’
막시밀리안 2세는 진정으로 믿기 시작했다. 신의 가호가 있어 쉴레이만 1세의 군대가 패배했다고.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기적적이었다. 비록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시게트바르성 수비군의 대승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니 신의 가호가 정말 자신과 함께한다고 믿어버리게 되었다. 자신의 기도가 통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잠시 쉬던 막시밀리안 2세는 자신의 아내를 찾았다.
“들었나?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한다!”
잠시 쉬다가 다시 기쁨에 들뜬 막시밀리안 2세는 아내인 마리아를 찾았다.
“저도 들었어요. 정말 대단한 일이죠.”
마리아는 몹시 들뜬 표정이었으나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황후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내인 마리아는 사실 막시밀리안 2세의 큰 아버지인 카를 5세의 딸이다. 즉, 막시밀리안 2세는 사촌과 결혼한 셈.
이 모든 것은 오직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에스파냐와 신성 로마 제국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연인으로서의 뜨거운 애정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혈족으로서의 정은 있었다.
마리아는 따스하게 막시밀리안 2세를 안아주었다.
“폐하.......”
너무 흥분했던 걸까? 두 사람은 곧이어 열렬한 정사에 빠져들었다.
한바탕 쾌락의 폭풍이 지나간 뒤, 마리아는 막시밀리안 2세의 품에 안겨 속삭였다.
“그런데 우리 안나는 어떻게 할까요? 이제 슬슬 결혼을 시켜야 할 텐데.”
“마땅한 사람 있나?”
“으음, 별로 없네요.”
딱히 없었다. 멀쩡한 남자는 많았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노릴만한 존재는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을 맺어 어떻게 해서든 덕을 보려는 사람이 많을 뿐.
야망으로 가득한 이런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근원부터 빼앗길 수 있으니까.
“그래? 하긴 이제 별로 없지.”
막시밀리안 2세는 유럽의 가문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해도 벌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이며 보헤미아의 왕이었다.
에스파냐는 펠리페 2세가 꽉 쥐고 있었고 펠리페 2세 또한 타이틀이 여럿이었다. 괜찮은 가문이라면 프랑스 왕가가 있으나 프랑스 왕가는 카를 5세 때부터 엄청나게 싸워댔던 앙숙이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쥔 권력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가문이라면 얼마 되지도 않았다.
‘북쪽의 미친놈은 안 되고.’
이반 4세는 논외였다. 잉글랜드는 피의 메리라고 불렸던 메리 1세가 펠리페 2세와 결혼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죽으면서 왕권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에스파냐와 거리가 또 멀어졌다.
“아, 정말 없네.”
“그렇죠?”
막시밀리안 2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옆에 붙은 마리아의 몸을 주물럭거렸다.
“우리 마리아. 오늘따라 뜨겁군.”
“폐하가 대단하신 거겠죠.”
“흐음.”
막시밀리안 2세는 뭔가 떠오르자 문득 마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는 참으로 묘하지 않나?”
“뭐가요?”
“사실 그렇지. 그대와 나는 한 가문의 사람이니까. 우리 안나도 가문 안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주면 되지 않을까?”
합스부르크 가문 밖에서 적당한 혼처를 찾을 수 없으니 가문 안에서 혼처를 찾겠다는 것.
“그것도 괜찮겠네요.”
마리아는 별로 꺼리길 것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척계광은 집으로 돌아온 뒤 조용히 지냈다. 일도 하지 않고 사람도 그다지 만나지 않았다. 척계광의 일과 중에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무예를 돌아보거나 전쟁에 관한 일을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어찌 보면 한가한 한량의 삶.
허나, 청교공주는 척계광을 구박하지 않았다.
“오늘도 나가볼까?”
“그러죠.”
항주의 시내를 돌아보며 척계광은 진귀한 것들을 선물해주기도 하고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청교공주에게 시를 읊어주며 가슴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기분 싫지 않아.’
좋아서 헤벌쭉 입이 벌어지는 것을 꾹 참으며 청교공주는 나들이를 즐겼다. 척계광이 지금은 한량이라고 하나 이미 하나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장군이었다.
영지에서 척계광의 입지는 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단했다. 명나라 때부터 청교공주가 기반을 단단히 다져놨기 때문에 영지 상류층의 지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들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열락의 시간.
청교공주는 혼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쾌락을 느끼며 잠들었다.
정사 끝에 잠시 잠들었던 척계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휴우, 오늘도 무사히.’
기분이 좋을 땐 한떨기 꽃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화가 나면 태풍 저리가라였다. 이제는 가정제가 죽었으니 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 척계광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청교공주를 대우해주었다. 자존심이 강한 청교공주가 무시당하면 무슨 짓을 할 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잠든 청교공주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자 청교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을 보며 조용히 방을 나선 척계광은 자신의 집무실을 찾았다.
“오늘 새로 들어온 것은?”
“여기 있습니다.”
척계광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다시 싸우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원정군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난 상황이라고 하지만 신유성이 나중에 또 다른 원정을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지키시는 분이지.’
믿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했다. 말을 새로 배우는 것은 어려웠으나 정보를 규합하고 적의 상황을 살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모스크바 놈들은 더 걱정할 것도 없군.’
노부나가가 잘 해내고 있었다.
‘무굴제국, 이놈들이 문젠데.’
아그라의 참사 소식을 살펴본 척계광은 경악했다. 그리고 마약에 대한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언제 어떤 놈들이 이걸 이용할지 모른다. 절대 손에 들어가게 해선 안 돼.’
보고된 마약의 중독성은 무서웠다. 이를 이용한다면 친족마저 배신을 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마약은 척계광의 영지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공주가 다 잡아 죽이겠지.’
가정제의 딸이었다. 약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한 사람들을 보며 자랐었다. 그리고 결국 나라가 개판이 되는 것도 목격했다.
그 어는 누구보다도 약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척계광은 곧이어 다름 보고서를 보았다.
‘역시 폐하시군.’
아그라의 참사로 인해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진 신유성이 전력을 더욱 증강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의 전사들을 비롯해 티베트와 오이라트의 영주들에게 원정 참여를 명령한 것이었다.
‘전쟁은 곧 끝나겠군.’
척계광은 마지막 보고서를 살폈다. 그것은 바로 아메리카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가 딱 좋은데.’
아메리카 방면 원정군 사령관이 되고자 청할까 생각도 했지만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망설였다.
‘전염병이라니.’
온갖 전염병이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현실. 대군과 맞서 싸우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전염병과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폐하께서 왜 그토록 다른 나라의 의술이나 기술에 집착하는지 짐작이 가는군.’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한 노력을 척계광도 이해했다.
‘영지에 의원을 중점적으로 키우는 학교를 지어야겠군.’
척계광도 돈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유성을 따라 학교를 짓기로 했다.
한편, 신유성의 명령을 받은 히말라야의 전사들은 신이 났다. 카트만두 계곡뿐만 아니라 산맥 전체에 있던 부족들이 전부 원정에 참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산맥이 아닌 곳에 영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으하하하! 드디어 아그라다!”
히말라야 산맥을 내려온 전사들은 빠르게 달렸다. 무굴제국이 지배하던 때에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땅. 하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가로지를 수 있었다.
산이 안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좋았던 전사들은 마음껏 날뛰었다.
“여긴 왜 이렇게 뛰기 편하지?”
“지치질 않아!”
“천국이다!”
전사들은 싱글벙글 웃었다.
이들은 아그라에 도착하자마자 한 무리의 인간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엇? 저긴?”
싱할라족이었다. 싱할라족은 아그라에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히말라야 전사들은 바로 이 절을 찾은 것이었다.
“누구지?”
원래라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신국과 관계를 맺으며 조선어가 빠르게 퍼졌기에 조선어만 하면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절 하러 왔다!”
“오오! 들어와라!”
무슬림과 힌두교가 압도적으로 많은 땅에서 같은 불교 신자를 만나자 싱할라족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후 양측은 친목을 도모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오! 설마 거기서?”
카트만두 계곡은 불교의 성지 중 하나였다. 티베트와 인도 대륙을 가르는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교역로이기 때문에 힌두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땅이 바로 카트만두 계곡이었다.
소문은 들어본 싱할라족의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힌두교가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카트만두는 열렬한 불교 신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싱할라족과 히말라야 산맥 전사들의 교류는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의 친목에 뒤늦게 뛰어든 이들은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오오오오오! 성지에서 오셨습니까?”
티베트의 전사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싱할라족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더구나 전사들과 함께 승려도 함께 와서 더 난리였다.
언어도 인종도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인간들은 종교 하나로 똘똘 뭉쳤다. 이 때문에 뒤늦게 도착한 오이라트의 전사들은 약간 소외되었다.
“나 참. 우리도 친하게 지낼 사람 있다 뭐.”
오이라트의 전사들은 원정대에 속한 여진족 전사들을 찾아가 친목을 도모했다.
“서로 잘 어울리니 좋군.”
속속 합류한 이들이 반목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신페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를 모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나?’
허나, 신페이의 군대라고 다른 이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일본 출신의 영주들은 신유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진격 준비는 어느 정도나 됐지?”
보고서를 읽으며 질문을 던지자 부관이 바로 대답했다.
“다 끝났습니다.”
“그럼 내일 모레 진격하도록 하지.”
신페이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원정군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악바르의 군대가 무엇을 하는지 소상하게 살핀 결과 방어를 더욱 굳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